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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동자구청장 이갑용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 심 사 평
- 제7회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김진숙 씨를 선정하며
박종철인권상은 생전에 열사가 열망하던 민중해방의 정신을 가장 열성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게 수여해 왔습니다. 올해 심사위원회에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민중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가장 열성적인 수상자들이 추천되었습니다. 그분들 모두 수상 자격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현 시점에서 가장 어려운 투쟁을 감당하고 있고, 절박한 상황을 이겨가고 있는 김진숙 씨에게 격려와 연대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로 만장일치로 수상자를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노동운동의 탄압도구로 전락한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1월 6일, 지상 35미터의 크레인에 단신으로 올라서 현재까지 꿋꿋이 투쟁을 하고 있으며, 그런 투쟁을 통해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전국의 노동자와 민중들의 희망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리고 김진숙 씨는 30년 가까운 노동운동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1980년대 초 한국 최초의 여성용접공이 되어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이래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전노협,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노동운동의 한 복판을 지켜왔습니다. 가장 오래된 해고자이기도 한 그는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 노동자가 당당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열정을 바쳐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동지와 후배들이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던 설움도 이겨내왔습니다. 그가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이야기는 『소금꽃나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번에 그가 올라서 지키고 있는 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을 버티다가 목을 맸던 바로 그 크레인입니다. 그는 "김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하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올라갔고,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김주익 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오는 6월 11일 김진숙 씨를 만나러 가는 ‘희망의 버스를 타자’는 운동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김진숙 씨의 투쟁이 생존의 벼랑 끝에서 그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이 김진숙 씨와 그의 동지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싸우는 민중들에게도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제7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는 김진숙 씨를 수상자로 결정했음을 밝힙니다.
2011년 6월 3일
제7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
※ 제7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 구성
- 심사위원장 : 진관스님(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 심사위원 : 김거성(한국투명성기구 회장, 한국기독교장로회구민교회 목사
박동호(신수동성당 주임신부, 천주교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정도스님(양산 전법회관 주지),
조 국(서울대 법대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교수)
□ 수상 소감
1960년 강화도 출생
1981년 7월 대한조선공사 직업훈련소 입소(현. 한진중공업 훈련소)
1981년 10월 한진중공업 선대조립과 입사
1986년 2월 대의원 당선
1986년 7월 어용노조 폭로 유인물 배포로 해고
현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소금꽃나무』 저자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6/5 현재 151일차)
○ 김진숙의 현재 직책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전부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조선소의 유일한 처녀 용접사로 일하다가, 노동조합 투쟁 때문에 해고되고 그 후 이십 년을 해고자로 살아오면서 노동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일당이 좀 세서’ 용접을 배웠고, ‘돈 벌어서 대학 가는 게’ 소원이었고, ‘정의 사회 구현’에 도움이 될까봐 ‘노동조합’에 출마한 물정 모르는 촌뜨기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경험에 의하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면 매일 울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관리자를 만나면 주눅이 들어 안전모가 삐뚤어진 것은 아닌지 고쳐 쓰고 작업복이 단정한지 확인했으며 일이 힘들어 하루에도 시계를 수백 번씩 보지만 그럴 때마다 시간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회상한다. 그러던 시절에, 그녀는 노동조합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아침에 회사 가는 것이 즐겁고, 관리자에게 거꾸로 ‘걸리기만 해봐라’ 할 만큼 자신 있고 당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노동조합은 인간의 자존감을 깨닫게 한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라며, 다만 봄이 오면 ‘삼랑진 딸기밭’에 나들이 가고 싶어 하는 비정규직 해고자들의 청춘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지 안타까워한다. 김진숙은 진짜 노동자들의 건강함,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들의 자신만만한 낙관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로 책을 출간했다. “당신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정작 그는 “세상을 만들어 온 것은 노동자다. 거북선을 만든 것도 노동자다. 노동자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노동자의 현실을 그저 가슴 아프게만 바라본 사회의 시선 ‘외부자의 온정주의적 태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당당함’이 그녀에게 있다.(『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저자소개에서 인용)
2) 수상 소감
시퍼런 청년을 열사로 부르는 일이 나는 아직도 낯설다.
‘인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박종철이 대공분실에서 죽어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내가 거기 다녀온 지 몇 달 후였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내가 다녀온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었는지 내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었는지 비로소 실감났다.
그는 죽고, 그와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살아서 크레인에 오른 지 152일째.
(6월 6일 현재)
선배의 이름을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시대.
죽음으로 역사가 된 청년의 이름을 우리는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 부름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고 전국 곳곳에서 하룻저녁에도 수백개의 노동조합이 세워지고 어용노조가 민주노조로 바뀌었다.
불량 냈다고 따귀 맞고 5분 지각했다고 하루 일당이 까이던, 손가락이 잘리고 다리가 부러져도, 심지어 사람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순이 공돌이들이 노동자라는 본명을 쟁취했던 개명천지.
이 크레인에서 보는 바로 맞은편에 그의 집이 있었다.
선배와의 약속을 목숨처럼 여겼던 한 청년이 죽었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 크레인에선 조합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끼들과의 약속을 어겼던 한 노동자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이 고스란히 빚이 된 내가 다시 크레인에 올라 그의 집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본다.
역사는 아직도 이렇게 가혹하다.
인연이 빚이 되고 죄가 되는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 몫의 밭을 갈 뿐이다.
그렇게 돌을 골라내고 바위를 들어내며 황무지를 갈다보면 꽃도 되고 감자도 열리고 고구마도 캘 날이 오려니 하는 믿음으로.
25년 전 한 청년이 쓰고자 했던 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써내려가는 우리조합원들에게 이 상이 위로가 되길 바라며 곳곳에서 싸우는 노동자, 청년학생들, 민중들의 하루하루가 박종철이 살고 싶었던 세상으로 이어지는 나날임을 되새기고자 한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2011년 6월 6일
크레인고공농성 152차 김진숙 올림
※ 박종철인권상 역대 수상자 명단
제1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3년 6월 7일)
: 이인영(전대협 초대의장)
제2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4년 6월 7일)
: 윤기진 황선 부부(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과 대변인)
제3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5년 6월 7일)
: 이동진(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경상대총학생회장)
최승환(한총련 의장, 부산대총학생회장)
제4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6년 6월 7일)
: KTX여승무원 노조
제5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7년 6월 8일)
: 이시우(사진작가)
제6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9년 12월)
: 도한영(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부산본부 사무처장)
□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
대의와 신의를 위해 물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박종철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우리는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 낸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비로소 26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포함한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박종철(당시 23세,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의 의로운 죽음이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1월 14일의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한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이 박종철을 불법연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종철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 위기에 처한 조직 재건을 추진 중이던 선배에게 몇몇 인물과의 연락업무를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박종철은 ‘약속’과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약속’은 단순히 한 선배와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으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의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에도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민주의 제단’에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끝내 6월 민주항쟁으로 활화산같이 폭발하여 우리 사회 민주화의 초석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선배와의 약속’,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바로 이것이 ‘박종철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의 삶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박종철의 불꽃같은 삶
박종철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여사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도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보통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의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있는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런 박종철에게 자극을 준 사건은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조종을 울린 부마민중항쟁이었다. 열사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10월, 부산-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는 어린 열사에게 막연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열사의 형인 박종부도 박종철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서강대 운동권이었던 형의 의연한 모습이나 형이 보던 서적은 박종철이 이후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박종철은 재수를 하여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다. 박종철이 입학한 그 해는 당시 학생운동을 이완시키고자 전두환 군사정권이 기만적으로 추진한 ‘학원자율화조치’로 제한적이나마 열린 공간이 형성된 시기였다. 박종철은 치열한 고민과정을 거쳐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비공개써클에 가입하였고,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민중지향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2학년 때는 과 대표를 맡았으며, 3학년에 올라가서는 과 학생회장을 맡아 언어학과와 인문대 학생자치활동에도 앞장서면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선다. 공장활동, 농촌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삶을 체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직접 저항하는 가두투쟁,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에 연대하는 민중연대투쟁 등에도 앞장선다. 그 결과 도시빈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사당동 가두시위로 구류 5일(1985. 5),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투쟁인 가리봉동 가두시위로 구류 3일(1985. 6)을 살기도 했으며, 전태일 열사의 혼이 담겨있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1986. 4)되기에 이른다. 박종철은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을 추스렸으며, 그해 7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민중지향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주구에 불과했던 폭력살인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학생운동에 헌신한다.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
- 아버지 박정기, 형 박종부, 그리고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민주주의를 반드시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지’에 불을 지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는 급속도로 타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기만적인 ‘6·29선언’을 통해 위기를 회피해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도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맞물리면서 일단 성공하여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즉시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결정적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종철은 비록 전두환 군사정권의 고문 앞에 쓰러져 갔지만, 온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부산의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박정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박정기는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앞장서서 실천하였다. 아버지 박정기가 연로하게 되자 이제는 형 박종부가 유가협의 청년회장을 맡아 ‘박종철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친구와 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를 매개로 ‘박종철 인권상’ 제정과 시상, ‘박종철 인권 장학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박종철 정신’은 24년이 지난 오늘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