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화 기행
비 갠 어느 봄날 동네 어른들의 놀이를 위한 문화 기행에 참여하였다. 이번 달의 탐방지는 보온 속리산국립공원을 중심으로 법주사, 솔향공원, 선병국가옥이었고 오는 길에 충북 무형문화재인 낙화장 김영조 전시관을 덤으로 둘러보았다.
이번 속리산 법주사 답사는 지난 50여 년에 걸쳐 네 번째였다. 중3 때 수학여행으로 처음 찾아온 후, 대학 시절 교수님의 학회 심부름을 위해 속리산 관광호텔을 들렀고, 회사 직원들과 문장대를 올랐다.
매표소를 지나 ‘호서 제일가람’을 알리는 일주문에 이르기까지, 5리나 되는 숲길이 마치 속세를 잠시 떠나는 자들에게 부처의 법이 머무르는 큰 절임을 알리려는 푸근하였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대지를 흔들어 깨우고 만물을 소생시키려는 봄의 부지런한 몸짓으로 들렸다.
사찰을 찾을 때 느끼는 일이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조상들의 건축미학이었다. 탑과 석등의 조형물과 불교미술의 섬세함과 정교함에 감동받는다. 그러나 문화해설사로부터 추래암의 마애여래상, 석연지, 쌍사자석등과 팔상전 등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듣고 보니 이 모든 조형물이 상징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불교의 우주관과 석가의 세계관과 불교철학을 중생들에게 소통하기 위한 약속된 언어였다.
사각형과 팔각형 그리고 원의 형상, 단청의 문양과 색깔 그 어느 것 하나에도 의미 있는 대화의 신호를 나타냈다. 때로는 그 상징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도의 추상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특정 종교에서는 이러한 상징물을 우상이라고 폄하를 한다. 그래서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바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들을 파괴하였고, 이슬람국가라는 테러 집단은 우상 파괴 명분으로 이라크에서 고대 문명발상지의 유물들을 대량으로 파괴하는 반문명적인 악행을 자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법주사 마당에 전시된 큰 쇠로 된 솥이다. 한 번에 쌀 40가마로 3천 명의 승려들의 밥을 지을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한다. 그 큰 분량의 밥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끓는 물을 붓고 쌀을 넣은 뒤 두 번에 걸쳐 끓는 물을 넣으면 모든 쌀이 골고루 익게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려들이 이런 기법을 가진 것을 안 왜군들은 제일 먼저 승려들을 잡아서 전시에 신속하게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취사병으로 삼았다고 한다.
속리산 주위는 소나무가 상징이었다. 정이품송은 세월의 힘에 못 이기어 불행히도 반쪽 가지로 비대칭이 되었다. 소나무는 부러진 가지에서는 더 이상 생명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한다. 소나무 전시관에서 들은 솔방울의 종족 보존 이야기도 감동적이었다. 솔방울은 비가 오면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열린 조직을 닫는다고 한다. 마치 어미 펭귄이 새끼를 추위로부터 보호하듯 모성애를 보인다고 한다. 낳은 아기를 버리는 부모들은 소나무만도 못하지 않을까.
흔히 한국인은 소나무의 기질을 닮았다 한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역경 속에서 민족주체성을 지킨 우리가, 절벽의 틈새에서도 성장하는, 소나무의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한 소나무들이 재선충으로 우리 땅에서 점차 사라진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선병국가옥을 찾아보았다. 이 가옥은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보은 선씨(宣氏) 선정훈이 당대의 제일가는 대목들을 불러 130칸이나 되는 집을 개량식으로 마음껏 지은 집이다. 이들 가문은 일제강점기에 무역상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고향인 고흥에서 이곳 보은으로 터를 옮길 때 전국의 좋은 땅으로 여겨진 여의도와 대전역을 돌아본 뒤 결정하였다. 워낙 선한 일들을 많이 베푼 가문이라 이들 집 현판에는 주자의 글인 “위선최락(爲善崔樂)”을 걸어놓고 이를 가훈으로 삼았다. 이 집 바깥뜰에는 팔도의 장독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모양들이 각기 다른 것이 흥미롭다. 다른 모습은 기후와 토양이 달라서인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전통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판매도 했다.
오는 길에 동양화의 낙화라는 그림 기법의 장인이며 충청북도 무형문화재인 김영조 작업장엘 들렀다. 낙화(烙畵)란 종이, 나무, 천, 가죽, 박 등의 재료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그림이나, 글씨, 문양을 쓰거나 그리는 전통예술이다.
우리나라 낙화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18~19세기 박창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낙화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왔으나, 중국에서도 전통이 끊어졌고, 우리나라에서도 전수자가 끊기어 김영조씨가 고증을 통해 복원시킨 것이라고 한다. 온화한 그의 모습에서 예술가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낙화라는 전통예술의 새로운 형태를 알게 된 것은 수확이었다. 모쪼록 이 낙화 기법이 보존되고 전수되어 우리 전통예술로 자리매김하여 세계로 소개되기를 바란다.
봄날 하루의 여행도 끝났다. 지금까지 네 차례 이곳을 다녀왔다. 올 때마다 감회가 달랐다. 문화여행이란 얼마나 그곳에 관심을 가지고 사전에 학습한 것만큼 보고 느끼며 돌아오는 역사 기행이다. 특히 산사(山寺)를 찾을 때는 고유 전통뿐 아니라 불교 미학과 사상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 더욱이 우리 문화 계승에 기여를 한 개인의 숨은 이야기를 소중히 보존하고 알리며 자긍심을 가지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교훈이다.
5년째 계속되는 이 문화 기행에는 네 가지 금기가 특징이다. 음주와 가무, 종교와 정치 얘기가 그것이다. 서로 소개하는 불편함도 없다. 그저 조용히 다녀오면 된다. 그래서 자유롭다. 다음 달 행선지가 벌써 궁금하다. 산일까, 바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