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어온 남편이 난데없이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식탁 판 위에 뭔가를 그린다. “무슨 글자야?” “글자 아냐. 당신에게 바치는 꽃이야.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엥, 물을 찍어 그린 꽃이 결혼 선물이라고?” “말을 끝까지 들어 봐, 내가 쓰레기를 버리려고 현관을 나설 때 당신이 말했잖아.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가라고. 그때, ‘참,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지.’ 생각이 나더라. 하마터면 잊을 뻔했는데 걱정해 주는 그 말에 기억이 난 거지, 근데 내가 오늘 뭘 보았게?” “뭘 봤어?” “이 겨울에 화단 돌 틈에서 노란 꽃을 보았어. 요 며칠, 날씨가 거푸 추웠잖아. 이런 날씨에 어떻게 꽃을 피웠는지 몰라. 꺾어다 결혼 선물 겸해서 당신 보여주고 싶었지만, 꽃에 못할 짓 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니 이 꽃을 추위 속에 피어난 꽃이려니 여기고 받아주세요.” “아이고, 물꽃을 다 선물로 받네. 고마워요, 내 생애 최고의 선물로 접수.” 킥킥거리는 웃음과는 달리 증발하는 물꽃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착잡하다. 그새 물꽃은 모양이 일그러지더니 종래 식탁 위에서 자취를 감춘다. 식물인들 고난의 시간이 왜 없었겠는가. 굽이치는 인생길을 헤쳐 온 저 사람은 차가운 겨울에 의연히 핀 꽃을 차마 꺾지 못했을 것이다. 그 꽃을 대신한 결혼기념일의 선물이 잠깐 사이 증발하여 자취가 없다. 물꽃이 우리 삶의 상징 같다. 삶의 끝날이 오면 물꽃처럼 사라지고 말 우리들의 나날들이라니! -낭송 손정희(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