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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는 다양한 역사적 · 문화적 사료를 활용해 고려와 몽골이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한다. 몽골의 기원 설화 속에 숨겨진 고구려와의 유사성에서 두 나라의 관련성을 밝히고,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 몽골의 원류인 동호와 고조선이 같음을 고증한다.
저자소개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회 지도간사, 서울대학교 기독교문화연구회 사회과학 지도간사 등을 하면서 한국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론적 편향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 경제학과 근대 자본주의 개방 경제를 함께 연구하면서 한국 문제에 접근해 왔다. 그 연구를 기반으로 서울대학교 상대 졸업논문 최우수상(1988)을 수상하였다. 그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디지털 재화에 대한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2003)를 받았다. 교육인적자원부 지방대학 육성위원을 역임하고 한국싸이버대학(38개 대학 컨소시엄) 창립멤버였으며, 국민 경제자문회의 '지역균형 발전기획단'에 전문가로 참여하였다. 문화관광부 정책자문위원, 문화관광부 민족문화원형 발굴사업단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인 『인터넷비즈니스 원론(2002)』는 정진기 언론문화 출판상 후보작,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가을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지난 10여 년간은 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현재 동양대학교 교수(국제통상학과)로 재직 중이다.
2004년 1월부터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삼국지 바로 읽기’를 연재해 10만여 명에 달하는 『삼국지』 마니아들 사이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한국인이 널리 읽는 『삼국지』가 중화주의의 산물임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감춰진 고구려 역사를 찾아냈다. 2006년에는 『대쥬신을 찾아서1,2』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문헌적으로 고증하여 국사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책 역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북방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 인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학계는 북방사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고, 동이족 전반의 관계사에 대한 지평이 확대되었으며, 신라의 흉노 기원설이나 부여사의 종합적인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몽골과의 친연성도 다시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검토되고 있다. 『새로 쓰는 한일 고대사』는 2008년 인터넷에 연재한 것을 수정·보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수백 년에 걸친 한일 고대사의 여러 쟁점들을 해명하고자 했다. 2008년 이 글의 일부가 번역되어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번 책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는 세계사적인 체제(System) 위기를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와 추...(하략)
저자의 다른 책
- 우리가 배운 백제는
가짜다 - 2017.03
-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 (약... - 2013.06
-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한국... - 2012.01
- 새로쓰는 한일 고대사
(부여사의 비밀... - 2010.06
목차
글을 시작하며
제1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
고려와 몽골, 세계 경영의 시작
몽골과 고려의 세계 경영|고려와 몽골의 밀착 관계는 어디에서 왔는가
고려와 몽골, 결혼동맹의 실체
고려가 요청한 결혼동맹|원나라의 혼인 관계
충선왕, 세계 제국의 2인자
민초들의 대왕, 충선왕|세계 권력의 2인자가 되다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몽골제국과 고려의 만남|형제의 맹약|최이의 거짓 항복|왕족을 태자로 둔갑시키다|최항 정권의 무모한 대응|원나라 황제는 왜 속아주었나
제2부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
솔롱고스의 피가 흐르는 칭기즈칸
설화로 살펴본 몽골의 시조|솔롱고스의 나라, 한국|부여와 몽골|한국인의 심볼, 쇠[鐵]|동호와 동이는 같다|선비오환부에서 파생된 몽골족
현대 과학으로 본 고려와 몽골
한국과 몽골에만 있는 관습들|한국인의 70퍼센트는 북방계다|청동기 문화의 주역|외모와 체질이 같은 두 민족|문화적?지역적으로 살펴본 공통점
기황후의 연인, 원 혜종의 본 모습
원 혜종,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정치에 염증을 느끼다|문란한 궁중 생활로 결국 파국을 맞다
역사상 최고의 신데렐라, 기황후
기록으로 보는 기황후의 일생|권력의 중심에 서다|끝없는 사랑을 나눈 혜종과 기황후|왜 몽골 남자는 고려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는가|세 황제의 사랑을 받은 다마시리 황후
제3부 한국사 왜곡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
옷치긴 울루스의 귀족, 이성계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옷치긴 울루스|이성계도 몽골 이름이 있었다
이성계 가문의 비밀
풀리지 않는 의문|이성계와 나하추|중화주의를 강화하다
글을 마치며|주석
출판사 서평
몽골이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고려와 몽골, 그 특수한 유착 관계의 비밀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 교과서를 통해 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고려가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고려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몽골에 대한 격렬하고 끈질긴 저항 때문이 아니라 민족적 기원의 유사성에 있었다.
이 책은 다양한 역사적 · 문화적 사료를 활용해 고려와 몽골이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한다. 몽골의 기원 설화 속에 숨겨진 고구려와의 유사성에서 두 나라의 관련성을 밝히고,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 몽골의 원류인 동호와 고조선이 같음을 고증한다. 또한 칭기즈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원나라 황실에 고려 계통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린다. 이 과정에서 30년 대몽항쟁의 진상, 결혼동맹의 의미, 몽골과 고려의 언어적 · 민족적 유사성 등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한국과 몽골의 관계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구국항쟁의 상징, 30년 대몽항쟁의 진상
몽골 침입 이전, 고려와 몽골은 거란군을 소탕하기 위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는 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최씨 무신정권은 고려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몽골과의 관계를 악용했다. 무신정권은 몽골과 마찰이 생겼을 경우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식언, 허언, 임기응변 등으로 양국 간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양국 간에 화약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몽골군을 습격하고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를 몰살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신정권의 이와 같은 태도는 두 나라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고 결국 30여 년 동안 몽골의 끊임없는 침략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몽골은 고려 왕정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려 왕에게 힘을 실어주고, 왕족의 일원을 태자로 속여 파견한 일을 눈감아 주는 등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결혼동맹과 공녀 송출의 진실
한국에서는 몽골을 국토를 유린하고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는 등 고려를 식민 지배했던 나라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역사 기록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역사적 사실과 그 실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먼저 일반적으로 결혼동맹은 원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방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결혼동맹이 맺어지면서 더 큰 이득을 얻은 것은 고려였다. 몽골의 풍습상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씨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동맹이 성사됨으로써 고려는 부마국으로 승격되었고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국가의 독립성을 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고려 수탈의 상징처럼 묘사되었던 공녀 송출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록에 따르면 송출된 공녀의 수는 총 800명 미만이었고, 송출 이후 3년을 제외하면 매년 1∼2명 정도가 원나라로 향했을 뿐이다. 공녀로 뽑힌 여인들은 대부분 혼인을 하지 않은 처녀였고 이들 중에서는 기황후처럼 황제의 비빈이 되어 원나라 국정에 영향을 미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이도 있었다.
몽골과 고려, 민족적 유사성의 기원을 찾다
몽골과 한국 간의 특수한 유착 관계는 한국과 몽골이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몽골에서 한국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는 솔롱고스라는 단어에 그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몽골에서는 17세기 말까지 메르키드, 발가, 부리야트 등 몽골의 일부 부족들도 솔롱고스라고 불렸고 그들의 선조 중 일부가 한반도로 남하해 건설한 것이 고구려라고 전해진다.
또한 몽골의 원류인 동호가 고조선 유민에서 파생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그 유민들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일부는 고구려를 건설했고 나머지 유민들은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전국책》과《사기》를 살펴보면 ‘동호가 오환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몽골의 기원인 동호와 오환, 선비 등은 시기적으로 다르게 사용된 같은 말이며, 고조선 유민의 한 갈래임을 확인할 수 있다.
책속으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던 고려의 국체를 유지시켜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중략) 원 황제 무종은 “짐이 보건데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고려는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부분은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제1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중에서
원종은 (중략) 무신정권의 몰락 이후 국내적으로는 무신정권의 잔존 세력들을 통제해야 했고 땅에 떨어진 국왕의 위상을 높여야만 했다. 또 대외적으로는 원나라의 간섭을 최소화해 국내 정치의 독립적 기반을 쌓아야 하는 처지였다. (중략) 원종은 1270년 대도로 가서 원 세조를 만나 결혼동맹을 요청했다. (중략) 몽골의 풍습에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는 것은 같은 씨족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원 세조는 우선 신중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제1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중에서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충선왕이 도대체 어떤 지위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충선왕은 심양왕과 고려 왕(이즈음 충렬왕이 사거함)에 다시 오름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장악했다. (중략) 나아가 충선왕이 태자태부가 되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중략) 원 제국의 다음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은 충선왕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개부의동삼사’다. (중략) 충선왕이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는 것은 원나라 권력의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략) 이상을 보면, 고려 왕은 단순히 식민지의 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1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중에서
《원사》에 따르면 1365년 실권도 없던 바얀코톡토 대황후가 사망하자 많은 신하들이 기황후를 대황후로 옹립해야한다고 주청했으나 혜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중략) 혜종과 기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요르시리다라는 바로 북원의 1대 대칸인 빌릭토칸, 즉 소종이다. 그래서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은 황태자의 어머니가 대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오히려 기황후가 이를 완강히 사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략) 까다로운 종친들이 불문율을 깨뜨리면서까지 대황후로 옹립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기황후의 행실이 황후로서는 매우 모범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2부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중에서
다마시리는 고려 명문가의 후예로 할아버지 인 김주정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명재상이었고, 아버지인 김심 역시 세 번이나 정승에 임명된 문벌 귀족이었다. (중략) 다마시리는 무종 · 인종 · 태정제의 비빈으로 세 사람의 원나라 황제를 남편으로 둔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중략) 그만큼 권력이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태정제의 병이 위독한 상태에서 다마시리가 황후로 책봉되었고, 당시 조정의 최고 실력자가 엘테무르였다는 것이다. (중략) 다마시리는 원나라의 정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 조정에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제2부 한국과 몽골, 그 천년의 비밀을 찾아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