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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묵상글 ( 부활 제3주일. - 숯불 옆에서.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 지방순례 중이시기에 강론글 못 올리신다는 연락받음 (08:15)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아직 / 06:28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6:22 추가
^ 키엣 대주교님. : 아직 / 16:40 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16: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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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025.05.04 05:44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손수 아침을 준비해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세 번에 걸친 사랑 질문에
매번 예수님의 임무를 맡기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케파, 베드로라고 이름을 주신 시몬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십니다.
요한복음이 시작하면서
당신께서 반석이라고 이름을 주시고
요한복음이 마치면서
이제는 그 반석이 어떤 역할을 할지 알려주십니다.
그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을 보아서는
그 임무에 적임자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임무를 맡기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물으십니다.
당신의 양떼를 맡기 위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세 번의 부인으로 베드로도
자신이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베드로에게
그의 약한 모습을 직면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덮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면서
베드로는 자신의 나약함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은
또한 자신의 나약함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 고백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요한복음사가는
대화의 장소를 숯불 옆으로 이야기합니다.
앞서 베드로는 숯불을 쬐면서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이제 숯불 옆에서 그 모습을 다시 바라보면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약함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함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볼 힘도
그것을 딛고 일어날 용기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도 함께 키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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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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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참으로 바라보기! - 열여덟 번째 주간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5.04. 04:32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5월 23일 토요일 - 열여덟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바라본다는 것은 자연의 놀라움 안에서 그 경이로움을 받아들이고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오랫동안 광야나 숲에서 자연 피정을 지도하면서 시행해온 "참으로 바라보기" 실천법에 대해 나누어 줍니다:
저는 피정 때 사람들을 숲속으로 내보내면서 그들에게 모래 위에 어떤 상징적인 선을 그리고는 그들이 가는 저쪽에서 특별하게 기대되는 것, 혹은 뭔가를 드러내 주는 어떤 것을 실제로 기대해 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늘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는 표시해 놓은 나무나 잔디 혹은 "모래 위의 선" 저쪽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 즉 나무 하나, 새 한 마리, 혹은 심지어 곤충 한 마리가 우리에게 거저 주는 완전히 순수한 선물의 본질을 보게 되고, 이때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묵하게 됩니다. 이렇게 제대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본질적인 존엄성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감각에 기쁨이 넘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자연 안에서의 경이로움을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또 그 경이로움을 깊이 맛보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존재들에 의해 "붙잡히도록" 허용할 때, 우리는 참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바깥쪽에 그 어떤 것, 우리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에 의해 완전히 넋을 잃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바라보아지는 것"(behelding)에 대해서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붙잡거나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 무언가에 의해 붙잡히고 설명되고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무언가가 우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상황과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바라보라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실망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 하나를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피조물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자기-비움의 한 사례로서 "절대적인 진리"를 볼 때까지요! 우리가 이렇게 그 나무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이 너도밤나무인지 느릅나무인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유용한 것인지 쓸모 없는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우리의 것인지 우리의 것이 아닌지, 딱딱한 나무인지 부드러운 나무인지 등등과 같은 단순한 "상대적인 진리"를 넘어서서 그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관념이나 생각의 간섭 없이 있는 그대로 그 나무로 하여금 자신의 천부적 존엄성을 드러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때 이 나무는 하나의 현현(epiphany)이 되는 것이고, 이때 비로소 우리 세상의 벽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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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나를 따라라!"
하느님의 숨
2025.05.04. 05:59
저는 이번 주일 복음 묵상을 하면서 요한 복음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베드로 사도(다른 제자들도)의 마음을 좀 색다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 머리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다시 드러내셨다고 합니다.
본래 맨 처음에 쓰인 요한 복음은 20장으로 끝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같은 저자나 다른 어떤 사람(요한계 사람 중 하나)가 21장의 내용을 덧붙인 것이라고는 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은 뒤로 하고 다시 왜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 하는 의문이 다시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스승이요 주님이며 구세주로 모시며 따르던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절망스럽게 끝난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이 "다시"라는 단어로 인해 베드로 사도의 심정을 새롭게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 알렸다고 전합니다. 특히 요한 복음은 베드로가 무덤에까지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하기 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또다시 사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두 번이나 당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까지 주셨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왜?
왜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옛 직업이었던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듣는 이 유명하고 아름다운 장면 안에서 저는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으시는데, 이것을 우리는 대개 베드로의 세 번의 배반과 연결시켜 이해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지은 그 잘못을 하나씩 하나씩 되돌릴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 대화에는 언어의 유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듯이 이 대화에는 두 개의 그리스어 동사 '사랑하다'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완전한 사랑, 즉 조건없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인 'agape' 명사의 동사형 'agapan' 동사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호하는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philo' 명사의 동사형 'philein'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처음에 이렇게 물으십니다. "Agapas me?" 즉 "너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줄 수 있는 만큼의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Philo se." 즉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만, 친구로서, 제가 정말로 좋아는 친구로서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진솔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Agapas me?" 그러나 이때도 베드로는 다시 "Philo se!" 하고 대답합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agape 사랑은 아니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시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Phileins me?" 즉 "너는 나를 좋은 벗으로서 사랑하느냐?" 하고요.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눈높이로 내려가 주신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바람에 베드로가 슬퍼졌다고 복음서는 말하지만, 사실은 베드로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것은 이전에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하고 말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슬픔이거나, 그런 예수님에 대한 정말로 죄스런 마음에서 오는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베드로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지극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만큼밖에 사랑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하고요!
바로 이 말씀이 우리가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 깊이 새겨야 할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 열쇠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요!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지만, 중세 이전의 예술 작품들을 보면 베드로는 초라한 촌부(혹은 어부)로 묘사되었고, 늘 그 옆에는 소리 높여 우는 닭이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박해 시대를 거치고 또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위 사도요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큰 위로요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끌어안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당신 사랑의 도구로 쓰셨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얼만 큰 위로요 용기가 되었겠습니까?! 분명히 그들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테지만, 그때마저도 다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이를 통해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서 우리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되자 베드로 사도도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하늘나라의 큰 열쇠 뭉치를 들고 있는 거대한 한 인물로 묘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거치거나 잘못을 저지르게 될 때 베드로처럼 주님을 뵐 면목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용서와 용기를 주시고 당신을 다시 따를 수 있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를 끌어안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또한 그를 당신 사랑의 도구로 써 주셨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시지 않으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실제로 경험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냥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풍요롭고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약하기에 우리는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사랑의 사명을 맡기신 예수님은 이 진리를 분명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정말로 엄청난 복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느님께는 우리의 죄가 벌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치유의 대상이고 이 용서와 치유를 통해 우리의 죄를 당신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시는 토대라는 역설적 진리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반드시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한없이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요. 당신의 양 중에는 '나'도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와 함께하는 '내' 남편, '내' 부인, '내' 자녀들, '내' 친구들, '내' 동료들, '내' 공동체 형제자매들, '내' 이웃들, 심지어는 '내'가 꺼려하는 사람들 등등 모두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한 우리가 어떻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를 따라라!" 하고요!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우리 앞에는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매번 뒤돌아 서시어 따스한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한 번도 예외 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를 이 사랑의 길을 우리 함께 용기를 내어 힘차게 걸어갑시다!!!
스스로가 한없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늘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또다시 용기를 내어 사랑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더해 주시며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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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5.04 06:01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아는 지인 한 명이 생각납니다. 이분께서 있는 곳은 늘 분위기가 좋았고 사람들에게 긍정 에너지를 심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밝게 또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분이었기에, 항상 좋은 일만 있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분 안에 꾹꾹 눌러둔 슬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분을 떠올리며 앞선 글처럼 모두에게 슬픔 한 자락은 꼭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밝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슬픔이 ‘1’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슬픔의 시간도 분명히 있고, 또 불쑥 찾아오는 슬픔도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모두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주님과 함께해야 했습니다. 주님만을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고 우리를 달래주십니다. 진짜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위로만을 찾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세상이기에 이 세상 안에서는 완벽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위로는 완벽합니다. 우리에게 딱 맞는 따스한 온기를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슬픔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라고 말했던 것처럼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과 상실을 세상에서 메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결과는 허탕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예수님께서 물가에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낯선 사람(아직 주님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의 주님의 이 말씀을 제자들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을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로 물고기와 빵을 준비해 놓으십니다.
복음의 이 장면을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신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위로와 힘을 계속해서 세상 안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주님이 아닌 세상 안에서는 어떤 위로와 힘도 받지 못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멋진 일은 가족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조지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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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생명이 생생하게 돋아나는 5월은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신 어머니 성모님의 달입니다. 오늘은 부활 3주일이며, 생명주일입니다. 봄이 싹을 틔우며 생명을 증명하듯이 오늘 <말씀전례>도 생명을 증언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증언합니다. 최고의회 앞에 선 베드로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 5,30)
<제2독서>는 하느님 나라의 천상전례에서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들이 바치는 경배와 찬미의 노래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생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침을 해 먹이시며 생명을 섬기시고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발현하셨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절망에 빠져있고 과거의 생업이었던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엉뚱한 곳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시어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요한 21,6)
그들이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날 아침을 열치시고 오시어,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부르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을 먼저 알아 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른 것은 와서 시중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시중을 드시려고 부르십니다. 사랑하시려고 부르십니다. 곧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시기보다 우리를 당신이 사랑하시려고 부르십니다. 결국,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고 깨우쳐주고자 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그리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지만, 당신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소중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 더 더~ 저희를 믿으십니다. 그러니 사실은 저희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 믿음으로 저희가 살아가게 됩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당신은 훨씬 더 더 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저희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오늘도 저희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희망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더 더~ 저희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희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숯불에 구운 물고기’는 수난 받으신 당신의 몸을, 그리고 당신이 몸소 준비하신 ‘빵’은 찢어지고 바수어진 당신의 몸을 드러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쳐 부활생명을 담은 사랑의 아침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당신의 밥상을 받아먹는 일인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시중을 받는 일,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색깔을 드러내고, 당신의 향기를 뿜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퍼 먹이시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아는 일이요, 그리고 그 사랑을 먹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이심을 아는 일입니다. 그래야 부활생명으로 살아나 당신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저희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려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해야 할 일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구워 드려야 할 일입니다. 기쁨으로 부활생명을 경배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은 제가 저의 삶으로 당신께 상을 차려 올리렵니다.
형제들에 대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의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겠습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과 내맡김의 생선을 굽겠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시어 아침을 드십시오. 사랑합니다. 주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주님!
이 아름다운 아침,
당신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을 먹고 새로워지게 하소서.
당신 생명과 사랑을 먹었으니,
종일토록 당신의 색깔을 내고, 당신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
오늘 저의 삶이
당신께 차려 올리는 밥상이 되게 하소서.
형제 섬김으로 생명의 밥을 짓고,
말씀 시중으로 반찬을 마련하게 하소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국을 끓이고,
의탁의 생선을 굽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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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른”과 “꼰대”는 나이는 비슷할 수 있지만, 태도와 사고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른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 꼰대는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른은 젊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경험을 나누되 강요하지 않고, 조언이 필요할 때만 건넵니다. 과거의 방식을 절대 기준처럼 내세우지 않으며, 세상이 변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배우려 합니다. 직책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반면 꼰대는 자기 말만 옳다고 생각하고, 대화가 아닌 설교를 합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세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나이나 지위를 내세워 복종을 요구합니다. 제가 아는 어른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말은 적게 하고, 지갑은 자주 여는 사람.” 저도 60이 넘은 나이에 후배 사제들에게 ‘꼰대’가 아니라 ‘어른’이라는 말을 듣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책임’으로 보십니다.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돌보아라.”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 번이나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같은 수의 질문으로 베드로의 실패를 용서하시고, 사랑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이라는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가 이 성당 안 바위에 손을 대고 기도합니다.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저도 그 성당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가브리엘 신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이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 두 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분은 대구의 김장하 선생님입니다. 평생 한약방을 하시며 돈을 벌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쓰지 않고, 수많은 가난한 학생과 이웃을 위해 장학재단과 복지재단을 만들고 수백억 원을 기부하신 분입니다. 본인은 단칸방에서 검소하게 사시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요, 남을 위해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자기만 알고 살면 결국 외롭고 불행해져요.” 그 장학금으로 공부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문형배 헌법재판관입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공부하던 문형배 재판관은 김장하 선생님의 도움으로 꿈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훗날 성공한 뒤, 선생님을 찾아가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김장하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건 나의 것이 아니야. 내가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너에게 나눈 것뿐이다. 이제는 네가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문형배 재판관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법의 정의를 지키는 어른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판결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며, 공정하고 흔들림 없는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이 두 분은 말로 사랑을 외치기보다는, 삶으로 사랑을 증명한 진짜 어른들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명령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않고, 우리 곁의 누군가를 돌볼 때, 진짜 부활 신앙이 시작됩니다. 내 자녀, 내 가족, 내 일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눈을 넓혀 주님께서 맡기신 양들, 약한 이들, 외로운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어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돌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그분의 양들을 돌보는 발걸음도 함께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모습일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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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가 뛰어든 이유가 뭘까요? 주님이라는 말에 겉옷을 입고 말입니다. 시선이 고기에서 예수님에게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마음이 다시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겉옷? 그것은 사랑에 대한 예의입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자녀와 부모 사이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저와 여러분 사이에도 사랑하면 할수록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의입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해도 사랑의 한 부분이고 용서도 한 부분입니다. 인내도 한 부분이고, 감사도 한 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 들어있고 이것이 있을 때만이 일치를 이룹니다. 좋아하는 감정만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인내도, 용서도, 이해도 없습니다. 좋은 감정이 없어지면 사랑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쉽게 헤어져 버립니다.
오늘 주님께서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는 것을 본 일이 있으십니까? 그만큼 사랑은 중요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도전받고 유혹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저울에 달아놓은 과일처럼 비교합니다. 나한테는 잘 해주겠지? 우리에게는 잘해 주겠지?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시험하려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도전받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용서와 이해도 사라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오로지 주님입니다. 주님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에는 좋은 것만 있을 수 없습니다. 아픔도 있고 좌절도 있고, 힘도 듭니다. 그러나 힘내십시오. 힘겹게, 힘겹게 고기를 건지려는데,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좌절과 실망에 빠졌을 때, 제자들을 도와주신 주님의 손길이 우리에게도 닿을 것입니다.
⭐토마토 달걀 볶음
두 달 전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몇몇 분과 야식 탐방을 나섰습니다.
길가에 놓여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메뉴판을 보고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는 음식은 따로 있었습니다.
중국식 ‘토마토 달걀 볶음’이 그것이었습니다.
토마토 계란탕은 있는데 볶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에게 부탁했습니다. 주방장에게 ‘토마토 달걀 볶음’을 청해줄 수 없냐고 말입니다.
외국 사람이 부탁하는 중국 가정식에 주방장의 마음이 움직였나 봅니다. 이내 ‘토마토 달걀 볶음’이 제 앞에 놓였습니다.
저도 ‘토마토 달걀 볶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맛을 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만든 요리에는 추억과 향수가 빠져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음식의 맛은 양념이 아닌 추억과 향수가 좌우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랜만에 잘 먹었습니다. 중국식 ‘토마토 달걀 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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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25.05.04 06:05
교회의 생명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계승할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은 명령과 지휘로 통제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돌보는 가정과도 같은 ‘사랑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힘은 규율이나 권위가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으로 세워진 교회가 사랑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형제 자매도 사랑할거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바로 교회를 이끄는 원천입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교회는 굳건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선교라는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선교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건져 올리고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배와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어부는 돛을 달고 깊고 넓은 바다로 나가야 비로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는 머무는 것이 아니라 멀고 험한 길을 찾아 떠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거센 파도와 바람,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지만 그 위험을 받아들이고 감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떠나야 하는 것은 주님의 바람이며,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인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이 함께 한 노력에 의해 결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 일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교회 활동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니 그들은 기적처럼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 않으셨고 파도를 가라앉히지도 않으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만을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볼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교회 안에 계십니다.
“나는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언제까지나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다”
교회의 강력한 힘은 규율과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교회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하신 주님이지만, 그분의 존재 속에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깊은 사랑과 용서가 많을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결실은 안정되고 정착되었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갔을 때 보람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떠날 때만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고통이 클수록 교회는 강해집니다. 멀리 떠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히 교회와 함께, 떠나는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희를 언제나 사랑하시는 주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지금 나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2.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고 있습니까?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3. 수많은 어려움과 박해에도 교회는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굳건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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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05.04 09:44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삽시다
“사랑, 찬양, 순종, 따름”
성모성월 5월, 주차장앞 연산홍 꽃속에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 요셉상도 지극히 평화로워 좋습니다. 25년전 이때즘 “성 요셉”이란 시도 떠오릅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성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오늘은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성모성월에 맞이하는 부활 제3주일이자 제15차 생명주일입니다. 생명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문희종 주교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속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앞세워 지켜야 할 가치는 생명이다. 과학기술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그 쓰임 방식에 따라 사회와 인간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생명을 수호하며 희망의 표징’이 되는 우리의 사명이다.”
신록의 생명과 기쁨으로 빛나는 주님 파스카 축제의 계절에 맞이하는 성모성월 5월입니다. 참으로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한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기쁨으로 드높입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셨으니, 내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이어 저절로 흘러 나오는 성모성월 성가 244장이 또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오월화장한 봄날 녹음상쾌한데, 성모뵈옵는 기쁨 더욱 벅차오리.”
5월은 성모님의 달이자 또 하나의 성모님인 모든 ‘어머니의 달’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의 절대적 보호와 사랑을 받는 대한민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성월 5월, 정신 바짝 차리고, 참 좋은 대통령이, 참 좋은 교황님이 뽑힐 수 있도록 온마음을 다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록의 생명과 기쁨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제가 참 좋은 삶의 방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사랑이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발현하신후 확인하는 물임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이요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무려 세차례 확인할 때 마다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세 번씩 주님을 배반한 적이 있어 베드로는 몹시 마음 아프게 새겼을 물음이자 답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은 대동소이, 똑같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주변의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바로 함께 하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섬기고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인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듯 이웃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우리 사람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평생 사랑의 인생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서로가 생명충만한 삶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사랑결핍이 만병의, 만악의,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친히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마르지 않는 샘솟는 사랑의 샘이 됩니다.
둘째, 찬양하십시오!
사랑은 표현을 찾습니다. 사랑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찬양과 감사로 그 사랑을 표현할 때 그 사랑은 저절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영혼이 살기위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영혼이 하느님 창공을 자유로이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입니다. 진정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사랑을 표현할 때 살아나는 영혼이요, 그래서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제2독서 요한 묵시록의 천상 어좌의 찬양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의 하느님 찬양입니다. 천상 찬양에 대한 요한 사가의 생생한 고백의 증언입니다. 수백만 수억만의 천사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수도자들은 물론 참 신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찬양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찬양하라 지음 받은 인간영혼들입니다. 살기위해, 영혼이 살기위해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사랑의 찬양과 감사는 필수입니다.
셋째, 순종하십시오!
사랑의 찬미찬양이듯이 사랑의 순종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야말로 참 영성의 잣대요 인간 품위의 기초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삶은 순종입니다. 침묵과 경청, 겸손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종이요, 순종이야 말로 믿음의 핵심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진리에,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순종에서 샘솟는 용기요 담대한 믿음이요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사도들이야 말로 천하무적의 순종의 용사, 믿음의 용사, 성령의 용사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우리의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참으로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성령충만한 주님 부활의 증인의 삶입니다. 참으로 순종할 때 참 자유에 기쁨이요 무수한 축복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에서도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에게서도 빛나는 믿음의 축복을 발견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께 순종하여 그물을 던져 그물 가득 고기를 잡았으니 말 그대로 순종의 축복입니다. 순간 애제자 요한은 사랑의 눈이 열려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고백하니 이 또한 순종의 축복입니다. 사랑의 순종, 순종의 자유, 순종의 축복, 순종의 기쁨이요 순종은 영성의 잣대가 됩니다. 초라하게 늙어가는 외로운 ‘노화老化의 인생’이 아니라 순종으로 익어가는 ‘성화聖化의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을 따르십시오!
마지막으로 시종여일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진리의 길이자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요 길이요 빛이신 주님입니다. 이 주님말고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늘길이자 하늘문입니다.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주신 말씀은 단 하나요, 우리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나를 따라라.”
역시 사랑의 순종, 사랑의 찬양, 사랑의 따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자발적 사랑의 순종과 찬양, 추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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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괜찮아, 와서 아침을 먹자>
당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벗들
제 살길 찾아 당신을 버리고
옛 삶으로 돌아간 벗들
익숙한 옛 삶에서
실패하고 낙담한 벗들
당신의 말씀에 따라
옛 삶에서 새 결실을 맺은 벗들
다시 살아난 당신을 마침내 알아보고
부끄러움에 당혹해 하는 벗들
당신은 누구십니까
차마 물어볼 수조차 없는 벗들
벗들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시고
벗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시며
벗들을 따뜻하게 품으시고
벗들과 당신을 하나로 이어주시며
벗들에게 새 삶을 열어주시고
벗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벗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부르시는 말씀
‘괜찮아, 와서 아침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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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부활 3주일에 우리는 요한 복음의 끝부부인 21장의 내용을 듣습니다. 21장은 베드로의 사목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목직을 맡기기 전에 당신께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티베리아 호수에서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고기잡이를 나갔지만 제자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없이 우리는 악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실패에 애정어린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얘들아’라는 이 호칭은 바로 애정어린 친밀감의 표시입니다. 부활체험의 시작은 이처럼 따뜻한 마음의 건넴에서 시작됩니다. 얼어 붙은 마음에 따뜻한 사랑으로 인해 녹듯이 사라지는 사랑의 체험이 바로 부활체험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부활체험은 제자들처럼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 생활의 비천한 인생을 따뜻하게 맞이 해주시는 분은 바로 사랑의 주님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번의 질문을 통해서 부활체험이 눈높이 사랑으로 내려오심을 깨우쳐 주십니다. 첫번째 질문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시몬 베드로는 자신있게 대답했을 상황이지만 예수님의 부인한 가슴아픈 과거가 떠올라 가슴이 절여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질문에 나오는 ‘사랑하다아가파오)’ 동사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조건없는 순수한 사랑을 뜻하고 베드로의 대답에 나오는 동사(필레오)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질문은 앞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 맞추어서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제쳐 놓음으로써 눈높이에 맞게 질문을 하십니다. 더 나아가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제쳐놓음은 물론 더우기 동사까지 베드로가 이해하는 좋아함의 의미로 더 낮춤으로써 질문의 강도를 더욱 떨어뜨리십니다.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는 똑같은 대답을 하지만 마지막 질문의 대답에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분이 질문의 강도를 떨어뜨리셨을 뿐 아니라 세 번에 걸친 자신의 부인을 되갚기라도 하듯 세 번이나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섭섭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에 한결같이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일관성을 보여주십니다.
교회의 사목직은 주님께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극도의 순수한 사랑만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힘없이 배신의 늪에 빠져 버린 베드로에게 최고의 사목직을 맡기십니다. 실패한 적이 없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넘어진 경험이 있는 이가 그 심정을 알기에 넘어진 이를 더 잘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사목직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의 개인적 사목직이기도 합니다. 부서진 마음과 비천한 체험을 통한 사랑의 부활체험을 겪은 후라야 진정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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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빛은 점점 커지더니 하나의 불덩이가 되었다. 아이들은 겁이 났으나 소리칠 여유도 없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불덩이가 뚜렷해지더니 그 불덩이 속에서 아이들이 지금껏 한번도 본적이 없는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한마디 말없이 그들에게 미소지었다.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감미로왔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쁨만이 충만했다. 이 모든 것이 잠깐 동안만 지속되었니? 15분? 한 시간?-이상하게도 이점에 있어서는 의견이 서로 달랐다. 확실한 것은 이 일이 한 시간의 강의를 초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흰 옷을 입었고 작은 태양같아 보였다. 아이 스스로는 빛을 발산하지 않았다. 태양의 밝음도 그 곁에서는 빛을 잃었다. 소녀들 중 몇 명은 이 빛에 의해 앞이 보이지 않았고 눈이 아팠다. 다른 소녀들은 이 작은 아이를 고통없이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서 불덩이 속에서 사라졌고, 이 불덩이도 점차 소멸되었다. 문이 소리없이 저절로 닫혔다. 마음은 기쁨과 경이로 가득차서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때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정적을 꼈다. 여선생이 지옥에서 걸어나온 듯한 눈으로 완전히 미쳐서 소리쳤다-“그가 왔다! 그가 왔어!" -그리고 나서 그녀는 문을 닫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안젤라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녀는 “너희들 보았지. 아기예수님은 존재하는 거야. 이제 우리 감사드리도록 하자”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느님 아버지” “성모 마리아여, 당신을 환영합니다.” “하느님께 영광 있으소서.” 기도를 드리고 나서 아이들은 교실을 나갔다. 왜냐하면 종이 울려 휴식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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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와서 아침을 먹어라.”(21,12)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결국 배신하고 그런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 가운데, 베드로는 새로운 출발, 재출발을 위해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사실 위기의 때에는 익숙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처음 가졌던 마음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처럼, 그곳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바로 주님을 다시 만나는 갈릴래아입니다.
낙담의 순간에 예수님은 물가에 서 계시면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2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던지는 일 베드로 사도와 동료들이 주님을 따르기 이전에 해왔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새로운 일,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바뀌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5, 10)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고 말씀하신 바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것은 제자들이 이룬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룬 일입니다. 결국 사도들은 다만 그분의 도구이자 연장일 뿐입니다. 이는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그물을 던지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겠지만 사도들처럼 주님의 말씀과 은총에 의지할 때 많은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 선포자는 언제나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야 합니다. 즉 주님의 도구임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을 선포하며 살다 보면 때론 실망하고 자기 환멸에 빠져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만나는 신자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게 되고 활력을 되찾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복음 선포자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자기의 삶을 통해서 부활하신 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아울러 그들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복음 선포자는 마치 베드로 사도가 주님이시다, 는 말을 듣고 겉옷을 걸친 채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늘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3번이나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함으로써 주님을 뵙기가 민망하고 부끄러울 수 있었지만, 그런 자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찾아오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자비를 느끼면서, 다만 주님을 만나고 싶은 일념에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무모할 만큼 어리석음, 단순함이야말로, 베드로의 본마음이며 믿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실패에 집중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다시 찾아주시고 불러 주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회복이 바로 부활 체험이라고 봅니다.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바다로 뛰어든 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며, 그 뛰어듦을 통해 어제의 베드로는 죽고 오늘의 새로운 베드로로 다시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낼 때, 우리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날에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21,12)라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숯불 곁에서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이제 숯불 곁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목자의 직무를 수여하실 것이다. 이 숯불은 베드로만이 아닌 우리 역시도 우리가 배반하거나 배신했던 때 곧 대제관 집 뜰에 피워져 있던 숯불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복음 선포자로 선택받은 것은 그럴 자격이 있다거나 그만한 업적을 쌓았다거나 유능하기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선택해 주셨음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숯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숯불은 우리의 비참함이지만 또한 주님의 자비로움의 상징입니다. 그 숯불 곁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라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더 사랑합니까?, 라고 주님께서 왜 물으셨을까요? 물론 이 질문은 단지 베드로에게만 하는 질문이 아니며, 이 질문은 모든 복음 선포자의 가슴에 새겨야 하고 가슴을 파고드는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물음은 모든 제자에게 향한 질문이며, 결국 베드로의 대답은 복음 선포자로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드려야 할 대답입니다.
복음 선포자로 선택은 사람들은 주님께 향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사랑에 대한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 즉 교회의 받침돌이 된 것은 그의 인간적인 성격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모두 주님에게 걸려 넘어진다 해도 저는 절대로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장담했지만, 그 역시도 걸려 넘어졌기에, 베드로는 이제 조용히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6)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대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답 중에서 가장 성숙한 대답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대답을 모든 것을 감싸는 주님의 사랑에 맡겨드립니다. 이때 베드로의 겸손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발을 씻어주시려 할 때 “주님, 제 발은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라고 소리치던 때의 거부가 아닙니다. 그는 이 순간, 저는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합니다, 고 말할 수도 없었고, 오직 주님의 힘에 의지하여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행해서 예수님은 “내 양들을 돌보아라.”(21,16)라는 말씀을 통해 힘을 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만나서 대화하신 것은 주님의 부활 이후의 일이며, 부활의 빛이 있는 동안 베드로는 착한 목자이신 스승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고 보살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21,18)라고 베드로 역시도 당신과 같은 운명과 똑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되리라고 알려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시몬」이라는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의 시를 인용하려고 합니다. 조용한 마음으로 들어보도록 합시다.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한 발자국 내딛는 일마저 겁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한 번도 당신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제가 낯선 이들에게 품삵을 받으며 일할 때 당신은 제게 당신께 와서 일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사람이시며 인자이신 당신은 저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낯선 이들에게서 품삵을 받을 때 당신께서는 제게 당신께 와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일을 저질렀으나 당신께서는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악한 일을 저질렀으나 당신께서는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감사드릴 줄 모르면 당신은 감사를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그저 넘치는 은혜를 제게 주시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감사드릴 줄 모르면 당신은 감사를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묻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도 아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누가 당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묻지 마십시오! 무릎을 꿇고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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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아름다운 사랑
강만연 [fisherpeter] 250503. 22:05 ㅣNo.181945
느낌 감정 이런 건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느끼고 생각하는 게 같을까요? 다를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실험을 할 수 없어서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어떤 추론을 합리적인 시각으로 해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지만 사람에게서는 어느 정도 기술과 장비로 실험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건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고 정확한 데이터로 분석할 수 있어서 정확한 팩트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실험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명확하게 어떤 수치를 분석하면 알 수 있는데 남성은 그게 좀 부족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것도 세 번입니다. 한국어로는 같은 의미의 사랑이지만 원어로는 다 다른 의미의 사랑입니다.
10년 전쯤에 보좌 신부님이 강론하셔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세 가지 내용은 각각 기억하는데 그 순서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마지막에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못 믿어서 세 차례나 확인을 하시는지에 대한 섭섭함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 못 했던 것입니다. 각각 다른 의미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랑의 뜻을 가지고 그 뜻을 다 똑같이 적용해 해석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일한 감정 하나로 추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랑이라는 정신적인 감정은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합니다. 이때의 남자는 이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딸로서 아빠를 부모로서 사랑할 때 이때 생물학적으로는 아빠라 남자에게 하는 사랑 같은 감정을 줄 수는 없는데 아빠이긴 하지만 그걸 배제하고 순수하게 딸의 입장이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것도 신분, 위치, 환경 등등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 다 다른 느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람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인체 내 호르몬에 의해서도 그 느낌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처럼 그런 사랑이든 인간적인 사랑이든 사랑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근데 그 사랑은 오래가야 합니다. 사랑의 유통기간이 오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 몸에서 자기만의 고유 사랑 호르몬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제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개념입니다. 이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이 있고 적게 분비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그 사람의 신체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도 그럴 수 있지만 실제 연구를 해보면 이것도 하나의 훈련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호르몬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훈련을 하면 그 훈련에 의해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사실입니다.
제가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지만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요 이제 잠시 복음이나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와서 말씀드리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이것도 그냥 하라고 하시니 하면 되는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씀은 맞지만 우리가 그게 실천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훈련이 부족돼 그런 감정의 호르몬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많이 있게 되면 잘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사랑의 호르몬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리 자선을 많이 베풀어라고 해도 자기가 가진 게 없으면 자선을 베풀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도 그런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랑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요?
그건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절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은 실제 문자적인 뜻으로는 복음에 나타나지 않지만 실제 복음 안에 녹아 있는 뜻은 있습니다. 바로 희생이 녹아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조건은 모든 사랑에 다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또 다른 의미가 희생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하는 프로에 나올 만한 사랑 하나를 언급하겠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곳에 나오지도 않은 사례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다가 우연히 신부가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원인 불명의 병으로 반신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되는 처지의 몸이 됐습니다. 긴 사연 상세하게 전할 수 없고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결혼식만 올린 그런 부인을 근 25년 세월을 간호했다고 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제가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사고가 난 후 26년 정도됐을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차 신경이 서서히 회복되어 갔고 또 의식도 거의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이런 걸 사랑이라고 만약 한다면 과연 어떤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야 이런 숭고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남자가 결혼 전에 얼마나 사랑을 해서 그런 사랑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일반적인 연애를 해서 결혼한 게 아니고 소개로 만나 인연이 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지 하고 생각해보면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사랑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하느님처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적인 사랑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남자가 그 세월을 그런 상태의 아내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때 자신의 그런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그 여자분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고 그래서 그 현실을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아니라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고 난 후 5년이 지났을 때 처가댁에서 새출발하라고도 했는데 그걸 물리치고 했다는 사실도 한 인간으로서도 존경하고 싶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 남자는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항상 쉽게 사랑이라는 말을 하긴 하지만 진정 이런 걸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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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에 답해야 할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50503. 18:21 ㅣNo.181944
언젠가 한 정치인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많이 알려졌기는 하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이 있으시겠죠?” 이에 수녀님의 답이다.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게 아닌,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이죠.” 사랑이 밥이라면 법은 그릇에 비유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법과 사랑이 함께’할 때에 그릇에 담긴 밥처럼 진정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런 문답은 세 번이나 이어졌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제가 스승님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께서는 명명백백 알고도 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원하는 곳을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은 왜 세 번이나 같은 물음을 반복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시어 대사제에게 신문받는 동안 내내 믿었던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무려 세 번이나 부인하였기에. 비록 배반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의 죄를 따지시기보다 사랑을 드러내신 것이리라. 아니면 그에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양 떼를 안을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확실히 주문하시려는 것일 게다. 베드로의 그 고백이 너무 중요하므로 거듭 물으신 것일 수도. 사실 양 떼를 돌보는 기술이나 양에 대한 지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양 떼의 참 주인이신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관건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만 사랑한다면 충분히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볼 것으로 여기셨으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agape)적인 물음에 친구 사랑 수준의 ‘필로스’(philos)로 답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수위권을 받았다. 하늘나라의 질서와 규율을 지키려는 사명은 그에게 집중된다. 법 준수가 없는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기에 애덕을 실천하지 못한다. 반면 사랑이 없는 법은 형식에만 흘러 사람을 질식시킬 것이다.
오늘날 법의 정신은 사랑을 외면한 채, 그저 법 자체에만 매달리는 꼴도 가끔은 보인다. 우리는 법질서 체계를 유지한다면서 사랑을 외면해서는 안 되고, 사랑을 찾는다고 법의 기본 정신을 무시해서는 안 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곧 베드로가 이해하는 사랑의 수준에다 눈높이를 맞추시면서 끝내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셨다. 그만큼 그를 신뢰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여하신 이런 사랑의 사명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게다. 어쩜 교회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나누며 내적으로 성장할 때, 외적인 필로스적인 사랑도 성숙될 게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이 사랑 실천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 보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의 임무를 주셨는지를 늘 성찰하자. 지금 이 시각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여전히 되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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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저마다의 특성에 따른 맞춤식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그가 말한 대로 그의 손가락과 손을 당신의 꿰찔린 상처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20,25-27 참조).
그런 예수님께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하고 대답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도 맞춤형으로 다가가십니다.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고 자신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그러자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5) 하고 대답합니다. 다른 이보다 더 사랑한다고 장담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그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번의 질문으로 세 번 배반한 베드로를 고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사명을 맡기시는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치유와 화해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사명이 맡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함께 바라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세 번의 문답을 통한 치유와 화해의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잘 돌보라고 베드로에게 거듭 당부하십니다. 많이 사랑받았으니 더 많이 사랑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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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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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앞 부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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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손수 따뜻한 아침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습니다.
제발 그냥 좀 지나가 주면 좋겠는데, 물어봅니다.
“뭐 좀 잡히나요?” 어떤 분은 더 사람을 난감하게 만듭니다.
잡은 고기를 가둬놓은 망까지 꺼내 쳐다봅니다.
큰 놈으로 몇 마리 건진 날은 어깨가 으쓱하지만,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못 건진 날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 보면 은근히 화까지 납니다.
제자들 심정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밤새 티베리아스 호수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단 한 마리 못 잡았습니다.
말을 건넬 힘도 없어 다들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 손나팔을 모아 외칩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 심기는 더 불편해졌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억누르며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포인트를 딱 잡아주시면서 조언을 건네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제자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누굴 놀리나? 우리는 이 바닥에서만 경력이 30년인 전문직 어부들이야!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있어 정말!’ 그러나 포스와 위엄이 잔뜩 느껴지는 그분의 말씀에 압도된 제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짓말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터져나갈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눈치 빠른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알아차리고 수제자 베드로에게 보고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던지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힌 물고기를 몇 마리 갖고 오라고 하시고는 손수 숯불을 피우셔서 노릇노릇 맛있게 굽고, 빵도 꺼내놓고서는 크게 외치십니다.
“와서 아침을 들라.”
세상 자상하고 따뜻한 스승님의 초대 앞에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입니다.
참담한 실패의 밤을 보낸 허기진 제자들 앞에 손수 빵과 물고기를 대령하시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새벽 티베리아스 호숫가 제자들의 마음은 착찹함 그 자체였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은 삶의 의미요 기둥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나을까 싶어, 야간조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매운탕이라도 끓여놓고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날따라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뭘 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큰 상심에 빠져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스승님의 부재 상태에서 임재 상태로 상황이 전환되자 우울했던 제자단 분위기는 급반전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손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실패의 밤을 지새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다정한 위로의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고수해온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택하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판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헛된 망상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새로운 그물을 펼칠 때 놀라운 사랑의 기적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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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진실과 증거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 증언은 이미 분노와 미움을 초래하였었다. 회개를 위하여 외치는 진실의 소리가 다른 이에게는 미움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21,1-19: 너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만나 고기잡이 기적을 이루는 장면(요한 21,1-14)과 그리스도의 모든 양떼에 관한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장면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고 보고하고 있다(요한 21,1.14). 그리고 고기잡이 기적이든, 수위권 부여든 모두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고기잡이는 교회론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밤새도록 애썼으나 헛수고만 하여 포기한 제자들(3절)과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풍성한 고기잡이를 이룬 것(7절), 153마리의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11절), 고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11절)이다.
고기잡이 기적은 선교사명을 암시한다(루가 5,1-11참조). 그 유사점을 보면, 어부들이 밤새껏 한 수고는 수포로 돌아간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상황이 바뀐다. 그물을 가득히 채운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만이 사도적 활동의 결실을 이룬다. 오늘의 고기잡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없이 하는 공동체의 노력(헛수고)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의 노력(풍성한 결실)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는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만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는 ‘신비스러운 완성’을 뜻하는 숫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현존’하심으로 결실이 비롯된다. 비록 베드로가 고기잡이를 조직하는 임무가 있지만(3절) 그들의 성공은 그리스도의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이렇게 제자들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에서는 베드로의 사목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고기잡이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어린양들과 양떼들을 돌볼 직무를 맡기시고(15-17절)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으로서 교회의 구원의 모든 활동에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신다. 베드로가 갖는 권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권위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파스카 선물’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봉사직은 사랑의 능력에서 비롯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사랑 안에 성장하게 되어있다.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세 번이나 배반을 했기 때문에 물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사목직과 봉사직은 더 큰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16.17절)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목직을 부여하시면서 그의 순교에 대해서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절)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19절).
베드로의 봉사직 사목직과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자기의 뜻을 중요시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데서 완전한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W. Marxen). 베드로의 직무와 다른 모든 직무는 오직 예수께서 하신 바와 같이 먼저 고통과 십자가상의 죽음의 직무가 되어야 부활의 직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직무가 되리라는 것이다.
제2독서: 묵시 5,11-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
묵시록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상징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만물이 경배를 드리는 천상전례를 묘사하고 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12절). 이 어린양은 흠숭을 받으시는 분으로 하느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13절). 그러므로 오늘도 영원한 파스카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신분을 취하심으로써’ ‘주님’이 되신다(필립 2,7-11참조).바로 이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길이다.
제1독서: 사도 5,2732.40-41: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통하여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들과 같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개에로 초대하며 예수님의 부활의 진실을 전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29절)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 길이 영광의 길일지, 시련의 길일지 모르나 아마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모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우리도 진리를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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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사랑하면 좋은 것, 두 가지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많은 물고기를 잡고는 그분을 보러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자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당신 양 떼를 잘 치라는 사명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무엇이 좋을까요?
두 가지 큰 이유를 말해보려 합니다.
2003년 4월 26일, 등산가 ‘아론 랠스턴’은 유타 블루존 캐니언 좁은 틈에서 360kg 바위에
오른팔이 눌린 채 127시간을 버텼습니다.
물 350mL와 무딘 멀티 칼뿐인 그는 탈수, 저체온, 환각에 시달리며 헬멧 카메라로 “엄마, 아버지, 사랑해요.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게 내버려 두셔서
고마웠어요.”라며 유언도 남깁니다.
환각 속에서 그는 장차 태어날 아들을 한쪽 팔로 안고 뛰노는 미래를 보았고, 그 비전이 “살아 돌아가 가족을 다시 껴안겠다.”라는 결단을 품게 합니다.
다섯째 새벽, 바위를 지렛대 삼아 팔뼈 두 개를 부러뜨린 뒤, 힘줄과 신경을 무딘 칼로 끊어냈고
20m 절벽을 외팔로 하강하여 10km를 걸어 우연히 만난 관광객 가족에게 구조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자 그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이 저를 ‘팔을 자른 남자’로 여기세요.
그런데 웃으면서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모르실 겁니다.”
사랑은 웃으며 나에게 필요한 중요한 것을 자르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세상 집착 때문에 자르지 못하는 것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론 랠스턴은 자기 팔을 자르고는 기뻐서 “내가 팔을 잘랐다!”라고 연신 외쳤습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도 여자와 헤어지고는 “자유다!”라고 말하던 남자 주인공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나를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사라지면 그만한 자유도 없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위해 달려오는
여자 친구를 보고는 배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세상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집착으로부터 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기쁘게 자기 팔까지 자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좋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나의 양 떼가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양 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맡겨지는 것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자기 꿈까지 포기하게 만든 여자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자녀들 때문에 물론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목숨을 바칠 사랑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돌아가시기 직전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내가 이 세상에서 돌보아야 할 양 떼가 없고 그래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됩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가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나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살 의미도 없어지고 무기력증의 고통으로 자살까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살고 싶어지고 열심히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양 떼는 나의 집착이 되지 않지만, 동시에 내가 목숨을 바칠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 유일하게 찾아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고 말하며 죽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만을 사랑해야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은 갈등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친구를 사귈 것인지, 수백 년 동안 집착해 온 반지를 훔칠 것인지.
그는 결국 반지를 선택하여 외로운 죽음을 맞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호빗들을 사랑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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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3-6).”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3).”
1)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그물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사도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어부들’입니다(마태 4,19).
<사도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바다에서 구해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주님의 일꾼’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인 어부들을 부르실 때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루카 5,4-6).
그래서 요한복음에 있는 ‘고기잡이 기적’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부르심’을, 또는 ‘부르심을 재확인해 주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3) 루카복음에서는,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은, 먹고사는 것이나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하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바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또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성령을) 받기도 전에
성급하게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한 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없이, 또 성령의 도우심도 없이, 자기들만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했다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4) 복음서에 사도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일하려고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어떤 아이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다가 실패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마르 9,18).
그때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9,28-29).
사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아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힘’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도는 사도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늘 기도하면서 주님의 힘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5) 루카복음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라는 말씀과 요한복음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6).” 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깊은 데’와 ‘배 오른쪽’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걸어가는 길,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그 길과 삶은 허무에서 벗어나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길과 삶이고, 자기 자신도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길과 삶입니다.
6) 사도들이 잡은 물고기 숫자 ‘153’은 충만함, 보편성, 완전함 등을 상징합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이 숫자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그보다 더 큰 일’은 ‘더 위대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할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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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21,1-19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남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조용하고 무뚝뚝한 성격에, 같이 어울려보라고 불러도 반응이 영 시큰둥했습니다. 청년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소극적이었고,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나면 뒷풀이에 함께 하는 날보다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더 많았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청년의 모습이 놀라울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되는게 보였습니다. 뒷풀이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었고, 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살뜰하게 챙겼지요. 갑자기 그렇게 바뀐 게 참 신기해서 그 청년을 따로불러 조용히 그 계기를 물어보았더니, 그 청년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청년회 안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그 청년의 행동을, 더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호감을 갖게 된 사람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전까지 머물러있던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이 지닌 힘이겠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제대로 하여 구원받으려면 사람에 대한 사랑에만 머물러있을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갈릴래아로 이동하여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거기서 뭘 해야 할지를 깨닫지 못해 무료한 시간을 보냈지요. 멍하니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거기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시절이 생각났고, 오랜만에 실력발휘 좀 해볼 심산으로 고깃배에 오릅니다. 그런데 다시 배를 타고 그물을 잡은 그들의 행동은 그저 시간이 남는 김에 해보는 ‘잠깐의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하는데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고, 그분께서 당장 자기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같지도 않으니,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겁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변화되는게 이만큼이나 힘들지요. 사탄이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을 자꾸 걸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고 고된 광야생활에 지쳐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때가 좋았다’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던 것처럼, ‘차라리 예수님을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채로 속 편하게 살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게 하여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무지와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무르며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 취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죄악이 주는 달콤함은 마치 마약과도 같습니다. 당장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이익을 주는 것 같지만, 그것에 빠져 있으면 불신과 절망이라는 좀벌레가 우리 영혼을 갉아먹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안일하고 나태한 마음을 먹은 제자들로하여금 처절한 실패를 경험하게 만드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기잡이라면 자신 있었는데,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면 예수님 없이도 자기 혼자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자들은 밤새도록 애를 썼음에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쓰라린 실패 체험을 통해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 없이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 없이 부족하고 약한 존재임을… 그렇게 그들의 마음이 한껏 겸허해져 있을 때 주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힘이 빠지기 전에, 그들이 자기 고집과 뜻을 내려놓기 전에 그런 명령을 하셨다면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실패와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자기들에게 그런 명령을 하는 이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것을 즉시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명의 결과 놀라운 기적을 목격하게 되었지요. 그들이 주목해야 할 기적은 갑자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결과’가 아닙니다.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된 것이 진짜 기적인 겁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순명하여 그분의 모습을 한 두 번 알아보는 정도로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에 한 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변화되려면 주님 말씀에 순명하고 따르는 실천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이 조금 이상합니다. 대답하는 사람인 ‘나’를 중심으로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대답을 들으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에 대한 철저한 성찰에서 비롯된 답변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정작 주님께 위험과 고난이 닥치자 자신도 피해를 입게될까 두려워 세 번이나 주님을 배신했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던 겁니다. 그 ‘배신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시고 철저히 그분 뜻에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깨달음과 결심이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는 답변 안에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사랑을 너무 ‘머리’로만 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노력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지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크기나 정도를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불이익을 당해도, 고통과 시련을 겪고 더 나아가 죽임을 당해도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지 그 ‘의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신 뒤에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께서 미리 닦아놓으신 “꽃길”을 걸으며 좋은 것만 누리는 게 아닙니다. 참된 사랑을 한다고 해서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요. 때로는 짜증나고 상처받으며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무겁게 나를 짓눌러 힘겨울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과 고통보다 참된 사랑이 주는 기쁨과 행복이 훨씬 크기에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걸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랑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이성과 논리로 재고 따지는 일은 그만해야겠습니다. 그런 건 주님 뒤를 따르는 이 길을 더 힘들고 지치게 만들 뿐이니까요. 대신, 주님 말씀에 순명하여 그분 사랑 안에 깊이 머무름으로써 그 사랑의 힘으로 매일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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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나를 사랑하느냐?”
사도 베드로는 잡히신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요한 18,12-27).
그리고 부활 후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
백합니다(요한 21,15-17).
부활 후에 주님께서는 다시 갈릴리로 가셔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얼핏 보기에는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불림을 받기 전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허전함과 실망을 달래려고 다시 옛 시절처럼
고기잡이를 나가 보았지만 옛 실력은 어디로 가고 밤새도록 헛 그물질만합니다.
호숫가에 이 모습을 보시던 주님께서 그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치라고 이르십니다.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많은 고기가 잡고 뭍으로 향하다가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아챕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무 반가워 벗고 있던 옷을 차려입고 배에서 뛰어내려 뭍으로 향합니다.
주님께서 숯불도 피워놓고 물고기 몇 마리도 굽고 계시며 잡은 생선을 더 가져오라고
이르십니다.
정다운 정경이 펼쳐지고 식사가 끝난 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따로 불러 당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십니다. 두 번까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세 번째에는 너무 슬픈 마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세 번의 질문과 대답 끝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세 번의 질문과 베드로의 사랑고백은 세 번의 배반과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의인보다 넘어지고 부족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66대의 우리교황님께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시고 지난
한 달은 교황님의 퇴위, 콘클라베를 통한 선거, 그리고 새 교황님의 즉위 등으로
세계의 이목이 쏠렸었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이 현재에도 변함없으심을
보여주시는 증거입니다.
요셉 형제님은 아무래도 자기 부인이 병이 났는가보라고 걱정입니다. 그 전에는 안 그랬는데,
문득 ‘여보 나 이뻐?’ 또 ‘당신 나 사랑하기나 하는거야?’ ‘당신 나와 결혼한 것 후회 안해?’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다 커서 결혼했고 늙어 가는 주제에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그러면 요셉 형제님은 뭐라고 대꾸해요?
‘당신 미쳤어?’ ‘어디 아파’ ‘병원에 가야되는 것 아니야?’라고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에 살면서 ‘아이 러브 유’라는 말을 많이 들어도 막상 부부 지간에
‘여보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지금도 자연스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엠이에서는 사랑을 표현하라고 가르치지만 우리의 정서에는 대놓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 만나 교재를 하며 연애의 꿈 같은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또 생활 전선에서는 그 시절이 추억일 뿐 부부가 서로 시들해
질 때도 있고 서로의 입장 때문에 마음 상하고 또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연애시절에 가졌던 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지만 서로 바라보면서
부부의 사랑을 깨닫고 확인하기까지 합니다. 사랑은 일회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러면서 자신의 세계 분 아니라 배우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활기를 되찾게
해 줄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신뢰와 대화를 통해 위기의 순간을 넘길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시로 하느님 사랑에 변덕과 변화로 대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백성은 배반과 배반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스승을
배반했지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사랑하십니다.
배반과 실망으로 얼룩졌던 사도들, 특히 사도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께 대한 사도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 부활의 시간에 우리는 주님 사랑을 더욱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어둠의 세력이 있다 해도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가 끊임없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수시로 변한다하더라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진실하고 성실한 사랑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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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펴주시는 주님♣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침이 될 무렵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해주시고, 손수 아침을 준비하시어 같이 식사하시며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그분을 알아봅니다(21,7).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일곱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돌아가시자 두려움과 좌절에 빠진 나머지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예전의 일터로 돌아와 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음을 넘어서는 빛을 보지 못한 채 밤의 어둠 속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숯불 사랑’으로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을 절망과 당혹감, 좌절감과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끈 빛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겪었던 이 과정은 내 안에서도 되풀이되곤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사회적 불의 앞에 무기력함을 느낄 때,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 쉽게 내가 원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곤 하지요.
참으로 그런 어둠의 순간이야말로 더 깊이 주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사랑이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오시어 내 일상의 그물이 터지도록 풍요롭게 해주시고, 생명을 시작하는 아침밥을 차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이 피곤하고 고달플 때일수록 내가 만든 동굴이 아니라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할 때입니다. 제
자들이 아침을 먹은 뒤 예수님께서는 으뜸 사도인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21,15)고 묻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양들을 쳐야 할' 으뜸 사도로서 지닌 막중한 사랑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거듭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21,17) 하고 대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난 뒤 세 차례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신했었지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쓰라린 아픔이 다시 떠올랐을 것이고 죄책감과 수치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시면서도 거듭 사랑을 확인하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 양들을 치며, 교회의 반석이 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을 통해 베드로 스스로 자신 안에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정화된 사랑을 지니길 바라셨을 것입니다. 거듭 되는 질문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매순간 나의 어둠과 절망, 실패와 고통, 죽음의 상황, 죄책감과 수치심의 한복판으로 다가오시어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나의 고통과 시련,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를 올려 희망을 숨쉬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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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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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04. 부활 제3주일.
고난 가운데서 말씀을 지키는 삶
<2025.5.4>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19:49~64절)
❝고난 가운데서 말씀을 지키는 삶❞
❚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지킴으로 진리와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 말씀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49~52절).
시인은 하나님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49절)하면서 옛 규례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52a절)합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 말씀이 당장 이뤄지지 않고, 자신이 여전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소망을 얻고, 고난 중에 위로를 얻으며,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다시 살리셨던 일들을 경험하였다(49b, 50절)고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말씀을 계속 기억하며 그에 힘입어 스스로가 위로를 얻는다(52절)고 고백합니다.
고난의 과정이 길어지고,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약속을 잊으신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과도 같은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갖도록 하는 위로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위로의 능력을 의지하면 어떠한 위기와 환난도 넉넉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지켜내며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53~56절).
시인은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53절).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법도를 노래하며 그런 마음을 달랩니다. 비록 시인은 나그네와 같고(54절) 어두운 밤과도 같은(55절) 현실을 살고 있지만, 주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이 자신에게 축복이 된다(56절,쉬운성경)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삶에 대하여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이뤄 주실 것을 믿기에, 그 어떤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과 세상의 것들을 소유로 삼지만 그것들은 이 땅에서 잠시 동안만 존재하는 것일 뿐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여 지키는 것은 천국에 보화를 쌓아 두는 것과 같아서 영원한 소유가 되며, 영원한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썩을 것에 집착하여 영원한 소유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영원한 소유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땅의 어떠한 것도 포기하는 지혜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잡으면 아무리 세상이 조롱해도 담대하게, 당당하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냄으로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더욱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늘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분깃이 되기 때문입니다(57~64절).
시인은 여호와가 자신의 분깃이므로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고 고백합니다(57절). ‘분깃’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후에 할당받은 땅을 의미하는데, 궁극적으로 그 분깃은 세상의 땅이 아니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약속의 땅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영원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오직 주의 말씀을 지키고(57b,60절), 주님께 간구한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58절). 이 땅에서 시인이 경험하는 현실은 마치 ‘악인들의 줄’이 두루 얽힌(61절) 상황과도 같고 캄캄한 ‘밤중’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62절)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주님의 법을 잊지 않고, 그 규례들이 감사하다고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의 친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63절). 나아가 자신에게 주의 ‘율례’를 가르쳐 달라고 간구(64절)합니다. 이 간구의 근거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부를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의뜻을 구하므로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여호와가 자신의 기업이시므로 여호와만을 바라겠다(애 3:24)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아야 합니다. 즉, 무엇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말고 즉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삶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기업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어떤 고난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지켜 행함으로 천국 백성답게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며 영원한 소유와 분깃으로 삼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19:49~6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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