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있어 세계적인 추세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증가 현상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살률의 증가입니다. 때문에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잘 사는 나라든지 못사는 나라든지 그 요인과 방책을 강구하며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높아지는 자살률은 이 시대의 뭔가를 암시하듯이 돌림병처럼 걷잡을 수 없게 곳곳에서 예측 없이 생겨지고 확산되어 감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중에도 인간학이나 사람의 심리 정신 등을 연구하는 자들이 자살의 요인을 나름대로 언급하고 있는데 보면 “현대인들의 극단적 도피현상” “시대적으로 현실적으로 복잡해지고 요구되는 것이 많은 것으로 인한 스트레스적 병리현상으로” ,“경제적 침체나 그것으로 오는 압박의 돌출구로”, “점점 나약해져 가는 인간들의 정신적 증상”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고들 있지만 확실치 못한 것을 느낍니다. 자살은 어떤 특정적인 계층이나 그런 상황의 현장에서만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도, 부자도, 사회적 지도층의 사람도 주변으로부터 각광 받으며 세상적 영광을 누리는 자리의 스타나 명성을 가진 인물도 예외가 아닌 것을 보면서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얼마 전만 해도 지상천국이라 할 만큼 부유한 덴마크나 스웨덴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1,2위 였습니다. 요즘은 불행하게도 우리나라가 OECD회원 국가 중에 자살률이 1위라고 하는 통계에 올라 있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증거라도 하듯이 얼마 전에는 전직 통치자의 자살로 국내외가 요란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허탄함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자살은 그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것인지 자살을 하고 싶은 동호회도 있고 종종 끼리끼리 모여 집단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자살예찬론자도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살을 보면서 그럴 용기로 더욱 힘써 살아보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살 용기와 의지를 잃고 죽을 용기를 택하는 자들이 이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또 누가 자살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살은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고 허망한 것인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아픔의 실상인 것입니다.
(죄아래 있는 인생의 형벌적 현상)
정신 의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실제로 느낀 것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자살의 충동을 여러번 가져 본다는 것이 진실인 것은 인간 모두는 죄아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본성으로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것 중에 하나로 살인을 말씀했습니다.(마15:19) 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고 자신을 죽이는 것도 살인입니다. 이 살인은 악한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죄의 형벌로서 자행하는 어둡고 불행한 인생의 굴레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살은 죽음에 이르는 또 하나의 죄의 형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 납득하기 어려운 큰 문제는 세상 사람들처럼 교인들이 자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드문 얘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 교인들이 많아서인지 자살하는 교인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초보자들이라 믿음이 없는 자들이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많이 한 집사도 하고 권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목사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기독 연예인들이 줄줄이 자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그들이 매우 독실한 기독 신자들이었다고 했습니다. 교계에서는 그 심각성을 감지했는지 이름 있는 지도자와 기독연예인들과 한국 교회 희망연대, 한국교회 실업인, 한국대학생 선교회, 한국기독문화 예술연대들이 함께 모여 자살 방지대책 성명서를 내며 생명존중 문화가 확산되기를 위해 기도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자살은 그렇게 해서 막아지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죽음에 이르는 또 하나의 죄의 권세요 형벌이기 때문에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의 우상이 되고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인기 있는 영광의 스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기 연예인이라는 뒤안길이 얼마나 힘들고 허무한 것인가를 자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오눌날 대부분의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그런 스타를 꿈꾸고 있다는 것과 엄마들이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우리를 암울하게 합니다. 자살한 기독연예인들이 신앙이 독실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는 올바른 기독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5:4에 분명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러니까 교인이 자살했다면 그 자는 죽음의 유혹과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믿음 없는 불신자와 같은 자요 아니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육신에 속해있는 죽은 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살한 자가 몇 명 나오는데 구약에서 4명 신약에서1명입니다. 먼저 나오는 자가 사울왕이고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병기든 부하인데 블레셋 군대에 의해 패전하여 중상을 입고 도망 가다가 자기 칼로 사울 왕이 자결해 죽자 부하도 똑같이 따라 자결합니다. (삼상31:3-5) 그리고 또 보면 본래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모반을 일으킨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편에 서서 주관하다가 후새의 모략에 의해 자기의 모략이 실행되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매어 자살합니다.(삼하17:23) 그리고 또 있는데 북왕국 엘라왕때 장관이었던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되자 역시 군대 장관이었던 오므리(아합왕의 아버지)가 회군하며 시므리를 치자 궁이 함락되는 위급함을 보고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렇게 자살합니다. 그리고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 입니다. 그는 예수를 팔고 받았던 은30을 교권주의자들에게 도로 갖다 주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합니다.(마27:3-5) 우리는 대조적이 되는 사울왕의 자살과 가룟유다의 자살을 비교하여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자살은 비참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목매달았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고 했습니다.(행1:18) 가룟 유다는 제곳으로 갔다고 했는데(행1:25) 그는 예수님의 12제자에 속해 있었으나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다 깨끗하나 예수를 팔자는 깨끗지 아니하다고 하셨고(요13:10-11) 그는 마귀라 하셨습니다(요6:70) 그러니까 유다는 구원을 입을 수 없는 뱀의 후손된 자요 가라지 같은 악한자로 곡식가운데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가는 자라했습니다.(요12:6) 그가 스스로 뉘우치고 목매어 죽었다고 햇는데(마27:4-5) 그것은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심정적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살을 하게 되는 자는 매우 심하고 강한 자극이나 타격을 입었거나 내외적인 괴로운 심정에 스스로 휩싸여 가면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뱀의 후손으로 영원한 형벌의 길을 가는 자로서 인생의 마지막을 자신을 죽이는 살인으로 마감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녔다 하는 자들이 자살을 했을 경우를 살펴 볼 때 두 부류로 볼 수 있는데 그 하나가 가룟 유다 같이 예수님 주변에는 있었으나 (즉 교회는 다녔으나) 구원받지 못한 자로서 죄의 본성인 육체의 소욕대로 자신을 비참하게 죽이고 세상 사람들처럼 제길로 가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울왕 같은 경우인데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겸손했다가 점점 조급함과 인간적 판단의 실수의 거듭으로 하나님께 망령되이 행하면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왕직을 버림받게 됩니다. (삼상15:22-23) 점점 그는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면서 악한 모습을 점점 나타냅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지 않고 무당을 찾아가지만 전쟁은 패하고 활을 맞아 중상을 입어 군급한 가운데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모욕을 받을까 하여 자기 부하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스스로 자기 칼에 엎드려 자결합니다. 사울의 자살에 대해서 역대기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대상10:13-14)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며 슬픈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쳤는데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스라엘아 너희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찌어다“고 했습니다.(삼하1:17-27) 사울왕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예입니다. 그의 자살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 가신 것인데 그가 하나님 백성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따라 구원을 이루어 가지 못하는 자로서 징벌 받은 부끄러운 삶의 실재의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자살을 놓고 신학자들이나 신앙의 사람들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구원은 어떠한 행동이전에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미 선택되어진 것이요 때문에 살면서 그 어떤 행위도 구원의 조건이나 무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이루어 가는 거룩한 모습과 삶은 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며 일시적이나마 하나님의 징계 차원에서의 형벌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증거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담전5:6)고 했던 것과 사데 교회를 향해 사도요한을 통해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계3:1) 며 성도이나 그들의 모습과 삶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과 같은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며 끝내는 무당까지 찾아간 사울왕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같이 행한 가증한 자를 판단하여 주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증거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순전한 새 덩어리를 지키기 위해 적고 악독한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누룩을 내어 버리는 것이라 했습니다.(고전5:1-8) 하나님은 사울을 이런 식으로 내어 버리신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타락과 범죄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끊어 버리시되 그에게는 육신적으로 수치스럽고 비참한 형벌이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없는 교회가 그렇다!)
현대교회들에서 점점 자살하는 자들이 많아지는 요인은 구원과 먼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이 자기 욕망적 기대를 따라 많이 모여 있다는 단면적 증거요 또 하나는 교회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거룩한 주의 교회된 모습은 없고 자기 유익들만 구하는 잘못된 종교교회들로 서 가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교회된 택자를 부르는 바른 교회들은 드물고 다른복음으로 아무나 많이 모으려 경쟁함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알 수 없는 자들이 교인이라고는 하면서도 생명의 주권을 무시하는 극단의 행동들이 많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도.요즘의 교회들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일제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할복자살한 이준 열사를 순국자로 그의 나라 사랑과 신앙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며 헤이그에 9억을 들여 천주교 예배당을 매입하여 이준 기념교회로 봉헌하고 계속적으로 추모예배 할 수 있게 했고 지난 이준열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기독교 감리교에서는 70여명의 청년들이 이준열사의 나라사랑 신앙정신을 뒤따라 서울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헤이그까지 이르는 17일간의 순례행사를 할 정도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할복 자살할 정도의 열사라 한다지만 교회들이 자살한 의지를 은근히 인정 추대하고 따르자는 경우이니 할말이 없습니다.
죄인된 인생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와 그대로 가는 헛된 것이요 그 삶의 일평생은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 했습니다.(전5:15-17) 바로 여기에 있는 허무함과 괴로움의 번뇌와 분노가 절망과 자살을 가져오며 누구나 이런 인생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복음의 능력만이 분노와 번뇌와 절망과 사망에 이르는 비참한 삶의 형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는 죄와 그 형벌의 비참한 삶에서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그 어떤 극적인 상태에서도 산소망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들에는 비천한데도 처할 수 있고 반대로 욕망적인 형편에서도 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깨닫는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세상도 이길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가지는 복음에 합당한 신앙이 안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그저 크게 성장하려고만 하고 그래서 목회자들은 성공하고 교인들은 하나님을 통해 세상을 기대하고 각자 유익을 얻기에만 열심 하는 교회들로 서가는 것임으로 가룟유다 같은 사람들도 많이 불려 들여져 있고 그나마 어떻게 들어 있는 하나님 백성된 자들도 구원을 살게 못하고 죽은 자의 모습과 삶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회에는 자살하는 자가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만이 형벌과 형벌의 삶에서 구원을 얻고 구원을 살아가게 됨을 가르치고 증거 하는 교회에 만이 형벌을 벗어나는 진실이 있고 산 소망이 있습니다.
하박국 3:16~19절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고 한 말씀을 보면 모든게 끝장이 된 도저히 살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도 하니님 한분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구원을 사는 성도의 산 신앙인것입니다. 복음으로 거룩히 불러지고 복음으로 서가는 복음의 교회는 이렇게 천국을 사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