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을 걸으며
황 복 숙
서릿바람이 산굽이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산은 눈에 띄게 해쓱해 지려나 보다. 이제 가을도 한창이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내 귓속에서 울려 준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못해 손을 휘저어 보면 파란 청자물이 그적하게 묻어 나온다. 사람들은 가을을 가리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나는 수확의 계절이기 보다는 충실한 결실의 계절이기를 더욱 원한다.
가을 하늘의 높음을 오늘따라 더욱 더 실감을 자아내게 해 준다. 이렇게 높고 푸른 하늘 밑에서면 불현듯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문득 겨울코트를 꺼내 입고 아무런 부담없이 나설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하루쯤 하늘 끝까지 걷고 싶은 가을이리라,
윤보영 시인의 가을 시 모음을 낭송해 보고, 서글픈 음색을 울려주지 않아도 마지막 가을이 가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흔들리는 나무 잎 새의 흐느낌을 듣는다. 가을날 잃어버린 내 시간이 다시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무도 범치 못할 사랑이 어디쯤에 있을까,
찬란한 슬픔이 있기에 더 창백해 보이는 가을이다. 등산길 모악산에서 만났던 인상 깊은 사람도 아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 소년의 맑은 눈망울과 함께 나를 향해 의심 비슷한 질문을 잊을 수 없다. "신은 죽었다." -니이체- " 그 아래에 "니이체는 죽었다." -신 -이란 글귀
가을, 밤길을 걷는다. 연인들은 호주머니에 가득 군밤을 채워 가을을 엮어주는 가을이다. 오색과 함께 찬란히 늙어가는 가을! 가을에 생각하는 것들은 나의 생활을 거룩한 사념으로 이끌어 준다.
단풍잎과 함께 젖어드는 가을의 깊은 밤, 가을은 나에게서 잠을 빼앗아간다. 욕심을 버리게하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다. 어느 가수의 가을의 노래인 '가을의 연인' 을 다시 뇌까리지 않아도 가을의 음색은 그저 내 눈자위가 쓰린 붉게 젖으며 뺨이 야위어 오는 것을......!
김소월 시인의 시 '임과 벗' 이란 시,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 임은 사랑에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추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고추의 붉은 열매와 함께 나를 울게 웃게 하고, 사색하게 하고 약속 없이도 그리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단다. 그것은 분명 죽고 싶도록 찬란히 익어가는 가을 그것 일게다.
나를 살게 의욕을 심어주고, 나를 이곳에 있게하는 것은 가을의 청잣빛 하늘만큼이나 맑은 거울을 내게 보여 주어 흩으러진 매무새를 또 끈 끌러진 온동화를 묶게하고 잘못 잠궈진 단추를 , 내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 하여 주는 계절도 가을이다.
그 거울 같은 이 가을을 그저 동경한다. 가을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부질없는 반항으로 소요된 시간들 그 잃어버린 나와 내 시간들을 무엇으로 다시 채워줄 수 있을까, 귀뚜라미 울음에 마음 두고 아무데나 함부로 글씨를 쓴다. 커다란 거울에 비친 나를 찾아 다시 선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거울의 가르침,
다시 생각을 다듬어 본다. 가을, 가을과 함께 옷매무새를 고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리, 그래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처럼 이 가을을 찬란하고도 풍요한 인간이 되어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