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2
1월13일[연중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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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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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0S1RZiQE1U0000
[서울대교구 이철규 아우구스티노(주교좌명동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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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선구자 요한이 무대를 잘 꾸며놓고 구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일종의 바톤 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이 집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4-15)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 협조자인 초기 사도단을 부르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제자단을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이지 전격적이고 뜻밖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잘 배운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대사제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열심히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물을 손질하여 내리고 있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자신들을 눈여겨보시며, 이윽고 당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제자들의 성소 출발점을 묵상하니, 어찌 그리 제 성소 여정과 판박이인지 놀랄 지경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하루 온 종일 설계실에 앉아 도면을 바라보고, 도면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께서는 갑작스레 제 뒷덜미를 잡고 낚아채셨습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당시 저는 수도 생활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인데, 나같은 사람도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엄청났습니다.
사실 제 학창 시절 내내 생활 기록부에는 늘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습니다. ‘지극히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임.’ ‘남앞에 나서기를 힘들어하니 발표력을 키울 필요가 있음.’
어딜 가면 늘 구석 자리를 찾았고, 주변 사람들과 교류도 잘 하지 않고, 하루 온 종일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제 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부르시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저를 단련시키셨습니다.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저를 집어 넣으셔서 재창조하시고 당신 말씀의 봉사자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십니다.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완벽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저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성탄 사건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깊숙이 개입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구차스럽고 죄투성이인 우리 한명 한명의 인생 여정 안에도 분명히 육화강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깊은 상처 사이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따분하고 한심한 우리 각자의 하루 하루 그 안에 탄생하십니다. 때로 너무 스치스러워 얼굴을 들기조차 힘든 죄스럽고 남루한 우리 삶 속에 탄생하시고 현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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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4SxcII0d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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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가 체험한 ‘복음’(기쁜 소식)이 무엇이냐 물으면?>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예수님은 ‘복음’, 곧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좀처럼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뜻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각자가 설명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의 개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에 공통적인 해답이 이것일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을 따르면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이 ‘존재의 상승’이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각자가 체험했어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어렸을 때 저의 꿈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야 죽음이 두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처럼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야, 예쁜 여자 친구가 있어야, 남들보다 잘나야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런다고 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슈퍼맨을 꿈꿨습니다. 슈퍼맨은 이 지상의 어떤 고통도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 지상의 모든 고통을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별에서 와서 하늘을 날고 다치지도 않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슈퍼맨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이 날지를 못했습니다. 낮게 날다가 나무와 건물과 산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습도 했습니다. 세 발짝 뛴 다음에 손을 쭉 폈습니다. 논에서 연습하다가 배가 다 까졌습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구나!’ 혼자서 슈퍼맨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더 돈과 여자와 명예에 집착하였습니다. 마치 그것이 복음인 것처럼.
그러한 세상에서 복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애벌레는 애벌레들이 서로 경쟁하며 올라가는 높은 탑이 있었습니다. 그 탑의 꼭대기가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이라 여기는 것이었고 저도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나비는 꽃들에게 감히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꽃을 수정시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애벌레인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사제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면 되었습니다. 사제는 애벌레로 사는 삶이 아니라 나비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김경일 교수는 이들이 분명히 착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그들의 일상을 찍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은 다른 학생들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많은 친구에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저의 교수님도 “구체적으로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주지 못하면 그건 네가 모르는 거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가르쳐주면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명확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디팩 쵸프라’도 자녀들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너희는 남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다 책임질게.” 슈퍼맨은 경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을 낚는 높은 수준의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다 하이에나처럼 삽니다. 서로 경쟁하여 먹이를 먹으려 하거나 사자 앞에서는 꼬리를 감춥니다. 하이에나는 다치면 버려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이에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에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 그 사명에 응답하였고 그래서 모든 것을 쉽게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점점 더 행복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에겐 복음이었고 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사명으로 초대받았고, 그 초대가 우리를 슈퍼맨으로 만들어줍니다. 이 복음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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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입니다. 어느덧 42년이 지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 입구에는 교가를 돌에 새겨놓은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교가의 내용은 비장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진세(塵世)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베리타스(VERITAS)” 저의 사제 성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정의 분위기입니다. 5대를 이어오는 천주교 집안이기에 삶의 중심에는 늘 ‘성당’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안 갈 수 있어도, 주일 미사는 빠지면 엄하게 혼났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배워야 했고, 기도문을 다 외워야 했습니다. 부활과 성탄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성당에서 미사 참례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일학교 친구들입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저도 친구들과 함께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같은 본당 출신 3명이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의 길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 교가에 나오는 대로 진세를 버리고, 이 몸마저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치지는 않았지만, 큰 과오 없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하느님의 크신의미심장합니다
오늘의 본기도는 이렇습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저는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는 길은 나의 거짓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낡은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과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듯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장소의 개념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단의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3차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3차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버리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든 권한과 능력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첫 번째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가치 있고, 소중하며, 참된 행복을 주는 그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분명 빛이 나는 자리는 아니었고,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2025년의 1월도 많이 지났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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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곧 충만한 계시의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말씀과 일거수일투족, 그 행동과 삶을 통하여 왜 그분께서 구세주 하느님이신지,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 하느님 눈에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분의 제자요 아들딸인 우리는 진정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연중 시기는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와 그 신비를 차례차례 배워 가며 그분을 만나고 친밀해지는 시간이지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다른 모든 공적 활동에 앞섭니다. 공동체 형성이 하느님 나라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홀로’가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며,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합니다.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우리말 번역도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가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 잡는 어부’라고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잡는 것’과 ‘낚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낚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낚는다는 것은 낚시로 한 마리 또는 몇 마리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잡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더욱 친밀하고 인격적인 환대의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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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14-20: 첫 제자들을 부르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절) 하느님 나라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 활짝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 하신다. 그분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이루시려 그들을 부르신다.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가장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일꾼으로 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셨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다음, 그분은 그들 안에 하느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힘과 용기를 채워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이 가르치셨고, 그들을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을 쫓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거룩한 일꾼이며 교사로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셨고, 그들을 당신 가르침의 선포자라 선언하셨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절)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에 맞지 않는 것 즉 방해되는 것은 곧바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배를 버렸고(19-20절),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 가운데 어떤 핑계를 대는 사람은 없었다.
주님의 얼굴에는 거역하기 어려운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따라나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사도들이 했을까? 사도들은 영의 아버지를 따르고자 육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것은 아버지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되찾은 것이다. 그분의 얼굴에는 그분을 뵙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집착을 버려야 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배대오도 버리고 그들의 생계가 달린 배마저 버렸다.(20절) 마태오와 바오로 사도를 보더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 무엇에도 집착이나 애착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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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날마다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14-20)
1) “때가 차서”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를 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는 안 하려고 하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말씀이 ‘복음’(기쁜 소식)인 것은,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 사람들, 또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은 곧 ‘심판 경고’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만,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7.14)
2)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라는 말이 ‘신자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 가운데에서 따로 열두 명을 뽑아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루카 6,13) 그렇게 열두 명을 뽑아서 ‘사도단’이라는 조직을 만드신 것은, 사실은 당신의 ‘교회’를 만드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도 신앙인들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원 사업은 인간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스스로 노력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나의 나라’이기 때문에, 신앙인이 그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나를 따라오너라.”는 표현으로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인데, 신앙인이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는 말씀은, 나중에 사도로 뽑으실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는 지금까지는 먹고사는 일이나 신경 쓰면서 물고기를 잡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물속에 있는 사람을(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구원의 길로) 끌어낸다는(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낚는다.’는 말은 낚싯줄로 하나씩 잡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로 잡는 것과 낚싯줄로 잡는 것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4) 신앙인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입니다. 그 응답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내가 살기를 바라니까, 즉 나 자신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간절하게 희망하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것도 그 응답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다.”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할 때에 다음 말씀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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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나요? 잘 못들으신다구요? 왜 그럴까요?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아서 못들을 수도 있고 그분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못알아 들을 수도 있겠지요? 그분이 말씀 안 하실 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그분이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못 알아 듣는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그분은 옛적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대요.(히브리서 1,1) 그런데 이젠 당신 아드님을 통해서 주로 말씀하신다네요.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면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이겠지요. 물론 읽고 묵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으로써 응답해 드리기 위해서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성탄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마치는 우리에게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하느님 나라는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들어갈 꿈도 꾸기 어려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내 코앞에 와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방향만 잡아 뒤돌아보기만 하면 바로 거기 하늘나라의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회개란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고 세상을 향해 있던 나의 시선을 하느님 나라로 돌리는 일입니다.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내가 향하는 방향은 어디인지 잘 살펴봅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지 세상을 향하는지, 사랑과 생명을 향하는지 미움과 죽음을 향하는지, 화해와 용서를 향하는지 분열과 증오를 향하는지...
우리는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죽은 후에 나는 과연 천국 혹은 극락이라고도 불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혹 나는 죄와 허물이 많아서, 또는 먹고살다보니 남을 위해 살지도 못해서 이런저런 이유 땜에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때론 걱정이 되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오늘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마르코 1,14) 이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 하느님 나라는 너에게서 멀리있지 않아. 아주 가까이 있어.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너도 들어 갈 수 있는 나라야." 그러시면서 두 가지만 요청하시네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코 1,15)
회개는 방향전환을 말하니, 내 욕심보다 이웃의 행복을,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복음을 믿으라구요? 하느님 나라가 더 이상 멀리있지 않고 정말 가까이에 와 있음을, 하느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이미 이런 기쁜 하느님의 복음을 들은 하느님 나라의 제자들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마르코 1장 18절.20절), 이 기쁜 소식의 전파자들이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이웃과 하느님께로 돌려놓고 그분이 여러분의 삶에 아주 가까이하고 계심을 믿고 있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러분의 것이니까요.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기쁜 소식을 즉각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에게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제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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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1,17,18)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며 수도자로서 첫 서원을 발하던 때가 어제 같은 데 올해 벌써 서원 36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순명과 가난과 독신의 삶을 통해 수도자로서 시대적 징표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잘 살지 못하여 부끄러워지는 아침입니다.
육군 소위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내가 멋진 군인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중위가 되면서 사제성소로 부르심을 깨달은 막내아들의 의지를 꺾지 못하셨습니다.
그 당시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용감하게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진정으로 응답하며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순수하게 말씀을 믿을 때 용기의 은총이 우리에게는 주어집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용감하게 살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순수함을 잃어서 때로 우리는 비겁하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됩니다.
현실에 적응하며 살면서 우리는 현실적인 것들을 많이 얻었지만, 주님을 따르는데 꼭 필요한 순수함은 그만큼 잃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다시 취해야 합니다. 말씀에 다시 흠뻑 젖어야 합니다. 말씀에 취하고 흠뻑 젖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잃어버린 순수한 믿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되찾을 때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순수한 믿음을 되찾는 만큼 우리 삶은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현실 삶의 모든 것인 ‘그물’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순수함을 보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되찾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처음 당신을 만나 설렘과 희망으로 용감하게 응답하였던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일깨우는 아침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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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정신과 입원 환자 중 22%가 1020세대라고 합니다. 1만 3,000여 명이었던 환자는 5년 만에 1만 7,000명으로 상승했고, 이는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상승 폭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살 시도 역시 5년 전에 비해 50% 증가했습니다.
이 기사의 말미에는 ‘경쟁’ 때문이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미친 경쟁이라고 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보았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성당 카페에서 학습지를 푸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당에 와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기에,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이가 너무 어려 보이는 것입니다. 물어보니, 아이의 나이는 만 3살. 이렇게 어린데 덧셈과 뺄셈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 다른 아이는 지금 구구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도 떼지 못했는데, 한글을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2~3년에 했던 구구단까지 만 3살의 나이에 하고 있다니 천재가 분명합니다.
이런 천재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3살에 뺄셈, 구구단을 못 한다고 해서 수학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늦게 한글을 익힌 저였지만,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제 또래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10권 출판했고, 현재 또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금도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경쟁보다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고,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부르십니다. 어부인 이 제자들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라고는 고기 잡는 것뿐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면서 부르십니다.
복음 선포하는 일에 그물을 내려 고기 잡는 능력이 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셨을까요? 오히려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같이 하느님 말씀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굳이 제자들을 선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즉,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도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쟁 사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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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낚는 사람>
마르코 1,14-20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사람 낚는 사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보는 사람
사람 만나는 사람
사람 헤아리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믿는 사람
사람 바라는 사람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품는 사람
사람 섬기는 사람
사람 떠받드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사람 낳는 사람
사람 살리는 사람
사람 북돋우는 사람
사람 낚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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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으로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으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자기 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중심에 사랑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분은 부르시고 나는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하고, 쇼핑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아니, 얻었기 때문에 버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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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복음은 마르코복음을, 독서는 사무엘 상권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발설’로 시작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1,15)
이는 세 개의 내용으로 된 문장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일이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준비해 온 결정적인 ‘때’(카이로스)임을 밝혀줍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원어의 뜻: 손 안에), 곁에 혹은 예수님과 함께 ‘온’ 나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요 은총이라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결코 가는 나라, 곧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미’ 온 나라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복음’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요, ‘회개’는 이를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동시에 바로 지금이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를 가져온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해줍니다(루카 11,20). 결국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코 1,17)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곧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아버지도, 삯꾼도, 배도, 그물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실현을 위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요, 중요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가치관과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요, 반면에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잘못된 것, 좋지 않은 것은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이지만, 좋은 것으로 여기던 것마저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 더 값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생계수단인 배와 그물보다도 더 값진 예수님을 발견한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버림’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하나의 조건이요 방법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을 버렸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찾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리기 위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기 위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을 따르기 위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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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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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와 추종의 여정>
- “제자의 길” -
“어떻게 살아야 하나?”
늘 새롭게 물어야 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한결같은 모범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89세 고령의 나이지만 삶은 늘 영원한 청춘의 현역이니 제자직의 롤모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사람들 많이 만나는 분주한 분이지만 피곤한 모습 전혀 없는 늘 미소띤 환대하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전혀 없는 모두가 활짝 공개된 공인의 삶입니다. 한밤중 기상하자마자 인터넷 홈페에지를 통해 확인해 보는 교황님의 날마다 동정입니다.
오늘만 해도 여러 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제 주일 삼종기도후, 계속되는 산불로 11명이 사망하고 18만명이 대피한 미국 LA 시민들을 위해 기도를 바쳤고, 주님 세례 축일을 맞이하여 “세례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다. 여러분의 세례 날짜를 잊지 말라”는 요지의 강론도 했습니다. 시스틴 경당에서 21명 아기들의 세례를 집전하면서, “세례는 최고의 선물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촛불을 밝히라”는 요지의 강론도 했습니다.
또 특기할 사실은 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으로 교황님에게 미국에서 공이 뛰어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도 수여했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의 “평화, 인간의 권리, 가난한 자들을 위하 배려, 환경 지킴이”로서의 기여를 인정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교황님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즘 계속 읽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의 자유”라는 회고록과 “김대중 육성 회고록”입니다. 역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주님의 제자직을 훌륭히 수행해왔던 세계적 정치가입니다. “애덕의 최고의 형태가 정치다(The highest form of charity is politics)”라는 참으로 멋진 금언을 입증하는 정치가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고백도 제자직의 수행에 힘을 줍니다.
“잠을 떨치고 새벽에 일어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다산>
“첫닭이 울면 정갈하게 씻고 옷을 입는다. 이부자리를 걷고 방과 마루, 뜰에 물을 뿌리고 청소한 다음 자리를 펴놓는다.”<예기>
옛 현자들의 진리를 추구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은 오늘의 주님의 제자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앞서 세례를 받으신후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과하신후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니 참 멋진 출발입니다. 요한이 잡힌후 곧장 바톤을 텃치한 후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고맙게도 우리 제자들이 추종하는 주님이자 스승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히브리서를 통해 미리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추종하는 주님의 정체가 우리를 용기백배하여 자발적 사랑으로 주님이신 스승의 말씀을 경청하고 따르게 합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참으로 강력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날마다 화두로 삼고 살아가야할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인 오늘 지금 여기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런 긴박하고 절박한 중차대한 사명 수행을 위해 주님은 즉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네 어부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들은 평생 호숫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부로서 한생애를 마쳤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또한 부질없는 “만약?” 이란 질문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하느님의 섭리에 속한 당시 제자들의 삶이자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끊임없이 이를 찾았던 갈망의 사람들인 어부들임이 분명합니다. 주님이자 스승이신 부르심에 선행하는 진리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는 간절한 갈망이자 열망입니다. 바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야 말로 성소의 원동력입니다. 이런 갈망의 어부들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신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침내 오매불망 그리던 구원의 출구 주님을 만난 어부들입니다. 마침내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무지의 어둠중에 호숫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부로써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전광석화, 주님의 부르심에 ‘무지의 눈’이, ‘갈망의 눈’이 활짝 열린 어부들은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고, 역시 첫눈에 예수님에 반한 어부들은 지체없이 모두를 내려놓고 그분을 따라 나서니 그대로 회개의 표현입니다. 버림, 떠남, 따름으로 표현되는 회개는 한두번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평생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더불어 회개의 여정이자 추종의 여정중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제자들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참으로 연중시기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첫 출발의 시작에 걸맞는 오늘 복음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로서 하루하루 날마다 회개의 여정, 추종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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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이미'', ''아직', '''즉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주님께서는 때가 찼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 두 가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어떤 때가 찼는가? 나한테도 때가 찼는가?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물론 대박이 날 때가 아닙니다. 로또를 사고 주식을 하는 사람은 그 대박의 때를 기다리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뒤에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는 것을 볼 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심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왔는데, 그 도래를 기다리던 이에겐 성탄으로 그때가 찼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제 당신이 어른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심으로써 그때가 꽉 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니 하느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음을 알라는 말씀인데 그런데 아직 때가 차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건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우리 사이에는 ‘이미’와 ‘아직’의 간격과 긴장이 있고, 그래서 주님의 복음 선포가 필요하고, 주님을 이어 복음을 선포할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마르코 복음은 주님의 공생활 시작 얘기와 첫 제자가 부르심 받는 얘기를 동시에 전하는데 첫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곧바로’, ‘즉시’의 사람들입니다.
‘아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고 ‘곧바로’ ‘즉시’ 따른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 전에 하시는데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복음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고 그것을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생각합니다. ‘이미’와 ‘즉시’와 ‘아직’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는 그 ‘때’가 ‘이미’ 꽉 찼는가? ‘아직’ 덜 찼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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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반인반수, 반인반신의 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되며 주님의 공생활도 시작되는데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그 첫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치십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복음을 믿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이미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도 나에게만은 아직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회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며 그 복음을 믿음으로써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우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인 사람이고, 그러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 반대인 사람입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면 이 세상 나라는 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이 세상 삶이 끝나야 하느님 나라 곧 천국에 가잖아요?
그런 것이기에 가장 간단한 저의 회개 테스트는 '지금 죽게 되면, 예를 들어 암 선고를 지금 받게 되면 나는 기쁠까?'입니다.
저의 이성적 믿음은 그렇게 돼도 기쁘거나 적어도 담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제가 어떨지 아직 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떨까 또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을 지금 바로 떠나는 것이 아직은 기쁠 정도가 되지 못했더라도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Life Style대로 사는 것은 어떨지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활 양식이라면 수도자들이 살기로 서약하는 바로 그 복음 삼덕 곧 가난, 정결, 순명을 복음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사는 것이지요.
제 생각에 이것은 지금 즉시 그렇게 살겠노라고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기로 이미 서약까지 한 저이지요. 하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는 아직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회개를 시작은 하였지만 아직 충분히 또는 완전하게 살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제가 기쁘게 살고는 있는 편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기쁘고 너무 행복하다고 할 정도는 아직 되지 못했음이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반인반수라는 말이 있지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이라는 말 말입니다.
어제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살게 됨을 얘기했지만 어쩌면 저는 반인반수이기도 하고, 반인반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짐승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느님스럽기도 하는 저는 앞으로 한참 회개의 여정을 가야 할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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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구원의 때!>
오늘 복음(마르1,14-20)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당신을 드러내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입니다.
이어서 당신과 함께 활동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17)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들이 바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와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삶) 전체를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찼으니, 얼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때일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때'이고, '완성되어진 하느님 나라의 때인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때'라고 묵상이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완전한 드러남(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이들의 때'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 싸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입니다.
지금은 너의 잘못을 바라볼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나의 잘못을 바라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와 용서를 청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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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 17)
전례력상
성탄 시기가
끝나고
연중 시기가
시작되는
새로운
첫날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복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점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갑니다.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숫자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낚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물을 버리듯
버릴 수 있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회개의 삶은
결단의
시작입니다.
복음은
분명한 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들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사랑으로
기다리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은
사람들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안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설
용기와
확신입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축은
회개와
복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회개와 복음으로
성장합니다.
낚인 사람이
낚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이
심장을
뛰게 합니다.
하느님의 복음으로
행복한 연중시기의
첫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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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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