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 사사기 4:1~10】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말씀 나눔】
장기 고수는 상대의 말이 판 위에 건재하고 있는데도 몇 수 앞에 외통수가 될지를 봅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 눈에는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습니다. 궁도 그대로 있고, 차도 포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판을 정확히 읽는 사람 눈에는 몇 수 뒤에 상대방이 장군을 받아 낼 수 없다는 것이 보입니다. 판이 끝나지 않았는데 결과는 이미 결정된 겁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판이 있습니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포기하게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도 그렇습니다.
1절,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첫 문장부터 무겁습니다. 팔십 년 평온을 누렸던 백성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2a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3절,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철 병거 구백 대, 이스라엘이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압도적인 군사력이었습니다.
이건 그냥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격차입니다. 그것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사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골짜기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로 이미 철 병거가 등장합니다. 그때 못 끝낸 싸움이,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 받은 고통으로 이자를 쳐서 돌아온 겁니다. 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과가 정해진 것 같은 자리. 이스라엘은 거기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신 방식이 낯섭니다.
강한 장수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4~5절을 보면,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왕좌가 아니라 나무 그늘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랍비돗의 아내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원문을 보면 드보라를 소개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미리암은 “선지자 미리암, 아론의 누이”로, 훌다는 “선지자 훌다, 살룸의 아내”로 소개됩니다. 직함이 먼저, 가족관계는 그 뒤입니다. 드보라도 이 순서를 따르는데, 그 앞에 한 단어가 더 붙습니다. 원문 그대로 옮기면 “여자, 선지자, 랍비돗의 아내”입니다. 선지자라는 말 안에 이미 여성형이 담겨 있는데도, 저자는 굳이 “여자”라는 말을 한 번 더 앞세웁니다. 이 사람의 정체를 독자 눈앞에 또렷이 세워놓고 싶었던 겁니다. 전쟁을 지휘할 군대도 병거도 없는 한 여인의 입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이렇습니다. 6~7절,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순서를 잘 보셔야 합니다. 병력도 아직 모이지 않았고 전투도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끌어…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흥미로운 것은 “이끌다”라는 동사입니다. 6절에서는 바락이 병력을 다볼 산으로 이끌어 가고, 7절에서는 하나님이 시스라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겉으로 보면 두 장수가 군대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누가 전쟁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야빈에게는 왕관이 있습니다. 시스라에게는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습니다. 곧 바락에게는 만 명의 군사가 모일 겁니다. 그런데 이 본문 전체에서, 자기 입으로 “내가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딱 한 분입니다.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니고, 아직 아무 병력도 없는 드보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여호와, 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름을 받은 바락은 곧바로 나서지 못합니다.
8절,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성경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겁이 나서인지, 확신이 부족해서인지, 캐물으라고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간혹 이런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의사는 이미 다 설명했습니다. 왜 수술이 필요한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성공률이 어느 정도인지. 엄마는 그 설명을 다 들었고, 의료진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서명하기 전에 전화기를 듭니다. 남편을 찾습니다. “당신이 와야 나도 사인할 수 있어.”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붙들고 혼자 한 발을 내딛기가 버거운 순간입니다. 바락의 마음이 정확히 이랬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그가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꾸 바락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싶어집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이러니까 안 되는 거라고. 그런데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락의 부족함만이 아닙니다. 그 주저함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9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락의 조건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들어주십니다. 그가 원했던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조건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 자기 손으로 얻는 영예는 다시 정하십니다. 계획을 취소하지 않으시고, 자리를 다시 배열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한 단어가 있습니다.
“파실 것임이니라.” 2절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다고 했던 바로 그 동사입니다. 원문으로 같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의 손에 넘기신 그 손이, 원수를 구원의 손에 넘기시는 그 손과 같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 다른 두 분이 아닙니다. 같은 손, 같은 단어입니다.
그 리고 바락은, 조건을 걸었던 그 사람이, 결국 일어나 움직입니다. 10절,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조건을 걸었던 그 발이, 결국 말씀을 따라갑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하나입니다.
철 병거 구백 대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미 승리를 선언해 놓으셨습니다. 아직 병력도 안 모였고, 전투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이 전쟁의 결과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삶에도 그런 자리가 있을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미 끝난 것 같은 판. 그리고 그 판 앞에서 여러분도 바락처럼, 말씀만으로는 발이 안 떨어질 때가 있을 겁니다. “이게 확실해지면”, “이 사람이 함께해 주면”, “이 조건이 채워지면.” 우리도 그 협상 테이블에 앉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그 테이블 위에 세워두고 심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락의 주저함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취소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모든 상황의 결과를 미리 아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은 우리의 흔들림보다 더 견고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서게 될 위치는, 여러분이 협상한 그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조건이 다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은 그 자리에서도 결국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 넘기신 그 손으로, 원수를 여인의 손에 넘기겠다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구원하시는 하나님, 다른 두 분이 아닙니다. 같은 손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그 손이 오늘도 여러분의 그 판 위에 있습니다. 이 은혜가 오늘 여러분 각자의 자리 위에 함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묵상 - 하시깨묵】
① 지금 내 삶에서 “철 병거 구백 대”처럼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것 같아 보이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② 나는 그 자리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 협상 테이블을 펴고 있습니까?
③ 힘도 지위도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④ 바락처럼 “이 사람이 함께해 주면”이라는 조건을 걸고 있는 관계나 상황이 있습니까?
⑤ 심판하시는 손과 구원하시는 손이 같은 손이라는 사실이, 오늘 내가 겪는 어려움 앞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⑥ 조건이 다 채워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늘 당장 “일어나 걷는” 순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⑦ 이 새벽,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싶은 나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추천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은혜의 찬양】
주의 나라가 임할 때:
https://youtu.be/93waNpakMTs?si=ukoKnVXjL5G-UWV8
드보라의 노래:
https://youtu.be/n5XCgXKjRAY?si=6lBfc06d2e8JsPOO
드보라의 노래-우릴 이끄시는 주:
https://youtu.be/monHQToHoyU?si=v2V3GlOErhTq9GQx
【새벽예배영상】
https://youtube.com/live/N8cpJ_jg_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