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넘었다. 대문이 없는 집인데 사람이 살지 않아 생 울타리가 자리를 잡았다. 빈집에 도둑 들 일은 없지만 휑하게 열린 것보다 나았다. 마당엔 구절초가 씨앗을 물고 있다. 꽃만 예쁜 줄 알았는데 씨앗은 앙증맞은 목화꽃이었다. 미세한 바람에도 몸을 흔들었다.
장독대에 올라선다. 손샅이 짓무른 안주인 솜씨로 대충 주물럭거린 타원형이다. 텃밭을 만들어 식솔의 찬거리도 거두어야 할 형편이라 땅 한 평인들 허투루 쓸 수 없다. 마당 한 귀퉁이에 나름의 창의력으로 굳힌 장독대는 세월에 흔들려 자잘한 금 투성이다. 비바람은 적당히 양성된 바닥을 조각내어 작품을 만든다. 발을 옮길 때마다 자그락거리며 부서진다. 유리파편 같이 삽시간에 조각나고 누른 힘의 강약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세모, 타원형, 팔각형, 삐딱한 사다리꼴이 얌전히 앉았다. 무슨 바람이 어떻고 불고 햇빛은 얼마나 쏟아내야 바스락바스락 소리까지 소환할까.
구엘공원 타일 벤치가 떠오른다.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구엘공원은 가우디가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 조성한 곳이다. 자연 그대로를 두고 인공미를 곁들여 조화를 이룬다. 지중해 물빛을 닮은 푸른 색깔의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은 타일 한 장을 망치로 토닥거린 놀잇감이다. 정해놓은 틀도 없이 깬 조각을 붙여 창의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부른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벤치, 누워있는 용을 파도처럼 꿈틀거리게 하여 동화 속으로 초대한다. 세상에서 가장 긴 벤치에 앉아 가우디와 거부巨富 구엘 백작의 인연설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나는 달개집 안주인과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섰는지.
달개집 안은 어둠이 산다. 모갯돈을 장만하기 위한 물건이 쌓여 있던 장소다. 적막이 흐른다. 흙냄새가 물씬거리고 황토로 덧칠한 바닥만 숨을 쉰다. A4 용지만 한 들창이 공기를 실어 나른다. 벽에 달린 전구도 무용지물이라고 끊긴 전선이 말을 건다. 함석 물받이도 덜렁거린다. 그런데도 이렇게 편안하다니.
인간의 고된 삶은 공간 속에 배어있다. 안주인의 공간은 달개집이었다.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든 안방보다 필요에 의해 본채에 덧대어 지은 집, 온기가 없어도 자리하나 깔면 안식할 수 있는 그만의 공간이었다. 친정에 두고 온 자식을 마음껏 그리워하고 회한을 풀어내도 소문나지 않을 거룩한 방이었다. 미련은 끈끈했다. 무엇으로도 자를 수 없는 끈이었다. 와글거리며 눈앞에 있는 자식보다 체면 때문에 만나지 못한 자식 하나가 더 눈에 밟혔다. 그 아픔이 달개집에 모여 켜켜이 쌓여 있다. 안주인의 눈물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창고엔 미물이 엎드려 산다. 무엇이 되었든 생명은 있을 것이다. 잠겨있는 돼지 꼬리 쇗대를 돌리며 이미 눈은 안으로 향한다. 녹슨 함석문은 문과 문틀이 어긋나있다. 주인이 자주 드나들었을 텐데 입을 꽉 다물고 열리지 않으려 버틴다. 결국 무엇이 뭉텅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내고야 마지못해 열린다.
사방에 거미줄이다. 생명이 있구나, 거미도 모기도 파리도 대롱거린다. 한쪽 날개가 떨어진 호랑나비도 걸려있다. 모두 죽었다에 방점을 찍는다. 도르르 말린 거미를 툭 친다. 움직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다. 한 번 더 쳤더니 동그라미로 매달린다.
나도 수없이 죽은 척 살았다. 힘센 자가 덮치면 너부러져 있어야 살아남는다. 억울함이 있어도 안으로 삼켜야 하고 치미는 울화도 꺾어야 생을 부지할 수 있다. 참담 속에서 힘을 키우고 혼자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헛주먹을 날려도 당찬 미래를 품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거미는 위장술의 대가다. 괜찮은 녀석,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그래야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거미의 일생이 숨 쉬는 창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주인이 쓰던 물건이 조금 남아있다. 연탄 서너 장이 얼굴을 들이민다. 지게와 소쿠리도 비석처럼 서 있다. 벽엔 낫과 호미가 나란히 걸려있고 옥수수 씨앗도 매달아두었다. 씨앗을 건사하며 배부른 자식들의 웃음을 얼마나 자주 떠올렸을까.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흙이 고봉으로 담겨 있다. 지붕이 무너져 떨어진 흔적이다. 흙을 부었더니 카네이션 한 송이가 따라 나온다. 붉은 갑사 천으로 꽃잎을 정성들여 만든 수제꽃이다. 만든 자식도 받았던 부모도 흐뭇했으리라.
오가는 사람은 많이 없지만 달개집 서사는 끝없이 이어진다. 바깥주인의 기침소리, 외양간 짐승의 숨소리도 오롯하다. 이웃집 술 취한 남정네의 한 맺힌 포효도 담을 넘는다. 해는 저물고 그들의 흔적을 들으며 달개집 삐걱대는 문을 닫는다. 수만 리 먼 곳 구엘공원 타일벤치와 비뚤한 타원형 장독대가 손을 흔든다.
(박희선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