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등 독립운동가 15人, 컬러사진으로 되살아나
AI 얼굴복원 기술 활용해 제작
오늘부터 역사박물관 전광판 송출
국가보훈처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15인의 흑백사진을 컬러 이미지로 복원한 영상을 28일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대형 전광판(미디어 캔버스)에 송출한다. 송출 기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인 4월 11일까지다.
대상은 백범 김구와 김좌진,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영국), 송진우, 안중근, 안창호, 유관순, 윤동주, 윤봉길, 이승만, 이회영, 조소앙, 최재형, 한용운, 호머 헐버트(미국) 선생 등이다.
영상에는 각 독립운동가의 생애 및 업적과 함께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김구),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윤봉길) 등 주요 어록도 소개된다.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와 인공지능(AI)학과 학생들이 참여해 AI 얼굴 복원 기술과 안면 복원 프로그램을 활용해 독립운동가들의 흑백사진을 고해상도의 색채 사진으로 복원한 뒤 영상으로 제작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 위에 오늘의 자유롭고 번영된 대한민국이 서 있음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앞으로도 독립운동가 사진을 색채 사진으로 복원해 후손에게 액자로 증정하고 영상으로 제작해 국민과 공유할 계획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유관순(1902-1920)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천안 아우내장터만세시위를 주도했다.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김구 (1876-1949)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주석 등을 역임했다
한인애국단 의거를 주도하고 한국광복군을 창군하였다.
■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김좌진 (1889-1930)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으로 활약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지도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으로서 1920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을 쓸어버릴 길 없구나
베델 (1872-1909)
1904년 영국 기자로 내한하여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다.
언론으로 일본의 경제침탈을 비판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보도했다.
■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게 하시오.
송진우 (1890-1945)
일본 유학 후 1921년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언론운동을 전개하고,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했다.
■ 옥중에 갇힌 몸이 밤마다 잠 못 이루니 나라 근심에 상한 마을 몇몇해나 쌓였던고
안중근 (1879-1910)
교육사업과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하였다.
■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안창호 (1878-1938)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청년단체 흥사단을 조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 및 내무총장 등으로 활동했다.
■ 낙망(落望)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윤동주 (1917-1945)
연희전문학교에서 <서시> 등 민족시를 발표하였다.
1942년 징병제 반대 시를 집필하는 등 민족문학 활동을 지속했다.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봉길 (1908-1932)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일본 수뇌부들에게 폭탄을 던져 독립의지를 드높였다.
■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승만 (1875-1965)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41~45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 사람을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이회영 (1867-1932)
1911년 만주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과 무정부조의 운동에 참여했다.
■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
조소앙 (1887-1958)
1913년 동제사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 강령을 기초했다.
■ 삼균주의(三均主義)-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제도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호혜평등으로 민주국가 건설하자
최재형(1860-1920)
러시아 한인들을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08년 항일단체 동의회를 조직하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 러시아 추위보다 나라를 잃은 나의 심장이 더 차갑다
한용운 (1879-1944)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헐버트 (1863-1949)
잡지 <한국평론>을 창간하여 일제 침략을 비판했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밀사 파견을 지원했다.
■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