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그랬던가
내가 외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을 때 여름방학도
다 끝나갈 무렵 외가에 친척이 되는 1년 여자후배가 놀러왔다.
외사촌들이랑 노는 것을 보고 나는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다녀왔다.
그런데 내 책상을 누가 만진 흔적이 보였다.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그 후배가
오랫동안 내 방에 있다 갔단다.
집히는 바가 있어 일기장을 찾아보니
세 권이나 되는 일기장이 모두 꺼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후배가 그 애가 하숙하는
선생님 댁 딸과 친구였단다.
그래서 선생님 댁에도 자주 놀러가곤 하여
그 애도 잘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연히(자기 말로)보게 된 일기장에
그 언니 이름이 나와서 자꾸 읽다 보니
전부 읽게 되었단다.
그리고 너무 마음이 아파 그걸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자기 딴엔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하여)
친구가 그 애에게 또 그 얘길 전하는 중에
그 집에서 하숙하던 내 친구
(초등학교 동창으로 보건소 옆에 살았는데
이 친구는 뒤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다)
까지 듣게되어 내가 그 애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명에게(특히 그 애에게)알려지게 되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그 애에게 사인장을
(그 때 사인장이라는 게 유행했다)
건네며 내가 주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단다.
거기에 당신이 좋아하는 꽃은?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은?....하는 식으로
질문에 답하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 나에 대한 당신의 첫인상은?
하고 묻는 항목이 있었단다.
그랬는데 그 애가 거기에
<먹다 남은 찐 고구마>라고 했다는 거야.
물론 농담으로 쓴 것일 테고
직접 내가 그걸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내겐 큰 충격이었다.
그 후 나는 내가 참 멋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나를 멋있다고 하거나
좋아한다고 하면 나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여자들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직도 나는 내가 여자들에게
매력 있는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뒤 누구누구가 나를 많이 좋아했다는 말도 있었고
나를 짝사랑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여전히 자신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3년 전쯤 언젠가 마당발인 건축 인테리어하는
친구가 이런 소식을 전해왔다.
그 친구 사무실에 보험하는 초등학교 여자동창이
찾아왔는데 내 얘기를 묻더란다.
그런데 그 동창이 그 애와 친했던
(그 때 중학교가는 여학생이 많지 않아서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게 친한 거였으니)게 생각나서
그 애 근황을 물었더니 만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나고싶으면 말하라고......
나 많이 고민했다.
만나 보고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리고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너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가...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알고있는지...
그리고 그 때 사인장에 내 첫 인상을
<먹다 남은 찐 고구마>라고 썼었는지.
왜 그랬는지......
그리고 그 말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어했는지 말하고도 싶었다.
아마 만났어도 못 묻고 말하지 못했겠지만......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꼬라는 여인을 만나는 얘기가 나오는데
세 번 째 만남은 안 만나는 게 좋았겠다고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기왕
좋은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는 게 아름답겠다 생각했다.
달처럼 별처럼 거릴 두고 보는 게
훨씬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그 얘길 해야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랑의 상처에
(우스운 얘기지만 내 딴엔 그 때 심각했다)
가슴 태우고 있을 무렵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서울로의 유학의 꿈은 깨졌다.)
여학교 졸업앨범 뒤에 있는 주소록에 있는
그 애의 서울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처음으로 보내는 편지였는데
뭐라 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두 통을 썼다.
한 통은 그녀에게 다른 한 통은 그녀의 아빠에게
(의사선생님이셨던 그 애 아빠는
그 애 어머니 못지 않게 나를 많이 좋아하셨다).
아마 이렇게 썼겠지.
내가 첫째 따님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내 마음을 따님에게 표현한 적이 없어
따님은 그런 내 마음을 모를 거라고.
그리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려고 했지만
우리 집안의 종손인 이유로 내가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3년 뒤 대학은 서울로 갈 계획이라며
그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시라는 내용이었겠지......
그런데 그 편지가 반송되어왔다.
주소 불명이라 표시되어있는 딱지를 하나 덧붙여 가지고.
끝.
첫댓글 불과 A4용지로 4쪽밖에 안되는 글이었지만 힘들게 썼다. 아니 쓰는게 힘들었다기보다 내 마음이 다시 아파와서 힘들었다. 나 진짜 비내리는 종로거리를 헤맨적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내가 그 애를 못잊어하는 동안 다른 애들에겐 애꿎게 소홀히 대했슴을 깨닫는다. 나 참 나빴어. ^^~
수고 많이 하셨네요.즐감 하고 갑니다.이 늦은 새벽에...~~
아직 못 만났나요? 나이가 어케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시대에 있을수 있는일인줄 알았는데..아직도 이런일이 있군요. 이곳의 아이들은 너무나 표현들을 잘해 원은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
그래요...아름답고 아쉬운 기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도 합니다....
그러게요~ 그때의 아련하고도 애절한 추억은 고이 간직 하심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심이 그여인이 왜 첫인상을 먹다 남은 진 고구마라고 썼을까? 남에게 못이박히는 말은 절대 삼가야 한다고. 그런데도 님은 그를 잊지않는것은 참 사랑...아니면 풋사랑이었다고... 긍금증이.
단편 드라마 한편을 본 듯 하네요.....잘 봤습니다.....
첫사랑의 기억이 흐릿하니 멀리서 다가오는것 같네여...왕자님의 첫사랑 스토리 잘 읽었습니다...늘 건강하시고 시원한 미소 잃지않길 바랍니다..*^*
짝사랑이든 첫사랑이든 가슴아픈 사랑이든...사랑은 다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옛날 이야기하며 눈 반짝이며 님의 글 읽을 수도 있구......ㅎㅎㅎ
고운 추억이네요...왕지님에 첫 사랑도 여기서 끝이 났네요..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