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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목종실록
(980-1009년, 재위기간 : 997년 10월-1009년 2월, 11년 4개월)
1.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
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
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의 맏아들로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소생이며 이름은 송(誦), 지는 효신(孝伸)이다, 980년에 태어난 그는
경종이 사망할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송
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에 봉했다. 그리고 송은,997년 병으로 누워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물려줌)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고려 제7대 왕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삼아 친모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진 헌애
왕후는 곧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 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또한 김치양과 버젓
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하게 된다.
김치양은 등용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우복야(복야 : 고려시대 상서성에 속한 정이품 벼슬 좌우 두사람이 있었
음) 겸 삼사사(삼사 : 국가의 곡식과 화폐를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는 하는 관청)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면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몰려들였으며, 그
는 거둬들인 뇌물로 3백여 간이나 되는 집을 짓고 정원에 정자와 연못을 꾸며 밤낮으로 헌애왕후와 놀아났다.
또한 김치양은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
졌다.
김치양은 권력독점으로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목종은 그를 내쫓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헌애왕
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듯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를 소홀이 하고 엉뚱하게도 남
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의 동성연애 대상은 유행간이라는 인물이었다. 유행간은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용모에 반하여 남색을 즐기게 된다.
목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유행간은 곧 합문사인(합문: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는 관아,사인은 그 관아의 책임자 정4
품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게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따라 유행간은 마음 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 있었다.
왕을 마음대로 조정하게 된 유행간 역시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백관들을
경멸하여 그들에게 턱과 눈빛으로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의 측근 신하들은 마치 유행간을 왕처럼 떠받
들었다.
유행간은 힘이 강해지면서 유충정이라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 주었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 역시 외모
가 미려하고 신체가 뛰어난 덕택으로 목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목종 곁에서 왕명을 핑계하여 인사를 좌우하였으며,때로는 자신들이 마치 왕인 것처럼 많은 궁
인들을 이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조정이 이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004년 그동안 김치양과 놀아나던 헌애왕후는 아들
을 출산했다. 이때부터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앉히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王郁)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인 헌
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시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
다. 그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헌애왕후는 자신의 이종 조카인 대량원군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세자로 책봉할 수 있으
리라고 판단하고, 대량원군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숭교사(개성 남쪽에 있었던 목종 때 창건한 사찰)로 출가시킨 뒤 다
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북한산) 신혈사(진관조사가 수도하고 있었던 조용한 암자)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누차에 걸
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량원군은 승려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심지어
는 방바닥 구들을 파서 그 밑에 침상을 만들어 숨기도 했다.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왕위를 노린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은 병을 얻고 말았다. 원래부터 겁이 많던
그는 1009년 봄에 숭교사를 다녀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창
고에 불이 붙어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슬픔에 잠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드러누웠다.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며, 그들의 축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병으로 누운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기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庾行簡) 유충정(劉忠正)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러는 사이 목종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스스로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고 한시 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갗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
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재추(宰樞 최고위 재상) 채중순과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 과거를 관장하는 주 시험관) 최항
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宣徽判官 훈구가문출신판관)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
하였다. 또한 전중감(왕실과 친족의 족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이주성을 통하여 조칙을 전달하여 서북면도순검사.(도순검사 : 지방의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임시로 파견된 벼슬아치) 강조(康兆)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고 서경을 출발하여 동주(황해도 서흥군)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내사주서(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는일을 맡음 종7품 벼슬) 위종정(魏從定)과 안북도호장서기(장서기 : 정7품 지방관직 기록을 맡음) 최창(崔
昌)이 찾아왔다. 그들은 “황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김은을 황제로 옹위하려고 한다. 그런데 강조
가 외방에서 대군을 장악하고 있어 혹시 반역을 도모할까 염려하고 있다.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는 강조를 제거하기
위해 밀서를 날조하여 개경으로 부른 것이다. 지금 개경으로 가면 죽는다.”
강조는 남행을 잠시 멈추고 심복을 풀어 개경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김치양 일파가 이미 황제를 시해하고 도순
검사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기 위해 황명을 사칭했다.” 강조의 부하들은 개경 저잣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을
강조에게 보고했다. 강조는 그 말을 믿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다시 서경 본영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황제의 명을 받고 개경으로 달려오는 있는 강조를 제거하기 위해 절령(岊嶺 황해도 멸
악산맥에 있는 고개이름)에 군사를 배치했다. 그러나 강조가 서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천추태후는 마음을 놓았
다.
한편 강조의 아버지는 이러한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을 사실로 믿고 애가 타서 급히 가노를 머리를 깎아 중으로
위장시키고,‘왕이 이미 죽었으며, 간흉들이 권세를 휘두르니, 개경으로 군사를 끌고와서 국난을 바로 잡으라’는 편지를
써서 지팡이 속을 깎아 넣어 엄중한 경계망을 가까스로 뚫고 강조에게 보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본 강조는 왕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부사(副使)인 이부시랑(吏部侍郞)이현운 등과 함께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진출했는데, 평주(평산)에 남하했다. 그 때 병사 하나가 급히 강조의 군대 쪽으로 달려왔
다. 앞서 보낸 전위대의 전령이었다. 급히 달려온 전령이 강조에게 전했다. “국왕께서 살아 계신다고 합니다.”
강조는 한참 망설인다.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고, 부하 장수들은 사태를 바
로 잡고 현자를 왕위에 세우자는 말을 한다. “결국 내게 역적이 되란 소리를 하는 것이오?”
“주상은 병이 깊고 마음이 뒤틀려 더 이상 사직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김치양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왕명까
지 위조하고 있습니다. 태후께서도 이제 예전 같지 않아, 권신들을 통솔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장수들이 청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군.”
강조는 포기한 듯 말했다. 그는 분사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을 불러 군사 500을 주고 신혈사로 가서 대량군을
모셔 오라는 명을 내렸다.
김응인은 그 길로 신혈사로 갔다.그들은 강행군하여,강조의 본군이 개경에 도착하기 전에 삼각산에 도착했다.
한편 강조의 본대가 개경에 도착했을 때, 6위(성을 지키고 행사동원,궁궐 수호등을 하는 중앙군)의 군사는 그들을 막
아서지 않았다. 강조의 전위대가 김치양의 농단을 바로 잡기 위해 온 것이니 길을 막아서지 말 것을 전했기 때문이었
다. 안 그래도 대량원군을 위해 거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들이었으니, 대부분은 강조의 군대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
했다. 대량원군 편에 서지 않은 자들도 김치양이라면 치를 떨었기에 가만히 지켜봤다.
강조는 군을 풀어 도성의 문을 모두 접수하게 했다. 사람을 시켜 왕이 잠시만 귀법사(송악산 아래에 있는 절)로 피했
으면 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궁궐로 보냈다. 귀법사로 피해 있으면, 김치양일파를 제거한 다음 다시 데리러 가겠다는 뜻
이었다.
강조는 그렇게 목종을 안심시킨 다음 군대를 몰아 왕성으로 진군했다. 병사들이 궁안으로 몰려들자, 목종은 폐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모후와 함께 궁인들과 유충정을 데리고 법왕사로 몸을 피했다.
목종이 궁궐을 빠져 나가자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헌애왕후의 친속 이주정 등 30여명을 귀양 보냈다.
한편 법왕사로 떠난 목종은 다시 충주로 가라는 명령으로 최항을 시켜 말을 내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이에 강조는
말 한 필을 보내 주자 충주로 말을 몰았다.
시종 2명만이 그들을 따르고 목종이 친히 천추태후의 말고삐를 잡고 가는 단출한 모습이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목종은
직접 천추태후의 식사를 챙겼다고 한다.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목종을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목종 일행이 적
성현(경기도 연천군 인근)에 이르렀을 때,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은 이를 거부하자 결국 강조의
수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천추태후는 자기 할머니의 친정인 황주로 도
망쳤다.
목종은 결국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종이 죽자 강조의 수하들은 문짝으로 관을 삼아 시체를 보관
하고 강조에게 보고하니, 강조는 적성현 창고에서 쌀을 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009년 2월에 일어난 이 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으로 11년 4개월 동안의 목종시대는 끝이 났다. 또한 이 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목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경부는 노나라의 예법을 위반하였고, 불위는 진나라의 화근을 빚어냈으며 제나라 환공은 자기 시체에서 벌레가 생기
도록 거두는 자가 없었고, 진시황은 모래톱에서 객사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이 어찌 만대의 치욕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목종은 이런 사람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하여 일의 시초부터 마땅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결국 모자가 함께 화를 입
고 왕실을 거의 망칠 뻔하였던 것이다. 아아! 목종의 불행은 오히려 불행이 아니로다.’
목종은 생을 마감한 지 한 달 후에 적성현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능호는 공릉이다.
목종은 자기 어머니 헌애태후에 너무나도 효자였기에 신세를 망친 것이다.
목종은 신정왕후 유씨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으며, 소생은 없었다. 신정왕후 유씨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 소
생 흥덕원군 왕규의 딸이다 어머니는 광종 딸인 보화궁부인이다. 죽은 후에는 목종 사당에 합사(한 곳에서 제사 지냄)
되었다.
첫댓글 권력을 가져 본 사람이면
그 힘을 정직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하는데 자신의 영달과
지나친 탐욕으로 일관하니 인간들의
인면수심이 천년전이나 현세에나
다를게 없음이 한탄스럽습니다
목종의 짧은 인생이 차라리 다행인가요
지나친 효심도 어쩌면 모자란 인성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 한거지요.
고려의 목종과 천추태후 김치양은
마치 현세를 읽는 듯 합니다.
혼탁한 세상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지금이나 옛날이나 기본 욕망은 똑같지요.
지금은 기계문명이 발달해서 생활이 편리해진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워낙 경쟁이 심하지요.
국가들도 패권경쟁에 여념이 없게 되었고.
덧붙어서 항상 저의 글에 참여와 관심에 뭐라 말할지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