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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우리의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곤 한다. 전도유망한 선수부터 경험있는 노련한 선수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서히 일어나게 된다. 축구에서의 인생은 실제 인생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며 이것은 위대한 선수들보다 더 위대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떠오르고, 깜빡거리며, 빛이 나고, 무언가를 이기고, 점점 희미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현대에 들어서 더 빨라지고 있으며 역사적인 흥미가 덜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펩 과르디올라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팀은 전 세계가 알고 있는 뛰어난 축구의 모습을 만들어냈고, 경기를 지배하고 상대팀을 박살내며, 3년차엔 전례가 없는 많은 트로피들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즐거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항상 다가올 무언가와 뛰어난 레벨을 유지해야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고민은 그의 머리선이 후퇴하게끔 만들었다.
"3년차는 죽음을 초래한다." 라고 위대한 헝가리 코치 벨라 구트만이 얘기했고 이것은 특히 강한 압박을 하는 팀에게는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3년차는 위대한 역사에 있어 가질 수 있는 최대 수명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일반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특별한 원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세상의 영광은 이처럼 흘러간다
물론, 제일 큰 문제중 하나는 선수들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1956년부터 1960년 사이에 5번 모두 유러피언 우승컵을 들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 (감독 교체가 3번에 이르렀으므로 구트만의 3년차 법칙을 피할 수 있었다.) 레알마드리드가 유럽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富) 덕분이었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5년 연속으로 리그 타이틀을 따냈다. 페렌크 푸스카스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가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상대로 1964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치렀던 것은 큰 충격을 줬다. 호세 산타마리아는 34살이었고 파코 젠토는 31살이었던 반면,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평균 연령은 37살이었다. (역자 주: 당시 결승전은 3-1로 인테르의 승리로 끝났다.)
리버풀은 빌 샹클리가 은퇴하기 전에 위대한 팀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지만, 돈 레비가 리즈의 시대를 이끌었으며 그가 1974년 팀을 떠나고 브라이언 클러프, 그 다음은 지미 암필드가 리즈를 이끌게 된다. 변화를 운영하는 것은 밥 페이즐리, 알렉스 퍼거슨과 발레리 로바노프스키와 같이 오래된 커리어와 한 클럽에서 그런 것들을 유지해오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였다. 하지만 레알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1964년 레알은 단지 늙은 팀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팀이었다. 전술의 역사는 움직이며 인테르의 맨-마킹은 특히 젠토와 푸스카스를 질식하게 했다.
사건이다, 친애하는 소년이여, 사건이다
때때로 외부 사건이 개입하기도 한다. 빅토르 마슬로프 감독 아래에서 디나모 키예프는 소비에트 챔피언쉽에서 3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빅토르 마슬로프는 1966년 월드컵 당시에 1군 선수 몇 명과 함께 유스팀 선수들을 기르길 강요당했다. (소비에트는 월드컵 기간동안 리그를 중단했었다.) 그는 경질되고 말았고, 모스크바 지하철을 타고 키예프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70년 월드컵에서도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났으나 그들은 1966년 세대들보다 재능이 있지 않았다. 좀 더 비극적으로, 1991년 세르비아의 츠베르나 즈베즈다는 내전으로 인해 그들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막을 내리게 된다.
또는 90년대 초의 리버풀을 보자. 백패스 규정의 도입은 그들이 골키퍼에게 공을 다시 돌려줬을 때,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접근을 바꿔야만 했던 것을 의미한다. (역자 주: 백패스 규정이란 선수가 동료 골키퍼에게 패스했을 때, 키퍼가 이를 손으로 잡을 수 없게 한 규정을 말한다.) - 비슷한 스타일로 경기했던 노팅엄 포레스트는 규정이 도입되고 난 후 첫 번째 시즌에 강등되었다. 늙은 브라이언 클러프는 새로운 규정에 다시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의 새로운 환경은 다른 상업적 수요와 가능성을 만들어냈으며 리버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곧 뒤떨어질 것이라는 약간의 의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힐스보로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비탄과 분노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케니 달글리시가 사임하지 않았을 것이고, 리버풀은 이러한 도전을 위해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들과 비극들은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 - 좀 더 끔찍한 경우로는 토리노의 수페르가 비극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뮌헨 비극 같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특히나 명백하고 철저한 철학을 추구하는 팀들이 내려오게 되는 것은 시대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상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의 부정적인 결말
1967년 4월까지, 에레라의 인테르는 유벤투스보다 승점 4점을 앞서 있었으며 유러피언 컵 8강에서 레알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갑자기, 흐트러져버렸다. 4강에서 CSKA 소피아와 두 번 모두 1-1로 비기면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했다. - 인테르는 입장료의 3/4를 공유할 것을 약속하며 볼로냐에서 플레이오프 경기를 열었다. 그들은 1-0으로 경기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안해보였다. 그들은 수비적인 접근에 대해 의심했고, 상대팀의 체력을 최소화하는데 집중하는 그들의 철학이 갑자기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라치오와 칼리아리를 상대로 비겼으며, 유벤투스에게 1-0으로 패했다. 이어진 경기에서도 나폴리와 비겼고, 유베는 만토바에서 경기를 치렀다. 홈에서도 피오렌티나와 비겼고 유베는 비첸자를 쓰러트리며 차이를 줄였다. 시즌 2경기가 남아있을 때 - 리스본에서 열린 셀틱과의 유러피언 컵 결승과 만토바와의 마지막 리그 경기- 그들은 두 번의 승리로 더블을 기록하려 했다. 이러한 부담감은 그들을 상대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에레라를 노린다는 것에 대해 보드진의 불안감이 오갔으며, 산드로 마졸라가 한바탕 독감을 치르고 나더니 루이스 수아레즈가 허벅지 부상을 당했다. 가족과 집중력을 분산시킬만한 것들로부터 인테르 선수들을 떨어트린 후 그들을 몰아넣으면서 점점 악화되었다. "압박감은 단지 높게 유지만하면 됩니다; 공간이 없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라이트-백 타르치시오 부르니크가 말했다. "저는 확실히 우리가 큰 부분에서 무너진 채 경기했다고 생각합니다. 리그와 결승전 모두에서요."
리스본에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인테르는 도시로부터 30분정도 떨어져있는 해안 호텔에서 결승전을 준비했다. "우리 버스가 호텔문을 통과한 그 순간부터 3일간 경기장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코치들과 호텔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르니크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환경에서 미쳐버렸을 것입니다. 수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어느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어깨에 세계의 무게를 짊어졌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어떠한 발산 수단도 없었습니다. 잘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만약 밤에 세 시간 정도 잘 수 있었다면 운이 좋은 것이었죠. 우린 모두 셀틱 선수들과 경기할 것에 대해 강박감을 가졌습니다. 지아친토 파케티와 저는 늦은 밤까지 깨어있었으며 옆방에서 주장이었던 피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긴장에 토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사실, 네 명의 선수들은 경기날 아침에 토했으며 다른 4명은 경기장에 서기 전까지 드레싱 룸에 있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었죠."
결승전에서 셀틱의 계속되는 공격에 인테르는 탈진하고 말았다. 육체적인 것만큼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그리하였다. 인테르는 초반 페널티킥으로 리드를 잡았으나 2-1로 패하고 말았다. 리그 시즌의 마지막 날엔 유벤투스는 라치오를 쓰러트렸다. 인테르의 골키퍼 지울리아노 사르티는 전 인테르 공격수였던 디 지아코모에게 하나의 슛을 허용했고 이것이 몸 아래로 미끄러져 골을 기록하고 말았다: 만토바는 인테르를 1-0으로 이겼으며, 인테르는 스쿠데토를 얻지 못했다. 결국, 그들을 만들었던 집중력과 절제력이 그들을 압도하고 말았다.
썩어가는 열매, 시들어가는 꽃
셀틱은 토탈 어택이 토탈 디펜스를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는 아약스의 토털 풋볼을 이끌어내게 한 선두자의 역할을 했다. 아마도 공격이 경기를 주도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1972년, 1973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볼 수 있다 - 아약스는 카테나치오를 신봉하는 이탈리아 클럽들(인터밀란, 유벤투스)을 상대로 결승전에서 두 번 모두 승리를 얻어냈다. 공을 소유하면서 수비 능력도 완벽하게 보여줬다. - 그 때의 아약스는 리누스 미헬스가 했던 것보다 좀 더 여유로운 축구를 구사했다.
아약스는 1966-67 유러피언 컵 8강전에서 스파르타 프라하에게 패배를 당하고, 감독 미헬스는 그의 수비를 리빌딩하기로 한다. 전투적인 리베로 벨리보르 바소비치를 파르티잔으로부터 데려왔다. 바소비치는 아약스에서 "단단함, 절제력, 위닝 멘탈리티"를 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31살에 천식으로 인해 1971년 유러피언 컵에서 주장으로 활약한 이후로 은퇴한다 - 동시에 미헬스는 바르셀로나로 떠나게 된다.
바소비치의 자리는 좀 더 공격 지향적인 수비수 호르스트 블란켄부르크가 대체하게 된다. 미헬스의 자리는 루마니아 감독인 스테판 코바치가 이어 받았다. 아약스는 코바치의 부임한 첫 번째, 두 번째 시즌에 그들만의 최고 -또는 적어도 제일 공격적- 의 축구를 만들어냈다. "코바치는 좋은 감독이었습니다." 아약스 미드필더 게리 뮈렌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친절합니다. 미헬스는 좀 더 프로페셔널했죠. 미헬스는 매우 엄격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같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코바치와 함께한 첫 시즌, 우리는 자유로워진 좋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좀 더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규율이 없어진 이후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때와 같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계속 함께 했었다면 유럽 챔피언의 자리를 이어나갔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테르가 너무 억압되어있었던 반면에, 아약스는 너무 자유로웠다: 열매는 즙이 많아지고 달아진다. 또 꽃들은 점점 향기로워진다. 그것이 썩고 시들기 전에는 말이다. 감독의 일은 가능한 과일이 좀 더 오래 성숙해지도록, 꽃이 좀 더 오래필 수 있도록 태양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는 것이다.
깜 누의 오이디푸스
펩 과르디올라에 대해 흥미로운 것은 그가 구트만의 3년차 법칙의 위험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시즌은 그리스의 비극처럼 되어버렸다 -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영웅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12 몽키즈에서 그의 운명을 피하려고 시도를 했던 제임스 콜(브루스 윌리스) 같았다. 과르디올라는 공격의 다양성을 위해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영입했었다. 그러나 그를 없애도록 강요받았다. 이브라히모비치의 성격이 스쿼드를 불안정하게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결과를 얻는 것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됐다.
(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의 비극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말한다. 양부모 밑에 살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하지만 결국엔 친아버지를 죽인 후 친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만다. 즉, 저자는 운명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를 과르디올라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쓰리백을 실험하였다. 지난 12월, 베르나베우에서 3-1로 이겼던 경기에서 실험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과르디올라는 그의 운명을 피하려 했던 수단을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는 바르싸의 상대팀이 경기할 때 깊게 내려있는 것에 대해, 그의 팀이 예측 가능해지게 되는 플레이를 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다. 따라서 그는 선수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좀 더 창안하게 됐다. 특별히 다니 알베스를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피치에서 좀 더 높게 포진시켰다. 그러나 했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바르싸를 더 예상 가능하게 만들었다: 깊게 내려가 있는 선수보다 높은 곳에 포진한 선수를 마크하기 더 쉬워졌다.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경기가 종료까지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만이 바르싸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비라인을 통해 왜 갑자기 속도를 낼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모두가 이미 박스 근처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 그들이 공을 쫓아갈 때 이미 그들은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마지막을 고려하고 있는 과르디올라가 운명론적 이상주의를 잡을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팀이 역대 바르싸 중에서 가장 바르싸적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특히나 그의 바르싸가 소멸에 직면했을 그 순간에 말이다. 하지만 수비수를 좀 더 줄이면서 경기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남을 도와주는 것이 되어버렸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에서 도망치려 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하나 알아야할 것은 어린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원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욕구 때문이 아니라 자아를 가져온 "전적인 우연"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의 바르싸를 시들게하는 것보다, 그들의 철학에 대한 전망에 직면하는 것보다, 우연한 사건의 개입으로 위험하게 하는 것보다, 과르디올라는 엔트로피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늦추길 추구했다. 그가 바르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을 더 크게 만들고, 점유율을 유지하며, 더 많은 선수들을 앞으로 보냈다. 그것은 실패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임기 내에 끝난 실패였다.
노팅엄 포레스트가 1980년 마드리드에서 함부르크를 이기며 유러피언컵을 지킨 영광스러운 그 순간, 파멸의 씨앗은 이미 처음부터 자라나고 있다는 위대한 진실을 우리는 봤다. 영광은 종말의 시작으로부터 온다.
- Jonathan Wilson
번역: 으아, 문어 괴물이다
http://www.guardian.co.uk/sport/blog/2012/may/02/the-question-great-teams-end
첫댓글 어후 조나단 윌슨 ㅋㅋ 필 볼 아자씨 글 읽고 싶게 만든다
번역감사합니다~잘읽을께요~~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헐 ㄷㄷㄷㄷ 정독 했네요 진짜 한편의 소설 같은 칼럼임 ㄷㄷㄷㄷ
글도 좋지만 번역이 정말 엄청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댓글 부탁드려요 ㅠㅠ 이글 스크랩이
안되네요 . 글 잘읽었습니다 ^^
댓글이요~ 감사합니다^^
조나단 윌슨이네요..역시 ㄷㄷㄷㄷㄷㄷ 박지성 선수를 극찬했던 기자이기도 한 조나단 윌슨
이야...진짜 멋있는 글이네요ㅠㅠ
다 읽었는데 정말 좋은글이네요..
시인인가 표현이 쩌네;;
와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정말잘읽습니다ㅠㅠ감사해요ㅠ
번역 정말 수고하셨네요
이런게 칼럼이지..
글을 되게 장엄하고 비장하게 쓰시네 ㅋ
으미~ 이정도 글을 이렇게 까지 번역하시다니 번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