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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대 현종실록
1.불륜의 씨앗 왕순의 파란만장한 삶과 즉위과정
경종 이후 고려왕실은 왕위를 승계할 왕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경종은 죽을 당시에 아들이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젖먹이었기 때문에 사촌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런데 성종은 딸 둘만 얻었을 뿐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별수없이 경종의 아들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목종은 단 한 명의 자식도 얻지 못했다.
왕족 중에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안종 왕욱(王郁)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와의
불륜관계에서 얻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승계할 왕자가 없는 상황이 되자 불륜의 싸앗인 왕순에게 시
선이 집중되었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왕욱(王旭)의 딸이며, 아버지 안종 왕욱(王郁)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안종은 헌정왕후의 삼촌이 된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성종과 남매지간이
기도 했다.
헌정왕후는 경종과 사별한 뒤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 왕욱(王郁)의 집
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왕래하였고, 마침내 서로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아이를 잉태했다.
이 사실은 한동안 집안에서 비밀로 부쳐지다가 마침내 성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성종은 헌정왕후의 잉태사실을
확인한 후 즉기 왕욱(王郁)을 귀양보냈다.
왕욱이 귀양지로 떠나던 992년 7월 임진일 헌정왕후는 비로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산욕으로 죽었다.이렇
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왕순이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순은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사촌동생이었다. 성종은 왕순을 불쌍하게 생
각하고 유모를 선택하여 궁중에서 그를 길렀다.
유모는 아이에게 항상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날 성종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
르며 무릎 위로 기어올라왔다. 그 광경을 보고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왕순이 두 살 때 일이다. 이후 순은 귀양지에 있는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996년 왕욱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순은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다섯 살에 고아 신세가 된 순은 이듬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해에 성종이 죽고 목종이 들어서면서 왕
순은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모후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왕권은 일순간에 그녀의 손에 넘어간다. 왕권을 장악한 그
녀는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는, 목종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
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러자니 자연히 유일하게 왕위계승권을 가진 동생의 아들 왕순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순은 당시 이미 대량원군에 봉해져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목종이 1003년에 그를 대량원군에 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종이 자식 없이 죽는다면 그가 왕위를 이을 것은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를 노리고 있던 헌애왕후는 억지로 왕순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신혈사의 노승이 방 안에 굴을 파
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책으로 그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목종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 때문에 헌애왕후는 왕순을 죽이기에 더욱 혈안이 되었다. 자객을 보내
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심복을 시켜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
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기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목종은 이에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로 있던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주며 한
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그를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
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그러나 강조가 왕명을 받고 개경으로 향하던 도중,당시 고려 조정에 깊은 원한
을 품고 있던 내사주서 위종정과 안북도호 장서기 최창이라는 인물이 강조를 찾아와 강조에게 목종은 이미 죽었고 천
추태후와 김치양이 정권을 장악했다는 거짓말을 하여,다시 서경으로 돌아간만 못하고 해서 본진으로 돌아왔으나, 강조
의 아버지는 왕이 이미 죽었다는 개경성안의 헛소문을 믿고 강조에게 서찰을 보내 “역적이 날뛰니 빨리 와서 사직을
보존하라”고 했다. 이에 강조는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평산에 이르러서는 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는 머뭇
거리나 부하장수들의 주장에 개경으로 진입하여 궁궐을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강조는 거부했
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낮추고, 대량원군 왕순을 데려와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고려 제8대 왕 현
종(顯宗)이다.
2.수난을 먹고 자란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992년-1031년, 재위기간 : 1009년 2월 – 1031년 5월, 22년 3개월)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을 떠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
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王郁)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
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
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
이 18세였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교방(敎坊, 음악을 가르치던 곳)을 혁파하고 목종 대에 늘어난 궁녀 백여 명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유윤부를 문하시중으로 삼고, 유방헌을 평장사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참지정사;중서문하성의 종2품 관직)
로, 진적을 형부상서 참지정사로, 류진과 왕동영을 상서 좌우복야로,최항과 김심언을 좌우산기상시로(산기상시:중서문하
성의 정3품 간관(諫官)),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이부시랑: 상서이부의 버금벼슬 정4품, 간의대부:정4품 간관,
겸직),김려를 병부상서로(상서성의 정3품관직). 문인위를 공부상서(정3품)로 각각 임명하여 조정을 일신하였으며, 연등회
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민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현종은 즉위초부터 전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삼아 고려를 침략했기 때
문이다.
여진족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거란은 1010년 7월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률윤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이에 따라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 폐립 사건의 양해를 구했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과 고려 양국간에 전쟁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병력 30만으로 하여금 통주( 강
동 6주의 하나 지금 평북 선천)에 주둔하며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서희의 외교적 담판으로 고려가 강동 6주를 얻은 후, 고려는 압록강 일대로부터 서경, 개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탄
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 거란 송 여진의 물건들이 거래되는 무역의 요충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거란은 뒤늦게 강동 6주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시 빼앗아 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중, 고려의 강조라는 신하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왕위에 올린 것을 꼬투리 잡았다. 거란은 자기가 인정한 왕을 죽인 강조와 새로
운 왕인 현종을 벌주겠다는 이유로, 그해 10월 마침내 거란왕은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로 진군했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은 먼저 흥화진을 포위하고 도순검사 양규(楊規)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하면서 목종을 죽
인 강조를 거란에 압송하면 회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
투가 벌어졌다.
거란은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의주 지역은 유속이 느려 퇴적
된 물의 톱(물속에 쌓인 흙과 모래 등이 퇴적된 지역)이 많아 강을 건너는 요충지였다. 40만 대군 중 20만은
인주(麟州,평북의주에 있는 고을) 남쪽 무로대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이 통주로 밀려들었다. 이에 통주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가 병력을 이끌고 응전하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군에 의해 죽었다. 거란군은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하였고,
이때부터 양국간에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반격을 개시했지만 역부족으로 한 달 만에 곽주와 서경을 내주고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궐을 소각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 이 때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다가, 거란군이 남하해옴에 따라 장곡(경기 시흥)과 인의(전북 태인)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은 다음
남해안의 나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입성 7일만에 개경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점차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고려군과의 전면전에서 병사
들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양규와 김숙흥이 이끌던 천여 명의 병력과 7차에 걸친 싸움 끝에
수만의 군사를 잃은 상황이었다. 애석하게도 전투중에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하였지만 그들의 끈질긴 게릴라식 공략으
로 거란군은 더 이상 고려에 머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거란군이 퇴각하자 현종은 전주,공주 등을 거쳐 2월 중순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왕성에 도착한 현종은 백관을 다시 세
우고, 전란중에 공을 세운 자를 포상하고 거란에게 협조한 자를 징계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특
별히 관직을 추증하는 등 전후수습책을 마련하였다.또한 전란중에 소실된 궁성을 복구하고 서경의 황성(평양성)과 송악
성을 중수하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고려는 또 한 번 전운에 휩싸였다. 동여진의 군대가 전함 백여 척을 이끌고 경주
를 급습한 것이다. 하지만 전란에 익숙해 있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여진은 곧 퇴각하였으며, 고려는 여진을 압박
하며 침략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012년 3월에도 동여진 군대가 경상도 일대를 침략하였지만 문연, 강
민첨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처럼 거란, 동여진 등의 주변국과의 잇따른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는 국방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한편으
론 전쟁에 따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거란과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란왕은 고려왕이 직접 거란을 예방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강동의 6개성을 탈취하
라고 명령했다. 이에 고려는 몇 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왕을 달래며 현종이 와병중이라서 거란에 입조하지 못
한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1013년 5월에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이후에도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고려 침략을 감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소손녕의 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이 다시 침략을 감행했다(제3차 침입 당시 거란군이 이끈 장수에 대해
<고려사>에는 소손녕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원나라 때 편찬된 요나라 역사에는 소배압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
려사>의 기록을 오기로 보고 <요사>의 내용을 취했다).
거란의 대군이 밀려올 것을 예상한 고려는 20만 병력을 조성하여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
로 임명하여 거란군을 대적케 하였다.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의 접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였
다. 하지만 거란군 일부가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강민첨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하지만 소배압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어느덧 개경 백 리 밖에까지 진주해오자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부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
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구주에서 거의 몰상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초하
룻날 벌어진 이 전투가 유명한 구주(龜州)대첩이다.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나성) 거란군에 의해 훼손된 강
동 6성과 각 지방의 성곽을 정비하여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를 활성화하여 왕
권을 강화하였으며, 인재를 우대하고 문인을 양성하여 국가의 제목들을 길렀다.
한편 거란왕은 전쟁에서 대패한 소배압을 징계하고, 1019년 5월에 동경 문적 원소감 오장공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제의해 왔다. 또한 동여진 추장 나사불도 같은 해 6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으며, 서여진의 추
장 아라불도 7월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말을 바침며 화의를 다짐했다. 그리고 9월 고려는 탐라,흑수말갈 등의 소
수 민족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위용을 과시하며 변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후 국내외적으로 위상이 한껏 높아졌으며, 그에 따라 고려사회도 빠른 속
도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중에 소실된 문화재와 서적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전란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으로 하여금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중수
하게 하고,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에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며, 또한 이때 편찬된 대장
경이 후에 원나라 침입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이 같은 현종대의 국력 강화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1200년대)까지 거란, 여진 등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현종은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
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현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말아여 하며,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
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천도를 만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
구나.’
현종의 능은 송악산 기슭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이다.
첫댓글 다시한번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복습 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학창시절엔 선생님의 설명에는 귀기울이지 않았죠
고려 태조 왕건 부터 그후로 왕위를 계승한 분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들 잘 읽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춘추관의 화재로 소실만 안되었어도 넘 아쉽네요
그래도 역사에 길이 남을 고려왕조실록 ㅡ
대단하신 추일슬풍 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댓글을 리즈향님이
먼저 달아 주었네요 감사해요~ㅎ
내일은 열무 물김치를 담는 날.
오늘 바빴습니다.
150가구 나눔할거 담아야 합니다
@보쳉 와 ㅡㅡㅡㅡㅡ150가구의 열무김치를 담글려면
힘드시겠어요
보쳉언니의 봉사가 아름답네요
복 받으실거에요
맛은 이미 보장 되있을거구요^^*
이렇게 글을 읽다보니
참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현종이 왕으로 제위하던 시절엔
고려의 인구수가 얼마나 되는줄은
모르겠지만 전쟁시에 동원된
군인의 숫자가 30~40만 이라니
상상이 안갑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인구수에 국군이
60만 대군인데요
고려시절에 군인 숫자는
상상초월입니다 식량과 무기를
어떻게 보급했을지 ...~
대단합니다.
그쵸
상상을 초월 하는 숫자
30만 여명이 넘는다니 예로 부터
철벽방어 였네요 ㅎ
@리즈향
잠 안자고 모해요~~ㅎ
천둥이 치고 비가 요란스럽게
내리는 밤. 맴이 싱숭거려요
오늘 할 일도 많은데 비도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실외하고 실내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걱정임댜 ~^^
@보쳉 이제 자려구요
오늘 산행이 있어서 준비좀 하느라고 ㅎ
은근히 손이 가네요
보쳉언니
참 잼나는 분 이세용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