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동복 파비(破碑)
화순 동복 독상리 석등 앞 비석군의 관찰사 이호준 철비와 함께 있는 철비로 상단부가 파손 유실되었으며 하단에는 “世不忘碑(세불망비)”란 비문만 남아있다. 4단의 층을 이룬 비좌 위에 설치되어 있다.
최근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완용과 관련된 비라고 설명되어 있으나, 그 근거는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비문만으로는 누군가의 영세불망비란 내용 외에는 알 수가 없으나, 조선중기의 문신인 안절(安節)의 기록을 보면 청백리였으며, 동복현감으로 재임시 선행을 베풀었고, 동복에 철비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보면, 동복의 파비(破碑)가 “현감안절영세불망비”가 아닌가 추정해 볼 뿐이다.
다음은 안절(安節)에 대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한국학중앙연구원)과 순흥(順興)안씨 족보의 내용이다.
『1575(선조 8)∼1653(효종 4)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자승(子承).안숭효(安崇孝)의 5세손이며, 현감(縣監) 안극인(安克仁)의 아들이다.
함평(咸平)에서 거주하다가 내종형인 정홍익(鄭弘翼)과 더불어 묘향산 절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일찍 음사(蔭仕)하여 1623년에 희릉참봉(僖陵參奉)과 1627년에 예빈별좌(禮賓別坐)를 역임하고 1630년에 종부직장(宗簿直長)에 추천되고 1632년 조봉대부(朝奉大夫)공조좌랑(工曹佐郞)이되었고,1633년 중훈대부사담시주부(中訓大夫司贍寺主簿)가 되고 1635년 통훈대부(通訓大夫) 동복(同福) 현감(縣監)이 되었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관용과 위엄을 함께 하고 덕행으로 감화시켜 선정을 베풀었다.
관직을 물러나 돌아올 즈음에 이민(吏民)들이 길을 가로막고 뒤따라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러한 소문이 알려져 다시 목천현감을 제수받았는데 치적이 더욱 훌륭하였다.청백으로 알려지고 동복에 철비가 있다.』
동복지(同福誌) 권1의 관안(官案 : 수령 및 현감의 이취임식 때의 명단)에 의하면 ‘안절(安節)은 갑술(甲戌 : 1634)년 3월에 부임하여 병자(丙子 : 1636)년 8월에 사직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 화순 동복 독상리 석등 앞 비석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