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곡식을 추수하시듯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의 심판의 대상은 인간이 살아온 삶이다(제2독서).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 것으로 평화와 안정을 누리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주님 안에 있어,
주님께서 숨 한 번 거두어 가시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복음)
잘 사는 것과 ‘잘 못 사는 것’의 구분은 어렵습니다.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삶이 될지는 몰라도, ‘잘 사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대개는 잘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 ‘잘 사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재물을 모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육체는 할 일이 많았지만, 영혼은 억눌려 지내야 했습니다.
‘영과 육의 균형’이 맞을 리 없습니다. 결과는 불안과 허무입니다.
영혼이 보내는 ‘목마름’의 신호인 것이지요.
잘 사는 삶이란 ‘감사드리는 삶’입니다.
감사의 시각으로 보면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축복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불평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잘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이’와 비교해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잘생긴 용모인데도, ‘어느 누구’와 비교해 못생겼다고 판단합니다.
상대적 빈곤감입니다.
비교함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지는 모습입니다.
감사드리는 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극복됩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은 추석 명절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감사드리게 했습니다.
감사만이 하늘의 기운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공은 추석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누렇게 익은 들녘 풍작을 보니
모든 것이 새로 나고 맛난 것들일세.
다만 원컨대, 한 해 먹을 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과 같은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에는 모든 것이 풍족하여 더 바랄 게 없다는 말입니다.
추석을 맞아 하느님의 안배하심과 조상의 음덕,
그리고 농부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추석이 가족애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외롭게 명절을 보내는
이웃을 돌아보는 훈훈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특히 힘들고 어려우면 어머니가 더 그립다.
우리는 고향을 그리워한다.
특히 외롭고 쓸쓸하면 고향이 더 그립다.
어머니와 고향은 우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석이 되면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본향은 하느님이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본향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그네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한하신 하느님이어야 한다.
그분께로 가기 위해서는 유한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무한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석은 유한한 생명을 살다간 조상들을 기억하며
무한한 생명을 희망하는 날이다.
또 무한한 생명을 위해 무한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이요,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향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