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두고 ‘농가 소득 절벽법’ 혹은 ‘농업 방해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권과 언론이다. 이들은 김영란법 시행(9월 28일)을 앞두고 “농가의 시름” 운운하며,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매일경제는 5월 10일 “농업계에서는 김영란법으로 인해, 축산업과 과일 산업이 뿌리째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5월 12일 ‘한 농민 단체 간부’의 이야기라며 “김영란법이 좋은 취지라고는 해도 사회적 약자인 농어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 5월 10일자 기사.
김영란법 앞에서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 중앙지도 지역지도 없다. 거의 모든 기존언론이 한 목소리로 “농축수산 농가를 우려한다”면서 이 법의 시행에 딴지를 걸고 있다.
정치권도 장단을 맞추고 있다. 새누리당, 민주당, 국민의당 소속 국회의원 13명은 6월 29일 국내산 농축수산물과 그 가공품을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7월 1일에는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이 “명절 등 특정 기간에는 농축수산물과 그 가공품을 수수금지 품목에서 제외하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걸핏하면 여야-좌우로 갈라져 대립해온 우리 정치권이 ‘김영란법’ 앞에서는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정치권과 언론은, 자기들의 주장처럼 “농가의 피해를 줄이고자” 고군분투 노력하는 것일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가톨릭농민회(가농) 등 농민단체의 시선은 이들의 입바른 주장과 다르다. 이들 농민단체는 “농어민의 어려움을 방패막이 삼아 김영란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일체의 행동을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6월 29일 내놨다.
어떻게 된 일일까? 7월 1일 김영호 전농 의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영호 전농 의장 “정치권과 언론은 사기치지 말라”
김영호(59) 의장은 “정치권과 언론이 농민을 팔아 김영란법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란법 때문에 농가가 몰락할 거라는 그들의 얘기는 거짓말이고 사기”라면서 “이미 농촌은 몰락할 대로 몰락했다. 김영란법 때문에 망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9월 28일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공직자, 언론인 등은 직무와 관련된 사람으로부터 5만원 이상의 선물을 받아선 안된다. 이를 두고, 정치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단골 명절 선물세트인 한우, 과일, 굴비 가격은 5만원이 넘는다”면서 농가 소득을 걱정하는 척 했다.
김영호 의장은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물론 일부에서는 손해를 보는 농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5만원 넘는 소고기를 선물하지 못한다 해서 한국농업이 망하거나 흥하는데 큰 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김 의장은 “큰 그림으로 봤을 때, 김영란법은 우리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 할 법이지 않나”라며 “이를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손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과 언론이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꼼수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정치인, 특히 새누리당은 농어촌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영란법을 반대하는 데 농민들을 이용하고 있다. 농어민들이 왜 이렇게 궁지에 몰렸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개선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농민들을 끌어다 붙이는 건 정치권의 정신분열에 가깝다.”
“김영란법 반대에 농민을 이용하고 있다”
김 의장이 말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때부터 시작된 개방농업 정책을 일컫는다. 그는 “국가의 개방농업 정책 때문에 농촌은 항상 양보해야 했다”면서 “휴대폰, 자동차를 해외에 파는 대신, 다른 나라의 농수산물을 수입해 농어민의 삶을 궁지로 몰았다”고 했다. “이런 문제는 등한시한 채 마치 김영란법 때문에 농가가 몰락할 것처럼 정치권이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농촌지역의 열악한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쌀값은 연일 하락하고, 농촌의 고령화가 심각해지면서 농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김 의장은 “쌀값은 20년 전하고 똑같다”면서 “재고량이 많으니까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현재 170만톤의 재고가 있는데도, 정부는 얼마 전 2만5000톤의 쌀을 또 수입하기로 했다”면서 “정책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쌀값은 계속 떨어질 거고, 농가의 시름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농촌지역의 평균연령이 얼마인지 아나? 70세다. 농촌에 꿈과 희망이 없으니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지금의 농촌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물고기를 살게 하려면, 물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 물은 국가와 사회가 함께 받쳐줘야 차오를 수 있다.”
그는 “정치인들은 김영란법에 농민을 악용하지 말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했다.
“농민 위하는 척… 거짓말 좀 그만하라”
여야 정치인들이 ‘농축수산물에는 김영란법을 적용하지 말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한 것에 대해 김 의장은 “농업을 생각하는 척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가 바르게 되자고 하는 건데, 우리(농민)만 빼고 가자는 것은 안된다”면서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다 빼달라고 할 텐데, 그러면 법의 취지가 무의미해진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부패세력들이 농민들을 이용해 김영란법을 막으려 하는 것”이라면서 “정치권과 언론은 농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