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짐승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을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문장』 7호, 1939.8)
[작품소개]
이 시는 일체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고 싶어 하는 도교적 사상이 간접적으로 표출된 작품으로 ‘난이와 나’라는 순수한 인간의 전형을 ‘작은 짐승’으로 표현하여 근원적인 평화와 절대 순수의 세계를 동경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시절이다. 그러므로 전 시행을 ‘-었(았)다’라는 과거 시제로 씀으로써 시인이 그리워 하고 있는 어린 시절과, 시인이 현재 처해 있는 현실상황과를 대비시켜 그 동경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키고 있다. 곧 지금의 현실은 ‘난이와 나’ 누리던 평화와 행복이 모두 사라진 고통의 시대요, 따라서 ‘난이와 나’는 더 이상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모진 세파 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영혼이 세속에 물들어 버렸음에 가슴을 아파하며 높은 산 언덕 느티나무 아래서 티끌 하나 없는 순진무구함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던 옛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어 다시 한 번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 바로 그것은 현대인 누구나 꿈꾸는 보수적 향수가 아닐는지, 또한 신석정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 순수한 아름다운 세계는 그가 일제치하에서 줄기차게 추구하던 이상향으로 그것은 다름 아닌 해방된 조국이 아닐까?
[작가소개]
신석정[ 辛夕汀 ]
<요약>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명 : 신석정(辛錫正)
출생 – 사망 : 1907. 7. 7. ~ 1974. 7. 6.
출생지 : 국내 전라북도 부안
호 : 석정(夕汀), 석지영(石志永), 호성(胡星), 소적(蘇笛), 서촌(曙村)
데뷔 : 1931.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 태생. 보통학교 졸업 후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한국문학상, 문화포상, 한국예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 7월 6일 사망하였다. 1931년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1939년 첫번째 시집인 『촛불』에서는 하늘, 어머니, 먼 나라로 표상되는 동경의 나라를 향한 희구를 어린이의 천진스러운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전원시인,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집에는 대표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47년 두번째 시집인 『슬픈 목가』에서는 어머니라는 상징어에 기댄 유아적, 퇴영적 자아의 모습은 줄어들고 성숙한 현실의 눈으로 돌아온다. 이상향에 대한 천진난만한 시인의 희구는 상실감으로 바뀌고, 내적 체험의 결여로 인한 공허감이 나타난다. 그후 『빙하』(1956), 『산의 서곡』(1967)에 이르면서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역사 의식이 예각화되면서 주제 의식이 문학적 심미성에 선행하게 된다.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 소리』(1970)에서 다시 초기 서정시의 세계로 복귀하고 있다. 신석정은 노장의 철학과 도연명의 「귀거래사」, 「도화원기」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의 삼림시인인 소로우(H. D. Thoreau)를 좋아했으며, 한용운에게서 문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반속적(反俗的)이며 자연성을 고조한 동양적 낭만주의에 입각한 시를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雜踏)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신석정의 시는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체험의 가능성이 폐쇄된 시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문학적 단면을 보여준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로써 초월적이고 본원적인 실재에 대한 강한 희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구는 전원적, 자연친화적 이상향에 대한 시적 열망으로 그려진다.
-학력사항 : 보통학교
중앙불교전문강원
-경력사항 :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
-수상내역 : 한국문학상, 문화포상, 한국예술문학상
-작품목록 : 촛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슬픈 목가, 촛불[개정판] ,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
난초잎에 어룸이 내리면, 꽃덤불
[네이버 지식백과] 신석정 [辛夕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