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서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
박미정
숲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춘다. 초록 잎 사이로 자줏빛 작은 꽃 몇 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손톱보다 작은 꽃잎, 실처럼 가느다란 수술 끝에 맺힌 하얀 점들이 유난히 곱다. 끈끈이장구채다. 이름은 조금 투박하지만 꽃은 뜻밖에 여리고 섬세하다.
꽃은 크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꽃 앞에서는 사람이 몸을 낮추게 된다. 허리를 숙이고 눈을 가까이 가져가야 비로소 보이는 세계가 있다. 꽃잎의 결이 보이고, 가느다란 수술이 보이고, 그 작은 몸으로 햇살을 받아내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는 그렇게 몸을 낮춰야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끈끈이장구채는 산지의 양지바른 바위틈에서 살아간다. 넉넉한 흙도, 편안한 자리도 아닌 곳에서 뿌리를 내린다. 바위 사이에 몸을 붙이고 비를 견디고 바람을 건너며 제 계절이 오면 작은 꽃을 피운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살아 있으므로 꽃을 피운다.
그 모습 앞에서 문득 사람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도 살아가며 크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것, 더 눈에 띄는 삶을 바라보느라 이미 곁에 와 있는 작은 행복을 놓칠 때가 많다. 따뜻한 차 한 잔, 오래된 친구의 안부, 창문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꽃 한 송이.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런 사소한 것들인지 모른다.
작은 꽃 몇 송이가 초록 속에서 환하다. 서로 기대어 핀 모습은 작은 별들이 모여 있는 듯하다. 한 송이였다면 놓쳤을 빛이 여럿이 함께하니 제법 또렷하다. 꽃도 사람도 혼자일 때보다 곁을 내어 줄 때 더 따뜻해지는 모양이다. 크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가까이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순간이 있다. 더욱 마음이 머무는 것은 이 작은 꽃이 귀한 야생식물이라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을 우리 산야에서 견뎌 왔지만 이제는 보호받아야 할 만큼 만나기 어려워졌다. 한때 흔했던 것이 어느 날 귀한 것이 되는 일을 우리는 자주 겪는다. 자연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늘 곁에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들은 사라지고 나서야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 알게 한다.
그래서 꽃 앞에서는 소유보다 바라봄을 배운다. 아름답다고 꺾어 손에 쥐는 순간 꽃의 시간은 짧아진다. 제자리에 두고 돌아서야 내년에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까이 두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 존재가 살아갈 자리를 지켜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간다. 작은 꽃이 화면 가득 들어온다. 맨눈으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잎의 주름과 하얀 수술까지 선명하다. 작은 세계가 갑자기 커진다. 꽃이 커진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바라본 것이다. 관심은 그렇게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작다는 이유로 지나쳐 왔을까. 작은 목소리, 작은 친절, 작은 약속, 작은 생명. 그러나 삶을 돌아보면 오래 남는 것은 의외로 거창한 사건보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다. 누군가 건넨 짧은 말 한마디가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하고, 스쳐 간 미소 하나가 오랫동안 마음을 데우기도 한다.
숲을 빠져나오기 전 다시 뒤돌아본다. 끈끈이장구채 다섯 송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피어 있다. 내가 오기 전에도 피어 있었고 내가 떠난 뒤에도 바람을 맞으며 흔들릴 것이다. 그 작은 꽃 앞에서 오늘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세상이 자꾸 큰 것을 바라보라고 재촉할 때, 나는 작은 꽃 한 송이를 기억하고 싶다. 몸을 낮추어야 보이는 것, 오래 바라보아야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것, 곁에 그대로 두어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 어쩌면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작은 것까지 마음에 담아 보았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첫댓글 난 왜 이런 감성적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난 아직 길에 꽃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에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산다. 사무실에 화분 몇개를 가져왔다. 마지막 축제 기간이라 덤핑으로 떠넘기는 것을 받아 왔는데 자꾸 죽어간다. 물을 너무 줘서 죽이고 덜 줘서 말라 죽이고.......꽃 한송이에 삶의 지혜까지 읊는 선생님의 혜안에 그저 박수만 보낸다.
유당 선생님의 수필은 나름의 매력이
넘치지요. 과찬을 들으니 몸 둘바를
모르겠나이다. 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