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까이 사는 사람 2022.7.15. 197호(2022.7.20.)
제주 4.3기행
제주 4.3기행은 14년전 처음했고 지금까지 최소 3회는 했다. 나는 제주라는 말을 들으면 성산일출봉보다 4.3이 먼저 떠오르는 우울한 사람이다.
7. 감태가 만든 부유한 어촌
1947년 미군정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서 학력이 가장 높은 지역은 북제주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해조류 일종인 감태 때문이었다. 감태에는 요오드 성분이 있어서 상처에 바르는 약품으로 사용했지만 전쟁이 나면서 폭탄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주에 감태 공장을 지었다.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요오드 1/5를 제주도에서 구했다. 제주 해녀들은 감태를 따서 팔았다. 원래 해녀들은 미역을 캐는게 주업이었는데 감태가 돈이 되었다. 그 돈으로 해녀 자녀들이 일본 관동지역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제주 젊은이 1/5이 유학을 갔다고 한다. 감태 판 돈으로 까막눈 해녀 어멍을 대신해서 글을 배우고 영수증 전표를 쓰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공부를 시켰다. 그런데 해녀 자식들이 유학한 일본 대학들은 당시 사회주의 이념이 활발했던 곳이었다. 자식들은 그곳에서 사회주의 사상, 파업, 쟁의를 배워왔다.
아이들이 똑똑했다. 해방후 제주로 돌아온 그 젊은이들은 일본이 패망했으니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를 만들자며 주민들과 공부모임도 하고 집회도 했다. 영향이 컸다. 어쩌면 제주 4.3은 풍족한 감태 때문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남한 단독 선거(5.10총선)을 반대했다. 5.10총선거는 제헌국회를 구성할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대한민국 최초 선거였다.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선거는 생전 처음 듣는 기이한 제도였지만 제주도민은 선거 의미를 알고 있었다. 5.10단독선거 반대라고 말할 때 그말 의미를 알고 있었다.
단독선거는 분단을 영구히 하고 군정 연장을 합리화 합니다.
외세 개입하에서는 민주선거가 어려워요. 먼저 외국군이 철수해야 해요.
몰라서 휩쓸린 사람들이 아니다
8. 항몽 항쟁
고려 몽골 전쟁은 항몽항쟁이라고도 하는데 항몽항쟁이라는 말에도 육지중심 사고가 있다. 탐라국은 고려에 예속되었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탐라에는 성주가 있었다. 성주(星主)는 탐라국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탐라에 성주가 있었기 때문에 탐라는 고구려에 공물을 바치는 고려와 별개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일어난 여몽전쟁은 탐라인에게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삼별초가 강화도와 진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오자 제주가 전란에 휘말린다. 삼별초는 당시 탐라인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전혀. 삼별초가 진도에 갔을 때에도 진도 주인은 삼별초를 환영하지 않았다. 하물며 스스로를 독립국으로 인식하던 탐라인에게 삼별초라니, 항몽전쟁이라는 말은 육지관점이다.
9. 제주 열녀 정씨
몽골(원나라)이 제주를 지배하던 13세기부터 상당수 몽골인들이 제주에 정착했다. 국제결혼도 많았다. 제주 여성과 몽골족 혼인은 드물지 않았으며 금기시 되지도 않았다. 더불어 살았다. 교류는 일상이었다. 그중 석나리보개라는 몽골인이 있었다. 석나리보개는 제주여성 정씨와 혼인했다. 석나리보개는 목호였다. 목호(牧胡)를 문자대로 풀면 마소를 치는 오랑캐 라는 뜻이다. 목호는 말을 키우는 전문 기술자다. 원나라(몽골)가 힘이 약해지자 중친 새 주인이 된 명나라는 좋은 말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목호들은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어찌 적국인 명나라에 넘긴단 말인가? 라며 거절한다. 거절한 목호중 석나리보개가 있었다. 고려는 진압을 결정한다. 진압군 대장은 최영장군이었다.(우리가 아는 그 최영 장군)
최영은 25,600 군사를 싣고 제주에 입도하는데, 이 숫자는 당시 제주도민 전체 수와 맞먹는 병력이었다. 목호는 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목호들은 결사항전을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새별오름에서 대패한 후 고려군에 밀려 섬 남쪽으로 달아나던 목호들은 서귀포앞 범섬에서 최후 항전을 벌이다가 몰상당한다.
자! 반란군 잡으러 가자! 범섬은 둘레 2km 정도 높이 80m가량 되는 천혜 요새였지만 진압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최영은 목호무리를 샅샅이 찾아내 모두 죽였는데, 이때 제주도민 절반이 죽었다.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고 한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574년전 일어난 제주민 학살이다.
이때 석나리보개가 죽었다. 부인 정씨는 과부가 되었다. 정씨는 갖은 위협과 회유를 무릎쓰고 끝까지 수절한다. 정씨정절을 높이 사서 열녀비가 세워졌는데 아직도 그 열녀비가 있다. 정씨는 제주 최포 열녀이다.
외국인과 혼인했다가 과부가 된 한국인이 재혼하지 않음이 뭐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제주관점에서는 고려나 몽골이나 모두 육지것들이었다. 차라리 정착하고 살던 몽골인들이 더 살가운 우리(we)였을지도 모른다. 섬 사람에게 백제, 신라, 고려는 특산물을 빼앗아 가며 못살게 구는 가혹한 외세에 지나지 않았다. 1273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에게 최후공격을 했을 때 삼별초는 사흘만에 항복한다. 137년 목호의 난 때 목호들은 한 달을 버틴다. 제주도민 협력 덕분이다.
여보 우리 다음 생에서는 평화롭게, 오랫동안 삽시다!
가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