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有明) 수군도독(水軍都督) 조선국(朝鮮國) 증(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행 정헌대부(行正憲大夫)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시(諡)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신도비명(神道碑銘) - 홍재전서15권
살았을 때 거복(車服)으로 사랑을 표시하고, 잔치를 베풀어 공로를 치하하고, 그의 공로를 관현(管絃)에 올려 악으로 연주하고, 죽은 후에는 제물로 오정(五鼎)을 차리고, 자손들에게 대대로 녹을 주고, 기폭(旗幅)에도 그의 공로를 새겨 그의 빛나고 훌륭한 절의가 상하에 소명되게 했으며, 산천(山川)에도 배향하여 그로 하여금 음직(陰職)을 맡아 백성들에게 많은 복을 주도록 했던 것이 옛날 선왕(先王)들이 공신(功臣)에게 한 예우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법이 주(周) 이후로 점점 없어져 갔다. 그러나 비를 세우고 명(銘)을 하여 옛날 기폭에다 쓰던 유풍은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임금이 직접 명을 쓰는 일이다. 왕조(王朝)의 전수(篆首)로는 지덕(至德)이 있고, 원로(元老)와 서달(徐達)의 전수로는 충지무자(忠志無疵)라는 것이 있지만 몇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그러한 예우를 받은 분이 과연 몇이나 되던가.
아, 우리나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같은 이는 공로가 이 명법(銘法)에 해당한 분이다. 그래서 내(정조임금)가 그분의 명을 쓰려고 하는데, 혹시 욕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충무공의 자는 여해(汝諧)이고 덕수인(德水人)이다.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변씨의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 하는 말이, 이 애가 태어나면 틀림없이 귀히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舜臣)으로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 정(貞)이 그 말을 듣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점을 쳤더니 점괘가 좋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나이 50에 절월(節鉞)을 짚고 명장(名將)이 되었는데, 애초부터 그 이상한 조짐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기개가 뛰어나고 또 뜻이 컸었다. 자라서는 활 솜씨가 탁월하여 만력(萬曆) 병자년(1576) 무과(武科)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변지 근무를 했는데, 누차 뛰어난 전과를 올려 나라 사람들이 장재(將才)라고 일컬었다.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강력 천거하여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때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고 도발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였다. 충무공은 그것을 깊이 걱정하면서 밤낮으로 군졸 훈련과 병기 단속 등 전수(戰守)의 준비를 착실히 하고, 또 엎드린 거북 모양을 한 새로운 형태의 배를 창안하여 거북선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배를 타고 수전(水戰) 연습을 한 자들은 그 배를 몽충(蒙衝.고대 전투선의 일종)에다 비유했던 것이다.
임진년에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충무공은 그때 즉시 군대를 이끌고 옥포(玉浦)로 가서 적선 20여 척을 불태워 버리고 경상 수군절도사(慶尙水軍節度使) 원균(元均)과 노량(露梁)에서 회동하여 적을 양쪽에서 공격하고는 이어 사천(泗川)으로 가 또 1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당포(唐浦)로 진군했다가 거기에서 또 적선 20여 척과 마주쳤는데, 그 전투에서는 추장을 죽이고 적군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당항포(唐項浦)에서 합세하여 적의 추장이 탄 3층 누선(樓船)을 격파하고, 나머지 적을 다시 한산도(閑山島)로 유인하여 크고 작은 전함 70여 척을 또 격파했다. 그리고 북으로 안골포(安骨浦)까지 적을 추격하여 또 40여 척의 적선을 불태워 그로부터 군성(軍聲)이 크게 떨쳤다. 적군은 겁에 질렸으며, 대첩 소식이 들릴 때마다 곧 가계(加階)를 하여 위계가 정헌(正憲)에 이르렀다.
계사년(1593)에 조정에서 처음으로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두면서 공으로 하여금 본직을 띠고 겸임하도록 명하고 진(鎭)을 한산도로 옮겼는데, 그렇게 되자 원균이 충무공에게 절제(節制)받는 것을 수치로 여겨 자주 유언비어를 퍼뜨려 언관(言官)을 충동질했으므로, 결국 충무공은 적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받게 되고 원균이 대신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로부터 몇 달 안 가서 우리 군대가 패배를 당하고 원균은 도망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다시 충무공을 통제사로 삼았는데, 이때 충무공은 패하고 남은 몇십 기(騎)를 거느리고 순천부(順天府)로 달려가서 10여 척의 병선(兵船)을 확보하고 흩어졌던 병졸도 다시 모아 난도(蘭島)에서 적을 쳐부수고, 또 적을 벽파정(碧波亭) 아래로 끌어들여 배 30여 척을 격파하고 적장 마다시(馬多時)의 목을 베니, 적이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무술년(1598)에 명(明) 나라 장수 진린(陳璘)은 광병(廣兵)을, 유정(劉綎)은 천병(川兵)을, 등자룡(鄧子龍)은 절직병(浙直兵)을 각기 이끌고 연이어 들어왔다. 이때 충무공은 고금도(古今島)를 점거하고 진린과 합세하고 있었는데, 진린은 충무공의 재책(才策)과 기간(器幹)에 대해 마음으로 탄복하고는 군중의 모든 기밀을 다 공의 자문을 받아 결정했으며, 우리 선조(宣祖)에게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가 있고,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였고, 또 그 사실을 현황제(顯皇帝)에게도 아뢰어 공에게 도독(都督)의 인수(印綬)를 내리게도 했다. 얼마 후 일본 관백(關白)이 죽자 행장(行長)이 철병을 하려면서 곤양(昆陽)과 사천(泗川)에 있는 적들과 약속하여 그날로 노량(露梁)을 함께 진격하기로 하였다. 충무공이 명 나라 장수들과 함께 주사(舟師.노젓는 사람)를 정비하고 침략군을 완전 소멸할 다짐을 하고는 곧바로 배 위에 올라 축원하기를, “오늘은 진정 사생결단을 낼 터이니 하늘이시여. 나로 하여금 저 적들을 섬멸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는데, 축원을 마치자 하괴성(河魁星)이 떨어져 그것을 본 군중 전체가 나쁜 예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날 밤 새벽이 가까울 무렵 적을 맞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에서 아군은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계속 추격했는데, 남해(南海)에 이르자 적들이 명 나라 군대를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그것을 본 충무공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직접 진두에 서서 포위망을 뚫고 돌진을 꾀하다가 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적의 유탄에 맞아 죽고 말았는데, 공이 태어난 을사년으로 따질 때 54세가 되는 해였고, 그 이듬해에야 아들 회(薈) 등이 아산(牙山)으로 반장(返葬)했던 것이다. 갑진년에 책훈(策勳)을 하면서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로 했으며, 전쟁 유적지에는 사우(祠宇)를 세워 지금까지 제사를 올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공로를 충분히 보답했다고야 하겠는가.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 인재가 배출되기는 목릉(穆陵.선조) 시절이 최고였다고 하고, 또 중국에서 응원군으로 뽑아 보낸 장수들도 다 그 한때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지만, 물고기가 뛰고 새우가 튀어 바닷물이 뒤집힐 때는 90리쯤 도망가서 이럴까저럴까 망설이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8년 동안을 싸웠다 하면 반드시 이기고, 지키던 곳은 반드시 끝까지 지켜서 나라 형세가 그에 의하여 좌우되고, 적의 예봉이 그에 의하여 꺾이어 전 국토에 굴을 파 놓고 출몰하던 교활한 오랑캐들이 끝내 저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열조(烈祖)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충무공에게 특별히 명(銘)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 할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증민(烝民)의 시(詩)는 번후(樊侯)의 공적을 노래한 것인데 선왕(宣王)의 아름다움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 신하가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은 임금이 현명해서인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아 그 일을 잘 마침으로써 공을 세우고, 그 공에 임금의 아름다움을 실어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옛날의 도였다. 지금 이 명도 그러한 시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니, 내 어찌 이 명을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 그리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추가 증직하고, 그의 시호를 따라 비수(碑首)에는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고 새기고, 이어 서(序)를 쓰고 명(銘)을 써서 사씨(史氏.사관)에게 고하는 것이다.
註:《홍재전서》에 있는 銘은 여기서는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