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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 6. 성전보다 더 큰 이 7. 무죄한 자를 죄로 8. 안식일의 주인
마 12: 6. 성전보다 더 큰 이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거기에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이다. 사람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실상, 구약시대의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당한 말씀이었다.
1]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성전보다 더 큰 이란 성전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법보다 우선한다.
이 구절의 논쟁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법이다(Daube).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은 남성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명사일 수도 있다.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견해.
Ⓑ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로 이들은7절의 '자비를 원한다'라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
Ⓓ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율법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율법은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5: 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성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가는 존재였다.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건물로서의 성전은 한낱 예수 자신을 예표, 상징하는 일시적 모형일 뿐, 예수 자신의 등장 이후에는 결코 존속할 필요가 없다.
* 히 8: 5 -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성전 속에서 그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나타내어 보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성전인 예수 안에서 임재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 요 12: 45 -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따라서 예수가 모세보다(5: 21-28), 아브라함보다(요 8: 58) 성전보다 더 큰 이임은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 누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 함이 있다.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다윗의 경우와 같이 그리고 제사장들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일들에 있어서의 자유이다.
마 12: 7. 무죄한 자를 죄로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 하였으리라. )
예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호세아 6: 6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인용하시면서, 그들이 그 말씀의 뜻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호 6: 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서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행위를 말한다.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자비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의무를 배격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
2] 너희가 알았더면
예수는 또 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
종교 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뱅(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3]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가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성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다윗의 경우나 제사장들의 경우와 같이 부득이한 일들에서의 자유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예배 의식보다 자비한 마음을 원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보다 남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이 경우 제자들의 배고픈 형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2: 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규례들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신명기 10: 13은,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마 12: 8. 안식일의 주인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또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구약의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출애굽기 20: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애굽기 31: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인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1]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구약시대의 안식일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 주실 참된 안식의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을 이루셨다.
막 2: 27에는 안식일 제정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다.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 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칼뱅(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아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나 예배 의식보다도 자비한 마음을 더 원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원칙만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 것보다 남의 배고픈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상, 안식일에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죄하며, 예수님 안에서는 자유 함이 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의 자유요, 경건의 형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을 예표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또 그것은 천국의 안식을 바라보게 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 16-17에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는 안식이 없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심으로써 우리는 참 안식을 얻게 된 것이다.
죄는 안식을 잃어버리게 했으나, 죄 사함은 참 안식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 28) 또 요한복음 14: 27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며 또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성전보다 크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하나님께서 단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심을 알자. 남을 그릇되니 정죄하지 말고 부득이한 일들에 대해 긍휼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자.
2] 안식일 사건과 훈계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주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안식일 범법행위로 간주하고 비난했다. (마 12: 1-2)
이에 대하여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은 율법의 바른 의미와 해석으로 그들의 잘못을 훈계하셨다.
태초부터 있으셨던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며, 또 마음의 뜻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다.
* 히 4: 12-13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무지를 깨우치시는 주님의 훈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얻도록 하자.
(1)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율법에 대해서만은 남다른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놀랍게 지적한다.
5절에 보면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속한 모든 것은 무엇이나 허용되는 날이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행하는 일들은 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다.
율법이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에 쉬라고 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룩한 일까지 쉬라고 명하지는 않았다. 율법의 피상적인 지식은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2)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주님이 앞에서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예외를 인용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확실하게 선언하셨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그는 율법을 수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분이다.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있다.
* 마 28: 18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한 일이 결코 범법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에만 무지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성전보다 더 큰 이, 곧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고 있다.
사람들은 곧잘 이런 어리석음을 범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만 지금 자기 앞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 시 16: 8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보이는 성전 안에서는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동행하시는 일상생활에서는 거룩하지 못했다.
(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하시고 본래 의도를 파악하도록 이끄셨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 의식 자체를 행하는 것 이상으로 어떤 목적과 의도로서 임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리새인들의 무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주님은 호세아의 외침을 상기시켰다. 호세아 당시의 유대인들은 제사 의식에만 치우치고 마땅히 행해야 했던 자비, 곧 사랑의 의미는 외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다.
* 호 6: 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물론 예배 의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식이 합당한 목적에서 이탈된다면 그 중요성은 무시되며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는 것이 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책망의 말씀들이 우리를 향한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은 율법의 적용을 정죄의 도구가 아닌 생명을 복되게 하시는 데만 응용하셨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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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시다.
💖사랑의 향기는 만리를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도 건강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좋은 향기로 좋은 인연 이어가는 날 되시기 기원 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