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구속사 강해
노아의 후손들이 추구한 나라
새 인류의 조상이 된 노아와 세 아들(셈, 함, 야벳)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는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였다. 그들은 아담 이후 줄곧 부패해져서 온 세상이 강포하게 되었던 옛 역사를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이 세상의 통치 이념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나라를 건설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담의 언약을 성취할 약속의 씨가 출현할 것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그 약속에 근거하여 장차 죄의 세력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할 것이라는 신앙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이 신앙은 노아의 후손들을 통해 점차 꽃을 피워 마침내 열매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사건이 있은 후 100여 년이 지날 즈음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함으로서 새 인류의 조상으로 이 땅에 거룩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이미 아담의 후예들이 죄로 인해 나타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인이 세운 힘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의 통치 원리 속으로 잠식을 당한 것처럼, 노아의 후손들도 죄의 영향력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과는 정 반대로 사람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새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한 시기가 언제인가는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창세기 10:21-25을 참조해 보면 노아의 5세손이며 셈의 4세손인 벨렉(벨렉은 ‘나눔’이라는 의미임)이 태어날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노아가 701세 가량 되었고 셈이 199세 가량 되던 해인데(족보의 성격 상 그 연대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새 인류의 시조인 노아와 그 아들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전에서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노아의 후손들이 아담이 건설하지 못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사명을 각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자꾸 번창한다는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신 문화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홍수 사건 이후 생존에 대한 위협에서 보장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노아의 후손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번창하였다는 것은 창세기 10장에서 볼 수 있는데 셈, 함, 야벳의 후손들이 각기 나라를 만들 정도로 번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노아 자손들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 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 10:32).
그들이 이처럼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생존에 대하여 다시는 홍수로 멸절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을 뿐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고, 범죄 이후 땅의 소산을 먹기 위해서는 땀을 많이 흘리는 수고를 해야 양식을 얻을 수 있었으나 홍수 이후부터는 동물을 식량으로 허락함으로서 쉽게 양식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창 9:2-17).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들의 생존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를 해 주신 것은 그들이 생존의 염려로 구차하게 살지 않고 충실히 사람의 본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이 마땅히 경영해야 할 인생을 경영하지 못하고 오로지 먹고사는 일을 위해 한평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 땅에 내신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범죄하기 전에는 양식을 위해 조금도 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로는 열심히 땀을 흘리지 않으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해결할 수 없었다(창 3:17-19). 홍수 이후 새 인류로 태어난 노아의 후손들은 어렵지 않게 얼마든지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함의 3세손인 니므롯은 사냥의 명수였는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8-9) 할 정도로 양식을 얻기 위한 사냥이 보편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이 손쉽게 양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존에 대하여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존에 대하여 위협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생존에 대하여 위협을 받은 것은 그들이 범죄한 대가였던 것처럼, 그들이 이처럼 생존에 대한 염려를 덜어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본연의 존재 의미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자유스런 위치에 있음을 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처럼 자유스럽고 자기의 본분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시도한 것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정교하고 고도한 기술과 풍부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만한 기술과 노동력을 가지고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생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함께 전 인류가 노력했다면 역사 이래로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나라와 문화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좋은 자질과 자본을 인간의 본분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워나가기 보다는 자기들 나름대로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에 투자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은 언약의 성취나 천지 창조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생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경영과는 정 반대의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한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신 문화적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 대치되는 생각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문화적 사명을 내리신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고, 그것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경영은 하나님의 경영과 일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공사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바벨은 혼잡, 혼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탑을 쌓는 역사를 중단시키시고 세계 각처로 흩어버리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이 한번 범죄한 이후 인류는 정상적인 길로 가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의 경영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로 말미암아 한번 왜곡된 역사의 결과는 이처럼 계속해서 인류의 갈 길에 거침돌이 되어 방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보면 볼수록, 역사 속에 그러한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류가 참다운 인생의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약속의 씨를 더 기다리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