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NGO신문] 정현웅 소설가= 나는 삼십년 전부터(소설 마루타를 집필하기 전) 조선인 처녀들이 강제로 끌려가서 종군위안부로 당했던 여성 잔혹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여기서 자료라고 하면 한국에서 출간된 책자나 논문, 기타 잡지에 발표된 것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많은 자료는 가해국인 일본에 있었습니다. 일본 관청의 기밀문서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어느 경로이든 그 일에 가담했던 관리라든지, 군인들을 통해 흘러나온 기록들이었습니다. 일부는 일본 군대 기록부를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종군위안부의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에 일본 관동군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남경을 공격합니다. 그때 중국군은 모두 퇴각하고 남은 것은 무력한 시민과 난민 무리였습니다. 마쯔이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부대는 남경으로 들어가서 남아있는 중국군 부대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몇 사람씩 그룹을 지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이삼일 동안 일본군들은 시내에서 여자라고 보이는 사람이면 무조건 강간을 했는데, 10살의 소녀에서 70살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치마를 두른 여자라면 무조건 범했습니다. 여학교를 덮쳐 아직 피하지 못하고 지하실에 숨어있는 여학생들을 집단 강간했고, 수도원을 급습해서 수녀들조차 유린했습니다. 말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강간을 하고는 바로 죽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살한 남경 시민의 수가 약 4만2천여명이 되는데, 희생된 대다수가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일본 본국의 군부에서 놀라면서 그 대책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나온 대책이 바로 군대 위안부 설치였습니다. 부대 주변에는 사설 사창가들이 있었지만, 그 시설 가지고는 군인 전체를 소화하기 어려웠고, 화대가 비싸서 사병들이 출입하기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관리되지 않고 있는 사창가나 현지 주민과의 접촉으로 병사들의 성병이 만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고 통제할 필요가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품질(?)이 좋은 병기(兵器)<부대 기록 중에는 종군위안부를 병기라고 표현해 놓기도 했음>와 싼 사창가를 만들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 결정이 나자 그 내용을 노골적으로 하기에는 민망했던지, <미혼 여성을 군대의 특수임무에 충당한다> 라는 정책을 세워 전선의 각 부대와 조선총독부에 내려 보냈습니다. 군대의 특수 임무에 충당한다는 것은 종군 간호부라든지 군대부설 군복 공장의 공원을 연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착각으로 지원한 조선인 처녀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때 조선정신대라는 타이틀이 생기는데, 이 정신대라는 말은 아주 모호하면서 상투적인 단어였습니다. 이제 그 정신대라는 말은 종군위안부라는 뜻으로 풀이 되고 있지만, 당시만 하여도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대 종사자 의미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 사창가에 있던 여자들도 만주로 갔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자원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국 현지의 여성들이 참여했는데, 역시 돈을 번다는 이유로 그 일에 가담했지만, 중국인 위안부 중에 국부군이나 팔로군 스파이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부대에서 출전하기 위해 전 부대 대원들에게 군표를 주어서 위안부를 안게 했는데, 그때 군사 비밀이 누설되어 출전도 하기 전에 패하거나 이미 중국군이 소개한 다음에 허탕을 치기가 일쑤였습니다. 중국 위안부들 가운데 스파이가 많다는 소문이 나자 중국인 위안부를 꺼리게 되었고, 자연히 선호하는 것이 조선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1년부터 조선인 위안부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직적으로 모집했습니다. 온갖 거짓말과 협박을 해서 조선인 처녀들을 모집해서, 기차에 실어 관동군이 있는 만주로 보냈습니다. 그러한 일에 경찰이나 헌병대, 그리고 중간 모집책과 관리자들인 매춘업자들이 결탁했습니다. 군부대는 뒤로 빠져서 노출시키지 않는 편이었으나, 어느 부대에서는 고급 장교나 부대장이 직접 위안소를 경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이 많지만,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일련의 일을 일본 위정자들은 모른다고 하고 있지만, 1970년대 중반에 일본의 대의사(국회의원) 아라부내(荒船)<자민당의 장로격이며, 후에 중의원 부의장을 지냄>가 선거구민 4백여 명을 모아놓고 시국 강연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 중에 징용 한국인에게 저금하도록 한 돈이 자그마치, 1천1백억엔으로까지 늘어났지만 종전으로 결국 못쓰게(못받게) 돼버렸다. 징용공으로 끌고 와서는 군인으로 써먹었지만, 그 중에서 57만6천명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한국인 위안부가 14만3천명이 죽었다. 일본인 군대가 살육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두 90만 명이나 희생이 된 것이다....." (기사 출처: 임종국의 저서 정신대실록 중에 27페이지에서 인용)
여기서 '한국인 위안부 14만3천명이 죽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통계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러니까 일본 당국에서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일본군대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한국인 여자들의 수는 약 20여만 명으로 보고 있는데, 그 중에 사분의 삼이 죽고, 나머지 상당수는 현지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의 집으로 돌아온 수는 극히 적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인데도, 과거 이께다 수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의 아베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과거의 비행들에 대해서는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하고 뻔뻔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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