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에 게이에 마약상이 된 남자의 이야기라... 소재 참 아싸 of the 아싸구나. 이건 같이 볼 사람이 없을끼야... 나는 반지를 산꼭대기 활화산에 던지려는 호빗의 심정으로 혼자 길을 떠난다. 그런데 엄청나게 삽질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보려보려하다가 하도 꼬여서 '못보나? 인연이 없는 영화인가?'생각할 정도였다.
1) 원래 주중에 영화를 보려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보는 바람에 근처 영화관에서 내려감. 영화관의 속셈은 '주중에 개봉해서 주말에는 흥행작들을 깔고 이건 내리자'는 메뚜기 한탕이즘 마인드.
2) 주말에 이 영화하는 곳을 찾아보니 갓두릅이 추천했던 시네큐브가 있어서 갔는데 탄기국 집회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여... 지하철역에서 내렸는데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까지 통제되고. 걸어서 빨리 가보자고 하였는데, 순간 나는 모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회의 깃발하에 본의아니게 탄핵반대러가 되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아는 사람들이라, 후드 뒤집어쓴 외부인인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거의 벌레보듯. 난 단지 급하게 나오느라 머리를 못감아서 누가보랴하는 심정으로 후드를 뒤집어 쓴 것인데 복수의 누군가들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고 나는 묘하게 프락치의 느낌이... 이...이거... '갓근혜! 탄핵반대!'하면서 도마의 신이 개발한 기술명 '양3' 텀블링이라도 해야하나...
1260도 회전을 하며 외쳐! 갓근혜! 탄핵반대!
아닙니다~ 저는 프락치가 아닙니다ㅠ
결국 칼같이 정시에 영화 시작하는 시네큐브의 정책이 나의 발목을 잡아 제 시간에 못 맞추고 못 봄.
그... 그래도 집회의 자유 인정합니다...
3) 빡쳐서 다음날 시네큐브 또 감. 근데 걍 미적대다가 늦었음. 데헷~ 이날은 아예 늦을것 같다는 압도적인 불길한 예감으로 낮에 가서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하면서 칼같이 늦고 5시간 후에 하는 티켓을 끊게 됨... 그 시간동안 나는 근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한권의 책을 거의 다 보게 된다! 오롯이 서서!
과연! 강철의 장딴지! 라 하고 싶지만 단지 앉아서 보는 테이블에 자리가 날 듯하면 어디선가 (기분상 테이블 밑에서 사람들이 거의 사다코처럼 기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나 자리를 차지하여... 마지막 즈음에는 다리 아파서 몸을 배배꼬며 오줌마려운 5살짜리의 포즈로 책을 대충 마무리 짓고 다시 씨네큐브로. 물론 중간에 밥도 챙겨먹는 앞가림쯤은...그래도 5살짜리보단 내가 낫다는 자부심!
씨네큐브에선 아카데미 후보작들을 상영하고 있었다. 대중적인 인기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좋은 듯. 매진되었다.
이 영화는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연출등으로 직접 봐야 느낌이 오게 만들어서 스포일러 여부가 크게 문제가 될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뜻하지 않게 영화보는 재미를 빼앗길 수 있으니 영화볼 사람들은 이 문단 이하로는 안 보는게 좋겠다.
이하로 글의 내용은 급진지 빨면서 웃기지도 않고 별거 없으니 혹여라도 유혹받지 마시길...
가끔 포스터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영화는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 어린시절, 청년시절, 성인시절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이 포스터의 각각 다른 색깔로 나타난 얼굴들은 왼쪽부터 어린시절, 청년시절, 성인시절 배우의 얼굴을 붙여놓은 것이다.
한 인간의 삶, 정체성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총합이라 볼 수도 있다.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고, 현재의 경험과 생각들은 미래의 나를 만들어가는 단초가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각 시절 얼굴들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코에 난 상처는 이 사람의 자아, 정체성, 과거에 상처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각 시절은 단절적으로 나타나있고, 합쳐진 얼굴은 하나의 얼굴인 듯 하면서도 묘하게 어그러져 있다. 단절성은 과거와 단절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의미하고, 묘하게 어그러진 얼굴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압되거나 뒤틀린 자아를 나타낸다.
스토리는 별 대단한 반전이 있거나 자극적이거나 한 내용은 아니다. 마약중독자인 엄마를 둔 흑인 꼬마(샤이론)가 어렸을적에 놀림받다가 동네 마약상 흑인 아재(후안)와 우정을 쌓고, 친구한명(케빈)과도 우정을 쌓는다. 샤이론은 게이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한 후 친구로서 유일하던 케빈이 학교의 다른 흑인 학생들에게 충동질을 당해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식으로 때리게 되고, 이에 주인공은 빡쳐서 다음날 그 충동질한 색히 뒷통수를 의자로 갈기고 깜방으로 간다. 시간이 흐르고 마약상이 되어 다시 나타난 주인공에게 케빈이 다시 연락을 한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만나는데...(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서 중간에 진행이 흔들린다는 평이 있던데 동의하기 어렵다. 딱히 흔들릴 것이 없는 이야기이다).
3부로 나뉜 각 부분의 제목은 순서대로 1. 리틀, 2. 샤이론, 3. 블랙 이다. 여기서도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짐을 볼 수 있다. 놀림받던, 그리고 남이 지어준 별명으로서 '리틀'에서 '샤이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 그렇다면 다음에 블랙이 문제이다. 3부 처음에 블랙은 부정적인 상징을 가진듯이 나타난다. 감독은 블랙의 상징을 그대로 부정적으로 끝낼까? 그것은 영화 마지막 즈음의 샤이론과 케빈이 함께 나오는 장면의 색깔을 보면 단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연극의 제목은 '흑인소년들은 달빛 아래에서는 푸르게 보인다(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이다. 이는 여러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는 blue가 색깔이 아니라 마음의 우울함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흑인을 생각했을때 우리가 창작물에서 기존의 흑인을 나타내는 스테레오 타입으로서 1) 갱스터나 악당, 범죄자 2) 이에 대한 반발로서 예술이나 스포츠, 혹은 흑인 인권분야들에서의 위인적 인물이나 인간승리의 표본 3) 앞의 두 스테레오 타입의 중간지점쯤에서 탈정치성을 가장하여 과장된 스웩등으로 대변되는 떠벌이나 마초와 같은 경우들이 존재해왔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들 중에서 내면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경우는 잘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 구조적인 희생자로서의 흑인을 보여 주면서도(샤이론이 그렇게 경멸하던 마약관련된 일을 결국 자기도 하게 됨), 엄청나게 위인이거나 인간승리라 할 수 없는 캐릭터의 현실적이고 과장됨이 없는 내면을 인간간의 연대를 곁들여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런 방향성은 미국 대통령까지 배출한 흑인문화 진영에서 다음단계로 설정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흑인문화진영 내부에 대한 외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제 획일적이거나 과장된 스웩문화말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하자는 일갈. 이런 측면은 샤이론이 성인이 되어서 근육질의 몸매와 황금 마우스피스를 끼우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근육질 몸매를 단련하는 모습은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고,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이기려할때 나오고, 황금 마우스피스는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을 숨기려 할 때 나온다. 허세를 버릴때는 마우스피스를 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서 흑인영화, 문화가 이제는 새로운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게이가 나온다고 해서 이 영화를 단순히 퀴어영화만으로 볼 수 는 없다. 케빈은 단순히 마성의 양성애자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 숨쉴 공간을 상징한다. 케빈은 1부에서 이미 주인공을 샤이론이라 부르고 2부에서 이미 주인공을 블랙이라 부른다. 케빈은 주인공이 힘들때마다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배우들의 호연. 그러나 아카데미 주연상을 타기에는 어려운 것이 각각 시절에 따라 배우들이 나눠서 나오기 때문에 '한 명이 꾸준히 캐리하는'형태를 선호하는 주연상의 특성상 상을 타기 어려울 뿐, 배우들은 매우 호연을 펼쳤다.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후안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 최고의 연기는 어린 샤이론이 후안이 마약상임을 알고 '너도 똑같구나' 하는 식으로 무표정한 경멸을 표하며 나가버릴때 자괴감과 비참함을 삼키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왜 비참한지는 성인이 된 샤이론이 결국 마약상이 되는데에서 나온다.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는 것. 그 다음에 성인이 된 샤이론역할을 맡은 트러반테 로즈의,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케빈에 대해 억압되어있던 감정의 둑에 금이 가면서 터져나오는 부분(드립치고 싶은게 있는데 참겠다...)을 또 다른 인상깊은 연기로 들겠다.
연출은 상당히 심심하지만 미묘한 부분들에서 신경을 썼다. 비유하자면, 나는 가수다와 같은 음악경연프로그램 후렴부분에서 고음쳐주고 엄청난 기교를 부리는 가수가 아니라 더 세게 부를 수 있는데도 담담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수 같달까. 이 영화를 보고 감정적인 진폭이 크지 않다는 평도 보았는데. 과장된 스웩말고 흑인의 내면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그려보자고 했으면, 거기에 화려한 연출을 할 여지는 별로 없다고 봐야한다. 이동진은 후반부의 식당장면의 뛰어남을 얘기했다. 샤이론과 케빈이 서로의 내면을 보여줄듯 삼킬듯한 부분이다. 그 외에 나는 다른 부분으로 샤이론이 케빈한테 두드려맞고 부은얼굴을 얼음물에서 꺼낼때 초점을 미묘하게 흐리는 장면의 연출을 꼽겠다.
마지막 장면은 어린 샤이론이 달빛내리는 바닷가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끝난다. 누가 불러주었기에, 혹은 누군가가 뒤에 있었기에 돌아본 것이다. 어린 샤이론의 표정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