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3
1월14일[연중 제1주간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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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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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3OrZCuGnFI
[수원교구 강유빈 도미니코(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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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의 베이스 캠프였던 카파르나움에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안식일이 되어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회당 안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코복음 1장 24절)
더러운 영이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2천년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바로 그 시선으로 오늘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옛날 회당 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냥 ‘뭔가’에 단단히 홀린 나, 하느님 아닌 엉뚱한 대상에 단단히 빠져든 나, 한 순간 자신을 통제 못해 언제나 돌아서서 크게 가슴 치는 나를 예수님께서 자비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십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나,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나,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나,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나, 여러 가지 중독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더러운 영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복음 1장 25절)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복음 1장 27절)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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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9pjf5heu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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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을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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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호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지만/ 가려 한 날 막아서네./ 난 갈 길이 먼데 새빨간 얼굴로 화를 냈던/ 친구가 생각나네./ 이미 난 발걸음을 떼었지만/ 가려 한 날 재촉하네./ 걷기도 힘든데/ 새파랗게 겁에 질려 도망간/ 친구가 뇌에 맴도네./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동그라미 모두가/ 멈췄다 굴렀다. 말은 잘 들어/ 그건 나도 문제가 아냐/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내가 빠른지도/ 느린지도 모르겠어./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던 노래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신호등’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의 흐름이 막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통사고의 위험이 더 커집니다. 이런 신호등도 가끔은 ‘수신호’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났을 때는 경찰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대통령이나 외교 사절이 이동할 때도 수신호로 차량을 유도합니다. 수학능력 시험처럼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도, 학생들의 이동 차량을 위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신앙 안에서 ‘신호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빨간불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계명의 파란불은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겁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 이외에도 613개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신호등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과 613개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구속하는 고삐와 같았습니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교회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교회가 보듬어 안을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호등과 수신호는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다만 수신호가 필요한 때가 있기에 수신호를 통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의 ‘수신호’입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이 너무 컸습니다. 세상에는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과 새로운 질서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계명과 율법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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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앙 고백으로 그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멸망시키시러 오셨는지를 묻는 이 말은 그 고백이, 그 앎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소중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멸망이 아닌 구원과 행복을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려 한 것이지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의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한 형제가 되셨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이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관심 꺼라.’ 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무관심을 내세우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우리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살다 보니 적대감과 무관심과 체념의 언어를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평화의 길로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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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소리를 쳤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보지만 믿음이 없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베드로는 칭찬을 받았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올바른 믿음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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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1ㄴ-28)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당했다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라는 말은, 그 당시 율법학자들의 말에는 ‘힘’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신학자들 중에도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지식 자랑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놀랐다가, 예수님께서 한 마디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 힘이라는 것을, 또 그 ‘힘’이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라는 사람들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시골의 가난하고 무식한 목수로만 보이는 예수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있고, 사용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라는 뜻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말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가르침,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어서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그 힘을 체험할 때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예수님을 알게 되지만, 안 믿으면 놀라기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3) 이 이야기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은 더러운 영이, 즉 마귀가 하는 말이고, 그것이 하는 말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당신은 ‘사람’일 뿐이다.”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고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는 “우리가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는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 구원 사업에는 마귀를 멸망시키는 것도 포함됩니다. 종말이 되면, 마귀는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라는 말은, “나는 당신보다 위에 있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나자렛 사람’을 풀이한 말이기도 하고, “당신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라는 뜻으로 한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쫓아내려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쉽게 쫓겨나지 않는다.”라고 큰소리치는 말입니다.
4) 마귀들은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상대로 토론이나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조용히 하여라.”라고 마귀의 입을 막아버리신 다음에,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마귀는 주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져서 갇히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루카 8,31)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라는 말은,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순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쫓겨났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여기서 항상’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그 ‘말씀의 힘’을 받아서, 그 힘 안에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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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을 만난 마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의 이 말은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있듯,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는 데 방해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마귀의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 받으려면 미사와 고해성사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것도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무엇인가 함께하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마귀의 말처럼, 아주 부담스럽고 괴롭게 느껴집니다. 신앙이 짐처럼 귀찮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편하고 기쁩니다. 악마는 이렇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권위’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 또는 ‘누군가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던 악마를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말씀에는 우리를 빛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탁월한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억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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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참된 권위>
오늘 복음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봅시다. 첫째, 예수님의 권위는 돈이나, 지위,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순종하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순간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때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권위가 있었지만,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에게 순종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숨기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더러운 영에게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내가 누구다.’라고 내세우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심으로써 참된 권위를 보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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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코.1,22)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가진 것을 놓는다는 것이 두렵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것에 그만큼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에 의존 할수록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더 가질수록 더 의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설 수 있는 자존감이 약할수록 우리는 외적으로 의존할 대상을 찾습니다. 자신감이 약할수록 외적인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감이 약해 자신감을 대체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의존하는 대상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대상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 대상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믿습니다. 주님께 의존하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믿습니다.
외적인 대상을 믿으면 우리는 자신을 잃게 되지만, 주님을 믿으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찾게 됩니다.
외적인 대상에게 의존할수록 우리의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 대상 뿐 만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언젠가는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의존할수록 우리의 희망은 더욱 많이 생깁니다. 주님 뿐 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언젠가는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변하고 모든 외적인 대상도 우리를 떠나지만, 주님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머무십니다.
떠나는 대상에게 의존하면 늘 불안하지만, 주님께 의존하면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행복합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것은 주님이신 아버지께 의존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외적인 지식에 의존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느님께 의존하셨기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이나 물질, 명예, 권력 등에 의존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권위의식을 키우지만, 주님께 의존하면 우리 삶은 권위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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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필을 어떻게 만들까요? 우선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나무를 벱니다. 그리고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에 또 말립니다. 작은 조각에 흠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 고정합니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흑연에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듭니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입니다. 연필 끝에는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이고, 유채씨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해서 만든 지우개를 여기에 붙입니다.
이런 제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연필 한 자루가 새롭게 보이지 않습니까? 만드는데 별로 어렵지 않은 간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혼자서는 연필 한 자루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함께’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도 함께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함께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도 함께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함께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입니다.
사실 악은 늘 우리와 함께하려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곁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삶이 아닌 더러운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알립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악은 분열을 일으킬 따름입니다. 분명히 정답이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정답인데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고, 그 결과 예수님 곁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과는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단호하게 끊어 버리고, 사랑 안에서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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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께서 이루시리니>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그분께서 이루시리니>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나는 믿음
이라는 생각에
한껏 뿌듯해진다면
믿음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맹신의 우상을
자취없이 무너뜨리시리니
나는 희망
이라는 생각에
맘껏 나를듯하다면
희망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허상의 그림자를
남김없이 흩으시리니
나는 사랑
이라는 생각에
잔뜩 우쭐해진다면
사랑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탐욕의 마수를
가차없이 꺾으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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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있는 가르침>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백성의 구원을 위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더러운 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러운 영은 하느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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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의 영원한 모범>
-구원의 영도자, 예수 그리스도님-
본인보다도 주변인들의 평가가 객관적이고 정확합니다. 참으로 명망있는 여러분들이 모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들으며 자신을 비춰보았습니다. 참사람은 누구인가? 참사람이 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평생공부가 참사람되는 공부요 참사람의 영원한 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제 최고의 탐구대상이자 관심사는 인간입니다. 모정치인에 대한 평가를 들어봅니다.
“생존이다. 평생 생존을 위해 노력한 이다.”
“그의 삶에는 일상이 있고 서사가 있다.”
“누구와도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기적같은 삶을 살아 왔다.”
“어려운 환경중에 살아왔으나 잘 사는 이들에 대한 증오가 없다.”
“유능하고 유연하고 경청하는 사람이며 소통에 능하다.”
“치밀하고 명민하고 명료하다. 눈빛이 말해준다.”
“울컥하다. 짠하다.”
“똑똑하고 착하다. 총명하고 모든 분야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강단있는 체력이다. 열정과 간절함이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며 학습능력이,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나다.”
저보다 훨씬 나이가 적은 분이지만 모두가 배워 닮고 싶은 덕목들입니다. 나이가 많아 스승이 아니라 ‘지혜와 노력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스승입니다. 또 어느 분의 이분에 대한 평은 압권입니다.
“개천에서 용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용이 되면 대부분 개천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는 개천을 잊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개천을 바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억강부약 대동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참사람의 모델 예수님에 가깝습니다. 타고난 좋은 품성에 역경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온 사람이라면 참사람의 영원한 모델인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방면에 걸친 주변분들의 객관적 평이니 믿을만 합니다. 김대중과 메르켈을 읽으며 감탄하는 것도 위와 같은 장점들입니다. 천재적은 품성에 천재적인 노력입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에 속할 것입니다. 매사 어느 처지에서도 치열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위대한 정치가들입니다. “애덕의 최고 형태는 정치다” 진리를 입증한 세계적 정치가들입니다. 이런분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자 희망의 표지이며 공동체의 보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고 지도자는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말마디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분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디테일에 강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은 ‘크리스천은 다시 사람이 되기를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정말 평생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다시 노력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기가 그토록 힘들고 평생과정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옛 현자의 지혜도 새롭게 마음에 새깁니다.
“새벽은 어른의 시간이다. 어제와 오늘이 교차하는 순간, 나는 새로워진다.”<다산>
“평생의 계획은 어릴 때 있고,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다.”<명심보감>
그래서 진리를 추구했던 옛 사막 수도승들의 공통점은 새벽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새벽마다 동트기전 외딴곳에서 기도했습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 정신 건강, 마음 건강, 영혼 건강입니다. 길을, 희망을 잃을 때 영육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죄도 많은 세상이라 병도 많습니다. 궁극의 길이자 희망이신, 궁극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자 빛이신 주 예수님을 잃었을 때 스며드는 어둠의 세력, 악마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상징하는 바 이런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허약한 사람들인지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겠지만 권위 실종의 시대 참된 권위는 공동생활에 필수입니다. 참된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더러운 영이 하느님의 거룩함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고백합니다. 문득 악(惡)에 대한 처방은 선(善)이 아니라 성(聖), 거룩함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
지체없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꾸짖음에 축출되는 더러운 영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사람들은 모두 놀라 이구동성으로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악마는 진공을 사랑합니다. 삶의 중심이 비어 있을 때 악마가 그 자리에 자리잡게 되고 마음은 악마의 놀이터가 됩니다. 정말 백약이 무효인 것이 이념이나 종교에 경도되어 중용을 잃고 극우나 극좌의 극단에 치우쳤을 때 광신, 맹신의 더러운 영들입니다. 양심도, 이성도, 양식도 마비되어 그 기능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광신이요 맹신으로 이런 이들이 바로 현대판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새삼 참 권위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상식파로 사는 일이,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배우는 일에 항구하는 일이, 참사람이 되는 공부에 얼마나 본질적 중요성을 지니는지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참 권위의 사람이 되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사람의 모델인 파스카 예수님의 정체가 히브리서를 통해 환히 계시되니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시편 8장을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 한 결과 주옥같은 다음의 진리말씀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 강조점이 있으니, 모두가 파스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부단히 그분을 닮아갈 때 참사람으로서 참나의 실현이자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더러운 영들이 악마가 범접하지 못합니다. 온전한 정신, 마음, 영혼으로 살 수 있고 육신도 더불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우리를 고무하며 ‘구원의 영도자’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원의를 더욱 북돋아 줍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 예수님을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살아있는 한 이런저런 시련과 고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의 영도자인 예수님께서도 고난으로 완전하게 되셨듯이 우리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구원의 영도자 예수님 안에서 끊임없이, 한결같이 ‘겸손의 계기’로, ‘완전에 이르는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을 때, 더욱 파스카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 참나의 실현이요 완성에 도달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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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악의 평범성>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영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도자인 그분이 우리 구원을 위해 고난받으신 분이시고,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신 분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분의 형제라고 불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영도자인 분이 고난을 받으십니까?
다만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일 뿐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은총을 누려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리 지르며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영도자를 상관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안다며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아는, 더러운 영의 모순은 무엇이고 왜 이렇게 모순된 행동을 취합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구원이 아니고 멸망이며, 하느님의 은총이, 은총이 아니라 괴롭힘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비슷한 내용의 더러운 영 얘기가 5장에서도 나오는데
게라사 지방에 예수님께서 발을 내딛으시자 군대라는 더러운 영이 마중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구역에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시는 분으로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이란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기에 더러운 영입니다. 죽게 되면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지 곧 더러운 돼지들 속에서라도 머무르려는 영입니다.
제 생각에 더러운 영이란 특별한 영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우리처럼 평범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러운 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현재의 상태를 고집하며 안주하려고 들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 하느님께 가지 않으면 그리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입니다. 떠나지 않으려고 함, 현재에 안주하려고 함, 하느님께 가지 않으려고 함, 이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악의 평범성’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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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하느님의 권위!>
오늘 복음(마르1,21ㄴ-28)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공생활의 주 활동 무대인 가파르나움의 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권위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보는 더러운 영을 몰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더러운 영이 나가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이 말로 보아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직하셨던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하느님(힘.능력)의 권위'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은 예수님께 부여된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일과 사랑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지친 육신의 쉼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당신에게 맡겨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기억하고 확인하기 위함이고, 소진되어진 하느님의 힘과 능력을 다시 충전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명령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겨자씨 한 알만 한 작은 믿음과 기억의 기도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히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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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 27)
대자연의
복원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들이
고뇌하고
직면하고 있는
이 아픈
현상황도
정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과
고요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을
나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삶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도록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가르침의 통로는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살이 되고
영혼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을
맑게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하는 것이
건강한 삶의
바탕입니다.
건강한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지역과 계층과
세대에 편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건강하셨기에
끝까지 권위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을 잃으면
권위는
남용됩니다.
사랑의 위기는
곧 관계의
위기입니다.
관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움과
변화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이
소중한 이웃들의
피와 땀
눈물과 기도와
정성이 있었습니다.
조급함이 아닌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건강하게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맑은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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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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