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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시장의 원활한 작동 돕는 게 정부 역할”…신자유주의 기초 세워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사회복지 제도는 정치적 편의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법의 지배를 위태롭게 하고, 자유를 상실하게 한다”는 논리를 폈다.
지난 20세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분수령으로 전반기와 후반기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전반기가 두 세계대전들로 특징지어진다면, 후반기는 두 체제의 대결로 나타났다. 두 체제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였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두 이념인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경쟁이 두드러졌다.
전후 서구사회를 먼저 주도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진보적 사회과학자들이 ‘영광의 30년’이라고 부른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로 구체화됐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1970년대에 들어와 위기에 빠졌고, 신자유주의가 이를 대신했다. 영국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바로 이 신자유주의에 이론적·정책적 기초를 제공한 이들이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1899~1992)와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었다.
전후 경제사상에 미친 영향력에서 하이에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슘페터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경제학자로 꼽혀 왔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20세기 전 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전반기에는 오스카 랑게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해, 케인스와 공황 원인에 대해 논쟁을 벌인 후 사회주의를 비판한 <노예의 길>(1944)을 발표했으며, 후반기에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자유헌정론>(1960), <법, 입법 그리고 자유>(Law, Legislation and Liberty, 1973~79) 등을 출간했다. <법, 입법 그리고 자유>는 경제이론에 기초한 정치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사상을 유감없이 보여준 하이에크의 대표작이다.
■자생적 질서로서의 시장
<법, 입법 그리고 자유>는 세 권으로 나뉘어 발표됐다. 제1권인 <규칙과 질서>는 1973년에, 제2권인 <사회적 정의의 환상>은 1976년에, 제3권인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 질서>는 1979년에 출간됐다. 제1권 <규칙과 질서>에서 하이에크는 인류 역사에서 진화를 통해 형성된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주목한다. 이 자생적 질서를 대표하는 게 시장이며, 이 자유시장은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는 기본 메커니즘이다. 그에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란 시장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사회 제도들을 정비하는 데 있다. 이러한 발상에 의거해 하이에크는 복지국가를 비판한다. 복지·사회보장 등 정부의 서비스 활동은 정치적 편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법의 지배를 위태롭게 하고 자유를 상실하게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제2권 <사회적 정의의 환상>에서 하이에크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사회에서 정의의 문제를 검토한다. 그에게 사회적 정의에 따른 분배란 올바르지 못하고 부도덕한 것이다. 사회적 정의의 실현은 계약의 충실성, 소유에 대한 존중,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 등 자생적 질서를 가능하게 했던 가치를 파괴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제3권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 질서>에서 하이에크는 현대 민주주의의 현실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의 쇠퇴, 권력 분립의 훼손, 다수 지배의 왜곡 등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선 정부의 자의적 행위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권력 분립에 입각한 제한 정부가 무엇보다 요구된다는 게 그의 대안이다.
요컨대 하이에크 경제사상은 두 견해로 압축된다.
첫째, 자유시장이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본 메커니즘이 되어야 한다.
둘째, 정부는 개인 삶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고 법치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가 1980년대 이후 지구적으로 풍미한 신자유주의의 경제·정치·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이에크와 신자유주의
하이에크 경제사상에 대한 토론은 지식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시민사회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하이에크를 정부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의 맞수로 내세웠다. ‘케인스 대 하이에크’는 20세기 후반의 경제와 정치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분석틀이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역사에서 하이에크 사상을 선명한 정책 노선으로 구체화한 것이 영국의 대처리즘이었다. 대처 정부는 규제완화, 세금 감면, 사회보장기금 삭감 등의 정책을 통해 시장의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대처리즘은 ‘포스트 포디즘’이라 불린 유연화 전략과 결합해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고 고용불안 및 실업을 증대시켜 정당성의 위기를 자초했다.
주목할 것은 대처리즘 이후의 정치·사회 변동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처리즘을 대신해 영국의 블레어 정부, 독일의 슈뢰더 정부 등의 ‘제3의 길’이 등장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갱신’을 내건 이 제3의 길의 성격을 놓고 새로운 논쟁이 전개됐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했음에도 제3의 길은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명명했듯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절충한 ‘신자유주의 좌파’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결정적 위기를 맞이한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통해서였다. 금융위기 이후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가 더 이상 유일무이한 발전전략이 아니라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암중모색의 과정에 놓여 있다. 지난 한 시대를 지배한 신자유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하이에크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는 여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어판 저작은
<법, 입법 그리고 자유> 3권은 각각 다른 학자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제1권 <규칙과 질서>는 법학자인 양승두 연세대 명예교수와 정순훈 몽골 후레대 총장에 의해, 제2권 <사회적 정의의 환상>은 경제학자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에 의해, 제3권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 질서>는 정치학자 서병훈 숭실대 교수에 의해 번역됐다. 제1권의 우리말 제목은 ‘신자유주의와 법’, 제3권의 우리말 부제는 ‘자유사회의 정치 질서’로 옮겨졌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 YS 정부 후반기에 첫 도입…MB 때는 ‘토건’과 결합
하이에크 신자유주의의 핵심 명제는 ‘가장 나쁜 것은 제한받지 않는 정부’라는 주장이다. 이런 정부 역할의 축소에 더해 감세, 규제완화,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국내시장 개방 등은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정책들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경제발전을 선도한 ‘발전국가’의 대표사례로 꼽혀온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낯선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원은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후반기로 소급된다. 김영삼 정부는 초반기에 금융실명제 실시 등 경제개혁을 과감하게 선보였지만, 이내 ‘국제화’, ‘세계화’ 담론을 수용하면서 후반기에는 규제완화, 민영화, 시장개방 등 신경제정책으로 선회했다. 1970~80년대 군부 권위주의 정부가 추진한 발전국가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이라는 이러한 정책기조가 가져온 결과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전략은 이중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일련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경제 영역에선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동시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등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노무현 정부에 의해 계승됐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드라이브를 건 것은 이명박 정부였다. 이명박 정부는 감세에서 규제완화에 이르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주목할 것은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가 대처리즘과 같은 서구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 등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토건정책을 선호했고, 발전국가의 영향 아래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여전히 광범위하게 유지했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노선은 신자유주의와 발전국가가 공존한 ‘신자유주의적 발전국가’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맞서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선 복지국가론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됐다. 복지국가론의 부상에는 2008년 금융위기라는 대외적 변화와 사회 양극화 해소라는 대내적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내걸어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 정부는 정작 출범한 이후 복지국가보다 규제개혁 등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추진했다. 크게 보아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발전국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