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성민의 배역이였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사건)이 발생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12월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하극상 사건(12·12사건)에 의해 날조된 죄목으로 7년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전역을 당했다.
1981년 3월에 사면 복권되었고, 1997년에 재심판결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고 계급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19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 후보를 돕기 위해 잠시 당 고문을 맡기도 하였으나, 김영삼 총재의 국회위원 전국구 1번 제의를 사양했다.
배우 정만식의 배역이였던 정병주 특전사령관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왔었다. 그러다가 1988년 10월 16일 밤 10시에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정병주 소장과 친분이 깊었던 장태완 소장은 계속해서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 왔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다.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닌 것이 그 이유.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긴 의문점은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 사실상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배우 정우성의 배역이였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이 도망가는 대신 신속하게 수기사, 26사단, 9공수여단, 11사단을 출동시켜 장태완에게 딸려줬으면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서빙고에서 45일 간의 조사를 받은 뒤 5년 후배인 전두환 때문에 강제로 쫓겨났으며 6달이나 집에서 갇혀 지낼 만큼 힘들었다.
12.12 군사반란 직후에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수도경비사령관이 된지 고작 1개월 내외만에 터진 일이었다. 후임자는 최전방 병력을 빼돌려 반란에 참가시킨 9사단장 노태우였는데 노태우는 이후 수경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
장태완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올바르고 소신있는 일을 하다가 패하여 반란군에게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와 통탄을 하면서 아들에 대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탄하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결국 1980년 4월에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태완 장군은 자신의 불효를 탓하고 부친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한 부친의 눈에 슬픔이 가득하여 "아버님,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이놈을 용서해주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천국에 가신 어머님과 영생복락을 누리십시오."라고 통곡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2년에는 외동아들 장성호(당시 21세)가 행방불명됐다.
12.12 군사반란이 터질 때 장성호는 중경고등학교 학생이었으며 가택 연금에 보안 요원들이 자꾸 돌아다니는데도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대문을 나선지 1달만에 칠곡군 왜관읍 근처에 있는 산기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배우김성균의 배역이였던 김진기 헌병감
다른 진압군측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김진기도 하나회에 소속된 부하들에게 하극상을 당했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한 우경윤 범죄수사단장(대령)과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대령) 모두 직속 부하였다. 애초에 그들이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12.12 군사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연희동 만찬으로 유인했던 조홍 헌병단장은 병과 후배로 이미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배신으로 인해 김진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후에 그는 "평생을 쿠데타의 악몽에 시달렸다."라고 밝혔다.
예편 후 수원에서 농사를 짓다 보문도에서 광어 양식을 하기도 하고 일본 평화안전보장 연구소에서 지정학을 연구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