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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지면 사진은 서풍님과 이강혁님의 작품을 썼고, 온라인에는 지율 스님의 작품 한 컷을 함께 썼습니다. 스님이 답사 중이셔서 연락이 늦게 닿는 바람에 그리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건넌다. 내성천 물은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을 지우는 물이다. 이강혁
사람들은 무릎 높이까지 바지를 걷어 올렸다. 며칠에 걸친 총강우량은 80~100mm였다고, 사흘 전 기상청은 발표했다. 봄비였다. 남한강 이포보 제방 200m를 쓸어가고, 낙동강 취수장 가물막이를 무너뜨려 56만2천 명이 마실 물을 삼켜버린 비는 이곳에도 똑같이 내렸다. 키가 큰 사람도 키가 작은 사람도, 다만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무릎은 물의 물리적 깊이가 아니라 사람의 심리적 깊이 같아 보였다. 바로 옆에 수달이 누고 간 똥이 보였다. 큰물이 쓸고 간 뒤에 남긴 하루이틀 사이의 흔적일 터였다. 그 똥이 일러주는 건 이곳 수달의 넉넉한 개체 수와 부지런한 품성이었다. 발원지에서 45km 내려온 내성천 상류 물가 모래밭에서 도강은 시작됐다. 산에는 연록으로 봄단풍이 스며 싱그러웠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을 지나는 물은 바툰 두 산자락이 서로에게 양보한 틈 사이를 더듬어 크게 휘돌았다. 가난하지만 너그러운 이웃끼리 모래를 함께 품은 형세였다. 물은 그 모래 위를 흘렀다. 경사는 완만하여, 물은 중력에 이끌리지 않고 바람에 밀려 마실을 가는 듯싶었다. 여남은 명이 띄엄띄엄 줄지어 물 가운데로 흘러들었다. 봄의 강물은 순간 차가웠다. 물은 심리적 깊이를 넘어 허벅지를 적셨다. 물보다 빠른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켰고, 바닥의 모래는 발끝으로 모인 체중을 음전하게 빨아들였다. 그때마다 물은 바지의 흘수선을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사람들은 가로지르지 않고 비껴서 건넜다. 건너되 거스르지 않으려 했다. 거스르려는 욕망을 지우는 물이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강은 끝났다. 가장 먼저 건넌 이가 모래밭에 주저앉아 발바닥을 비벼 말라가는 모래를 떨 때, 마지막 건넌 이는 다리를 흔들어 허벅지에 달라붙은 젖은 바지를 털었다. 신발을 꿰어 신은 지율 스님은 “지금은 평소보다 물이 깊고 물살도 세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 순하다”며 안도했다. 큰비가 오고 사흘 뒤였다. 구미의 식수난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서울 한강에는 흙탕물이 가득 흐르고 있을 때였다. 이맘때 봄 내성천은 웬만한 곳이면 발목께를 겨우 적시고, 물은 타고 가는 바닥 모래의 주름을 온전히 본뜨며 흐른다고 했다. 비가 온 뒤에도 금세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저수와 배수가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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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부터 어느덧 네 번째 걸음이다. 물길은 매번 달랐다. 물과 모래, 중력과 바람의 상호작용은 너비 100m 안팎, 총연장 100여km를 가득 메운 모래밭에 여러 갈래 물 그림을 그리고 지운다. 가을에 하나였던 물길은 겨울에 둘로 나뉘었다 봄에 다시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 봄에 하나가 된 물길은 지난가을의 물길과는 다른 궤적이다. 찾아온 계절의 물길은 지나간 계절의 물길을 기억하지 않는다. 물도 흐르고, 모래도 흐르고, 뒤따라 세월도 흐른다. 내성천이 그리는 그림은 계통이 없는 것도 같고 있는 것도 같은데, 계통이 없다면 군데군데 넉넉한 하중도 습지를 만들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자연의 계통일 것이다.
내성천은 지나간 계절보다는 훨씬 먼 기억을 보듬은 것처럼 보인다. 이 낙동강 상류 지천이 기억하는 건 전생의 바다인지도 모른다. 지질학적 상상력을 펼치면, 바다가 융기해 이룬 길고 협애한 산자락 사이로 물이 지나가는 것만 같다. 바다는 모래를 품은 채 골짜기와 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바위와 자갈로 뒤덮이고, 계곡과 폭포와 소로 이뤄진, 지리 검정교과서가 기술하는 여느 지천 상류의 소란한 풍경이 내성천에는 없다. 그리고, 내성천의 풍경은 지구상 다른 어디에도 없다. 그 풍경 속에서 사람은 그저 객이다. 수달, 노루, 고라니, 흰목물떼새, 물자라, 왕버들은 수줍게 주인 행세를 하지만, 그 들짐승과 날짐승, 물벌레, 물가 식물들도 사실 세입자이다. 부지런히 살고, 힘껏 대를 잇다, 마침내 떠난다. 내성천에 애초 재산권이란 없다.
물을 따라 모래는 떠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데칼코마니 수채화 같은 흔적을 남긴다. 지율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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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제방 쪽으로 바짝 다가와 붙으며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내성천이라 해도 비 온 뒤 물이 휘도는 곳은 수심이 제법 깊다고 했다. 운포구곡을 물길로 다 살필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행은 대열을 이룬 왕버들 사이로 여린 풀숲을 헤쳐 제방 위로 올랐다. 제방 너머로는 빗살무늬토기를 뉘어놓은 형상의 분지가 논과 밭과 과수원 따위를 옴팡하게 품고 있었다. 물의 길과 사람의 터전을 제방이 경계 짓고,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 기대어 있었다. 사람의 터전에도 봄이 차오르고 있었다. 제방 위는 사람과 수레 정도가 오갈 수 있는 흙길이었다. 일행은 길을 따라 빗살무늬토기 주둥이 쪽을 향해 걸었다. 비탈로 군데군데 노란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 진양조장단으로 흐르는 내성천에 지리 검정교과서에서 기술하는 지천 상류의 소란한 풍경은 없다. 서풍
그 다리가 사라질 거라고 했다. 발목께를 겨우 적시는 내성천의 흘수선은 사방 눈에 들어오는 산자락의 중턱까지 밀려 올라갈 거라고 했다. 다리 앞에서 지율 스님이 그렇게 말했고, 사진 찍는 서풍씨도 농사짓는 문종호씨도 거듭 확인해주었다. 평은철교 몇km 아래에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감할 수 있는 전언이 아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보다 이미지 조형력이 크게 떨어지는 말이었다.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봄 햇살에 보송보송 말라가는 흙길이었다. 길 왼쪽으로는 큰비 오고 사흘 만에 허벅지 깊이로 흐르는 내성천이었고, 오른쪽으로는 군데군데 모내기를 앞두고 논물이 찰랑거리는 들이었다. 그러나 일행이 걷고 있는 곳은 수몰예정지구였다. 제방을 사이로 물과 사람은 무심하지도 살갑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로에게 기댄다. 서풍
금강마을은 물을 따라 걷기 시작해 처음 만나는 마을이었다. 장씨 고택은 몇십 호가 사는 마을 한가운데서 내성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지어진 이 집은 경북 문화재 자료 233호로 지정되어, 아쉬운 대로 관의 관리를 받고 있는 듯했다. 마을에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농사일을 나가서일 터였다. 모란꽃만 가득 피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뒤로 고샅길을 올랐다. 뒷동산 중턱쯤에 쓴 무덤 앞에는 이장 공고가 붙은 말뚝이 박혀 있었다. 금강마을도 수몰예정지구였다. 고택도 유택도 모두 물에 잠기면 더는 농사일로 마을을 비울 일도 없을 것이다. 금강마을은 축산과는 거리가 먼 듯, 소 한두 마리가 들어설 만한 우리가 몇 군데 보였을 뿐, 그마저 텅 비어 있었다. 수몰과 구제역은 모두 사람의 일이었다.
뒷동산 마루에 오르자 마을 반대편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영주댐 건설 현장이었다. 금강마을은, 뒤에 숨어 비밀공작을 펼칠 수 있도록 댐에 아지트를 내주고 있었으나, 정작 댐의 아가리에 갇힐 운명이었다. 이전 정부에서 건설 계획을 세웠다가 주민들이 반대하고 쓸모도 없는 것으로 평가돼 폐기됐던 사업이 이명박 정부 들어 4대강 사업과 함께 훨씬 큰 규모로 되살아났다. 애초 이름도 ‘송리원댐’이었으나, 영주시가 중앙정부에 청을 넣어 ‘영주댐’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곳 지방권력에게 댐 건설은 자부심과 긍지를 부르는 역사(役事)인지 모르겠으나, 마을 앞에 댐 반대 현수막을 내건 이들의 절박함은 지방권력의 자부심과 동행할 수 없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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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은 반남 박씨 입향시조와 그의 손자사위인 신성 김씨가 양대 성바지를 이룬 집성촌이다. 무거운 기와를 얹은 집들과 가붓한 짚을 엮어 얹은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이어져 있다. 유서 깊은 마을은 새로 단장하고 ‘민속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우당(海愚堂)만이 1879년 중수한 이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상갓집 개’로 낭인 노릇을 할 때 들렀다 쓴 것이라고 문화관광해설사 김희옥씨가 설명했다. 김씨는 “무섬마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했는데, 첫째가 논밭이요, 둘째가 사당이며, 셋째가 대문이었다. 논밭이 없는 건 큰물이 지면 이 마을까지 내성천의 유역이 되기 때문이고, 사당이 없는 것도 같은 사정이라고 했다. 대문이 없는 건 인심을 은근히 뽐내려는 뜻일 터였다.
무섬마을엔 없는 것이 또 있다. 가게가 없다. 커피를 하나 사려 해도 내성천을 건너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한다. 46호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이 안동 하회마을처럼 번잡해질 것을 걱정한다고 김씨가 전했다. 마을 한쪽에 서 있는 ‘마을헌장’에는 물질의 탐심에 물들지 않고 두 성바지가 평화롭게 살 것을 다짐하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김씨가 말을 이어간다. “원래 해우당에서는 내성천을 볼 수 있었는데 제방을 쌓고 나서 조망이 막혔다. 제방을 걷어내고, 제방 위에 만든 주차장도 물 건너로 옮겼으면 싶다. 멀리 내다보면 그게 더 낫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의 품성으로 조성된 마을 같았다. 평균 연령 78살의 주민들도 한평생 내성천을 보며 살다 내성천의 일부가 된 듯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씨의 바람에서, 적어도 기술적 장애는 사라질지 모른다. 영주댐이 완공되면 금강마을부터 위쪽으로는 물에 잠기겠지만, 댐 아래쪽은 건천으로 변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영주댐은 영주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구미, 멀게는 대구의 상수원 구실을 할 것이라는 추론은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낙동강 본류는 이미 파헤쳐지고 여러 개의 보가 들어서 먹을 물을 길을 곳이 마땅치 않다. 구미 단수 사태는 그 뚜렷한 징후다. 영주댐은 늘 최고 수위까지 물을 가두고, 방류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건천에 제방은 쓸모없는 흙더미일 뿐이다. 김씨의 바람은 푸석한 현실이 될지 모른다. 내성천의 절반은 수몰하고 나머지 절반은 말라, 내성천은 전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댐은 2014년 완공 예정이다.
* 내성천은 셀 수 없이 많은 물굽이를 그리며 100여km를 흐른다. 물이 돌아가는 지점 너머는 목측할 수 없다. 이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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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영춘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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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1일 부터 경북 영주시 시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일 합니다..꾸뻑..^^
낙동강을 살려 주세요~~~~지금 마직막 남은 우리들의 강변 모래 백사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카페에 오셔서 많은 참여 부탁 합니다...꾸뻑
미련한 애기천사 올림............(날개를 가지고 싶어요)
첫댓글 천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영주에 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