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眼)
탄천 이종학
1948년 구제 중학 4학년 때니까, 62년 전의 일이다. 한문선생이 시성(詩聖) 소동파의 한시 적벽부(赤壁賦)를 가르치다가 뜬금없이 했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문명이 지금처럼 빠르게 발전하게 되면 눈을 몇 개씩 만들어 사용하는 세상이 오래지 않아 올지 모른다. 예를 들어 눈을 둘째손가락 끝에다 붙이고 다니면 뒤를 마음대로 볼뿐만 아니라 몸 여기저기를 자세히 살필 수 있을 터이니 얼마나 편리하겠느냐. 하지만, 이런 세상이 오는 날이 바로 지구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현재 과학은 너무도 광범위하고 정밀하게 눈의 역할을 고도화하고 있다. 전신 스캐너(투시경)로 인체의 구석구석을 환하게 훑어보는 것은 물론 전자현미경, 내시경, MRA 같은 검사 장치로 뇌와 오장육부를 비롯한 뼛속까지 세세히 검사하고 파악한다. 심지어 태아의 성별과 성장 과정을 한눈에 통찰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신의 영역이 따로 없다.
어디 그뿐인가. 좌견천리 입견만리(立見萬里)라더니 TV로 지구 위의 이모저모를 한눈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비롯한 우주의 움직임까지 관찰하는 세상이다.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거짓말탐지기 같은 독심술(讀心術)을 개발해서 인간 고유의 내면적 심골(心骨)마저도 파헤치기에 이르렀다. 이러다가는 개만 보인다는 바람이나 혼령을 예사로 보는 기가 차고 해괴한 세상을 우리 생전에 맞이할 지도 모른다.
표면에 드러난 것을 보는 신체 기관이 바로 눈이다. 몸값이 천 량이면 눈이 구백 량이라는 속담이 있다. 생명의 신비로 불릴 만큼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기(氣)가 있는 눈 즉 육안(肉眼)을 뇌의 창(窓), 마음의 창, 영(靈)의 창 등으로 부른다. 또한, 마음속으로 사물을 꿰뚫어 분별하는 힘 또는 그 작용을 심안(心眼)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밖에 뇌안(惱眼), 영안(靈眼), 천안(天眼), 지안(智眼), 동안(道眼)이라는 말도 쓰고 있다. 눈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보려 하고 숨어 있는 것들까지 알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망이 오늘날과 같이 과학의 힘을 빌려 본래의 눈 이상의 능력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사람에게 눈은 두 개뿐이다. 몸의 앞부분과 머리의 윗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둘
이상의 눈을 가진 사람은 탄생할 수 없다. 두 개의 눈으로 그것도 전면에 바라보이는 물체와 상황만을 불빛이 있을 때만 바라볼 수 있다. 본다는 뜻을 가진 말은 밝다, 빛, 불(火)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눈밝다는 눈+밝다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두 개의 눈만으로는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은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대단히 부족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발명된 것이 바로 눈의 보조기구이며, 그 시초가 거울(민경)과 안경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에, 앞에서 언급한 첨단기기들의 발명으로 시각의 다양화, 극대화, 정밀화 등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고 이런 욕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로 해서 눈은 생명의 신비에다가 과학의 신비라는 새로운 활력을 첨가해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눈의 또 다른 역할을 추구하려는 오늘의 문명에 삶의 가치를 얼마나 부여할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
조물주는 왜 사람에게 생명의 신비인 눈을 앞면에 두 개만 허용했을까? 또한, 그 이상의 진화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 사람이 살면서 가장 궁금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뒷면을 보지 못하게 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당연히 갖기 마련이다. 동양에서, 견(見)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 ‘나타나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은 두 눈으로 앞을 보는 한편 자신의 뒷면은 남에게 보인다거나 남이 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섭리를 깨닫는다. 내가 본 나와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내가 합일된 실체가 비로소 나라는 존재이다. 인간은 상호공존이 불가피한 사회적 동물이 아니겠는가.
한문선생의 염려처럼 인간이 육안의 역할을 하는 기기를 몸 뒤에 안경처럼 쓰고 다닌다고 가정해 보자. 당연히 편리하고 속 시원하겠지. 그러나 시신경이 앞과 뒤로 양분되면서 앞으로 가는 걸음은 머뭇거려질 것이며 무엇보다 남의 역할을 거부하는 사회성 결핍 현상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각자를 인정하는 공존공생의 의미가 퇴색된다면 그 결과는 지구의 종말까지 언급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앞을 정확하고 옳고 넓게 보고 판단하는 한편 남에게 흠 잡힐 데 없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노력해야 함은 필수적이다. 뒤통수를 맞는다는 말은 은밀하게 뒤에서 공경하고 헐뜯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한 데 대한 힐난의 화살이기도 하다. 앞에서는 군자인 척, 천사인 양 위선과 가식을 농하면서 뒤통수 간지러운 행실을 예사로 하는 사람은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다. 손가락질당하고 얻어맞기 마련이다. 뒤통수가 저린 사람이 바로 눈앞에 벌어진 일인들 제대로 볼 리 없다. 편협하고 왜곡되고 이기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과 남에게 동시에 걸림돌 노릇만 하고 만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눈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남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본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작품 소재에 대해서 성실하게 눈높이를 갖추고 난 연후에 글을 썼는지 다시 자문한다.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시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앞을 조심이라도 하지마은 아직은 육안이 멀쩡하다고 자신한 나는 오히려 구덩이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한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되풀이하는 후회가 이제는 지겨울 때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근시와 원시의 딱지가 두껍게 붙은 안경을 쓰고 있음에도 별 효험이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첫댓글 여자를 사귈 때 배꼽 밑보다는 눈썹위를 쳐다 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 수필 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이때쯤... 멀리서 보내주신 선생님의 귀한글 대하니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눈에 대한글,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았습니다. 특히 작품소재에 대한 말씀' 아는 것만큼 보인다...'
말씀에 부끄러움을느끼며 새해에는 좀더 알기위하여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글 감사 합니다선생님 늘 건강하소서!
선생님 글 반갑게 읽었습니다.
돋보기 넘어로 점점 깊고 맑게 보시는 선생님의 심안을 엿보고 갑니다.
어느듯 12월에 되었네요.
'눈의도시 에드몬톤'에 나오는
'백야에 침잠하는'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집니다.
선생님과 에드몬톤에 거주하는 한국인 식구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행복 하세요.
위 두 분 감사합니다. 이곳 동포에게 보내는 귀한 문안 전하겠습니다. 마지막 불꽃 같은 송년 되시고
성취가 가득한 새해를 맞으시도록 먼 곳에서기월드립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큰눈을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슴니다.
내가 본 나와 상대방의 눈에 비친 내가 합일된 실체가 비로소 나라는 존재이다. 눈 크게 뜨고 갑니다.
눈을 그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다 그리지 못하는 부족함이 한탄스럽습니다.
내 앞을 정확하고 옳고 넓게 보고 판단하는 한편 남에게 흠 잡힐 데 없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노력해야 함은 필수적이다. 뒤통수를 맞는다는 말은 은밀하게 뒤에서 공경하고 헐뜯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한 데 대한 힐난의 화살이기도 하다" 감상 잘했습니다.^^
'눈' 에 대한 선생님의 훌륭하신 글 감상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몸값이 천 량이면 눈이 구백 량이라는 속담이 있다. 생명의 신비로 불릴 만큼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기(氣)가 있는 눈 즉 육안(肉眼)을 뇌의 창(窓), 마음의 창, 영(靈)의 창 등으로 부른다. 또한, 마음속으로 사물을 꿰뚫어 분별하는 힘 또는 그 작용을 심안(心眼)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밖에 뇌안(惱眼), 영안(靈眼), 천안(天眼), 지안(智眼), 동안(道眼)이라는 말도 쓰고 있다. "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눈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 남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 본다."
많은 사색을 가져다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어떤눈으로 사물을 보아야 하는지 조심성이 생김니다.
선생님 건강 조심하시고 앞으로도 좋은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해 보내심을 축복합니다. 오는 새해에도 큰 성취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지요. 깊이 있는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지요. 심안을 생각 하며 좋은 글에 잠시 머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