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중세사 인물을 올립니다. 이번에는 단려왕이라 불린 필리프4세에 대해 올리게 되었네요. 상당히 독특한 인물이면서도 치밀한 사람이더군요. 그럼 보시죠!
필리프 4세 Philippe Ⅳ (영)Philip Ⅳ. 별칭은 단려왕 필리프(Philippe le Bel).
1268. 프랑스 퐁텐블로~1314. 11. 29 퐁텐블로. 프랑스의 왕(1285~ 1314 재위).
1284~1305에는 나바라의 왕 펠리페 1세로서 아내인 나바라의 후아나 1세와 함께 공동으로 다스렸다. 로마 교황과의 오랜 다툼은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짐에 따라 막을 내렸다. 그는 또한 봉건 영주 및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벌이고 봉건적 관습을 제한하여 프랑스 왕권을 확립했다. 3명의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은 잇달아 프랑스 왕이 되었다.
[초기생애]
필리프는 할아버지가 아직 왕위에 있을 때 필리프 3세(Philippe le Hardi)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필리프가 채 3세가 되기 전에 어머니인 아라곤의 이자벨이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인 루이 9세(성 루이)도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가 도중에 객사했다.
어머니를 여읜 필리프와 그의 세 형제는 아버지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아내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진 필리프 3세가 원정과 왕정 업무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의 어린시절은 이처럼 평탄하지 못했고, 또 이 시절에 잇따라 겪은 정신적 충격은 그가 성장한 뒤에 나타난 성격적 모순들의 일부 원인이 되었다. 1274년에 아버지는 아름답고 교양 있는 마리 드 브라방과 재혼했고, 이 여인이 궁정에 도착하자마자 온갖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샹파뉴와 나바라의 여자 상속인인 2세 된 잔(후아나)이 프랑스 궁정에 망명자로 받아들여졌다. 왕의 자녀들과 함께 자란 잔은 12세 때 미래의 필리프 4세의 신부가 되었다.
1276년에 형 루이가 죽자, 필리프는 하루 아침에 왕세자가 되었는데, 이 사건의 충격은 계모가 전처의 아들들을 죽이려 한다는 의혹과 독살에 대한 끈질긴 소문으로 더욱 심해졌다.
루이의 죽음이 아버지의 '변태적인 잔혹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모호한 주장이 나돌았지만, 그 잔혹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끝내 의혹으로 끝난 이런 소문들은 필리프의 운명이 예기치 않게 바뀐 것과 더불어, 그의 마음속에 불안과 불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 게 분명하다. 그결과 필리프는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의 모범이 될 만한 대상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되었다.
그는 할아버지인 루이 9세를 그 모범으로 삼았는데, 루이 9세가 일으켰다고 여겨지는 기적의 수가 늘어날수록 루이 9세는 점점 더 존경과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젊은 필리프를 둘러싸고 있는 종교적 조언자들의 가르침은 루이 9세의 엄격한 통치 기준과 성인다운 거룩한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효과적으로 보강해주었다. 좀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면,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이야기와 비현실적인 이상 사이에서 현실을 분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리프는 할아버지의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이 그에게 부여한 의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필리프는 16세 때 기사작위를 받고, 나바라의 잔과 결혼했다.
1285년에 그는 동생 샤를을 아라곤 왕위에 앉히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남쪽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이 모험은 계모가 후원하는 것이었고 생모의 오빠인 아라곤 왕에게 대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필리프는 이 모험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그래서 1285년 10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필리프는 당장 원정을 포기했다.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의 전쟁]
필리프의 통치 초기에 아라곤 문제는 해결되었고, 그는 왕국 행정을 개혁하고 합리화하려는 전임자들의 노력을 강화했다. 그는 감사관을 파견하여 왕이 임명한 관리들의 행실과 왕의 특권에 대한 침해를 조사하게 했다.
필리프가 이런 개혁을 끈질기게 추구한 것은 왕가의 지위를 강화해주었지만, 전임 왕들의 느슨한 정책으로 이득을 보았던 귀족과 도시주민들 및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1294년에 시작되었고, 그후 10년 동안 이어진 분쟁으로 필리프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무리하게 사용해야 했다. 해상에서도 몇 차례 충돌이 있었지만, 필리프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 대해 자기 힘을 과시하기로 결심하지만 않았다면 전면전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드워드 1세는 가스코뉴 공작령을 다스렸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프랑스 왕에게 영지를 받는 봉신이었지만,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1297년에 거둔 승리로 그의 야심은 충족되었을지 모르나, 필리프가 점령한 많은 땅이 잉글랜드에 반환되었기 때문에 영토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1303년의 평화 조약은 필리프의 딸 이자벨(이자벨라)이 미래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해야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혼인 동맹으로 두 왕국 사이에는 그후 몇 년 동안 평화가 이어졌다.
둘째, 전쟁 당시 필리프의 신하인 플랑드르 백작 당피에르의 기가 에드워드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필리프는 이것을 비열한 반역 행위로 생각했다. 그결과 프랑스와 플랑드르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고, 이 불화는 필리프가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잉글랜드와의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 평화 조약을 맺기 전에 필리프는 귀족들로 이루어진 정예 기병대를 플랑드르로 보냈다.
그러나 1302년에 쿠르트레에서 많은 귀족들이 플랑드르 시민군에게 죽고 말았다. 2년 뒤 필리프는 몽상페벨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쿠르트레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했다. 결국 플랑드르는 필리프의 강요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과 굴욕적인 불이익을 규정한 가혹한 평화 조약을 1305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플랑드르와의 싸움에 자금을 대기 위해 필리프는 의회를 소집하고, 전쟁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특권과 개혁을 약속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찍이 국방을 위해 징수한 재산세를 포기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이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지만, 원한다면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도 있다는 원칙을 시행한 것이었다. 이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후 프랑스 군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으레 비상 수단으로 이 정책을 채택했다.
[교황과의 대립]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필리프의 불화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빚은 3번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은 십자군 원정에 대한 교황의 계획을 방해했기 때문에 보니파키우스는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때로는 분별 없이 개입했다.
1296년 2월 교황은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고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는 '클레리키스 라이코스' 교서를 공포했다. 에드워드 1세와 필리프는 그들의 권위와 금고에 대한 교황의 위협에 과감하게 맞서서 보복 조치를 취했고, 결국 보니파키우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297년 7월에 보니파키우스는 통치자가 필요성을 입증하는 경우에는 교황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보니파키우스는 필리프를 달래기 위해 플랑드르 전쟁에서 그를 지지했고, 1297년에는 필리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9세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 교황의 지위는 그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약해져 있었다.
늦어도 1297년에 이미 교황의 적들은 교황이 영혼의 불멸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느니, 전임 교황을 죽일 음모를 꾸몄느니 하는 따위의 비난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리프는 이런 이야기들을 즉각 부인하지 않았다.
1301년에 새로운 분쟁의 원인이 생겨났다. 필리프가 파미에의 주교인 베르나르 세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한 것이다. 1300년에 성공적인 성년(聖年) 축제를 치른 뒤 자신감을 얻은 보니파키우스는 세세를 로마로 보내도록 필리프에게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왕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1301년 12월에 보니파키우스는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필리프의 권리를 유보시키고, 프랑스 왕의 통치와 프랑스 교회의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스 성직자들을 로마로 소환했다. 세세는 로마로 가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보니파키우스가 취한 그밖의 조치들은 즉각 거부당했다. 필리프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아들들에게 선언하기를, "너희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감히 왕국을 하느님의 권력이 아닌 다른 권력에 복속시키면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고 말했다.
1302년 4월에 그는 대규모 집회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쿠르트레에서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당한 굴욕적인 패배와 '우남 상크탐'이라는 교서에서 로마 교황의 보편적인 우월성을 선언한 보니파키우스의 조치에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필리프는 1303년 봄에 잇따라 추가 집회를 열었다. 그는 교황이 지적한 행정의 취약점을 교정하는 조치를 포함하여 원대한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어서 장관인 기욤 드 노가레와 기욤 드 플레지앙의 고발에 따라, 이단적인 말과 범죄적이고 부도덕한 행동을 한 혐의로 보니파키우스를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맹세했다.
보니파키우스는 필리프에게 직접 파문 선고를 내릴 계획을 세웠지만, 노가레가 선수를 쳐서 1303년 9월 7일에 아나니에 나타나 보니파키우스를 체포했다. 노가레는 종교 회의의 재판을 감수하도록 보니파키우스에게 압력을 가할 작정이었겠지만, 이탈리아에 있는 보니파키우스의 적들이 소집한 군대가 폭력과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틀 뒤 아나니 사람들은 교황을 석방했고, 보니파키우스는 다음 달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종교 회의에 출두하여 필리프의 고발에 항변해야 하는 곤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은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비난은 그의 후임자인 베네딕투스 11세를 다루는 데 유용한 협상 도구였고, 가스코뉴 태생인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는 훨씬 더 쓸모 있는 협상 도구였다.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필리프의 영지와 가까운 아비뇽으로 옮겨 필리프를 즐겁게 해주었다.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비난은 131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311년에 클레멘스는 필리프의 열성을 갸륵하다고 칭찬하고 보니파키우스가 1301년 11월 이후에 발표한 모든 공격적인 교서들을 무효화했다.
1304~13년에 평화가 계속된 덕분에 필리프는 죽은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복수를 계속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정통 신앙의 명백한 옹호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계획을 공식화할 수 있었다. 1304년 이전에 필리프는 자기 행동의 도덕적 의미를 생각하여 화폐 개혁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의 피해를 보상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전시에 취한 그밖의 조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썼다.
1304년 이후 그의 용의주도함은 더욱 분명해졌다. 필리프가 교황 클레멘스에게서 얻어낸 교서는 장래의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겠다는 서약에서 그를 면제해주고, 그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성직자들에게서 잘못 거둔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 의무도 면제해주었다. 필리프는 또한 클레멘스와 오랫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플랑드르 사람들이 1305년의 평화조약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의 제재 조치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교서를 얻어냈다.
1306년에 교회가 오랫동안 주장한 화폐 개혁이 시작되었고, 말년에 필리프는 통화정책에 대해 신하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1305년 4월에 잔 왕비가 죽었다. 필리프가 양심과 도덕이라는 문제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학문을 좋아하고 성 루이에 심취했으며 단호한 성격을 가진 아내의 죽음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필리프는 재혼하지 않았고, 아내가 죽은 뒤 몇 개월 동안은 프랑스 왕위를 버리고 십자군 기사단의 우두머리로서 성지의 왕이 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다.
[유대인과 성전기사단에 대한 박해]
필리프는 곧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는 동시에,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궁핍해진 왕국에 물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1306년에 그는 모든 유대인을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은 물론 갚아야 할 돈까지 몰수했다. 같은 해 필리프는 성 루이를 기리는 정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여 성 루이에 대한 헌신을 증명했다. 어쩌면 성 루이의 반유대적 성향이 필리프에게 유대인 박해에 대한 생각을 불어넣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대인은 이제 쓸모가 없어진 상태였다.
유대인은 평소에는 확실한 세입원으로 쓸모가 있었지만, 필리프는 그 전에 거듭 부과한 세금으로 유대인을 철저히 쥐어짰기 때문이다. 필리프가 부유하고 강력하며 독자적인 십자군 기사단으로서 오랫동안 프랑스 왕국의 재정 대리인 노릇을 한 성전기사단을 공격한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복합적인 동기를 갖고 있었다. 십자군 기사단들을 통합하는 일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필리프는 그런 계획에 반대하는 성전기사단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305년에 성전기사단이 이단이고 동성애 집단이라는 고발을 받아들였다. 그가 클레멘스 5세에게 시험삼아 제의한 건의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노가레와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고해 신부(이 사람은 프랑스 주재 교황청의 종교 재판관이기도 했음)의 지지를 얻어, 1307년 9월에 프랑스의 성전기사단원을 모두 체포하고 동료 통치자들에게도 자기를 본받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성전기사단에 대한 고발에 의심을 품고 망설이던 클레멘스 5세도 결국 필리프를 지지하게 되었다. 클레멘스는 필리프의 신하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고 성전기사단을 맹렬히 비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성전기사단 대표들의 입에서 직접 파멸적인 고백을 들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심한 고문을 받은 상태였다. 광범위한 분야의 사람들로 구성된 법정은 성전기사단원들의 헌신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자료를 모았고, 기사단은 이단으로 유죄 선고를 받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그 재산은 구호기사단에 귀속되었다.
필리프가 성전기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이런 행동은 성전기사단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클레멘스 5세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리프에게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전쟁을 멈추고 있는 동안 필리프는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들 및 황제들과의 교류에서 프랑스의 독립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아들들의 결혼을 이용해 프랑스의 영향력을 부르고뉴 지방까지 확대하고 리옹에 대해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동부 국경을 강화했다.
그러나 제국에 대한 지배권은 결국 얻지 못했다. 이 야심은 동생이나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곤 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1308년에는 동생 샤를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게 하는 데 실패했고, 1313년에는 둘째 아들 필리프를 밀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말년]
이 좌절은 필리프가 말년에 왕으로서 겪은 어려움의 전조가 되었다. 1313년 6월에 그의 행운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들들에게 기사작위를 주고 화폐 개혁법을 공포한 그는 아들들이 플랑드르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플랑드르 사람들은 1305년의 조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파문당한 상태였다. 플랑드르 사람들이 조건부로 항복하고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자, 필리프는 군대를 위해 모은 돈을 돌려주라고 너그럽게 명령했다. 1313년에는 이처럼 성공을 거두고 너그러움을 과시했지만, 이듬해인 1314년에는 계속 골치 아픈 일만 생겼다.
필리프는 성전기사단 단장인 자크 드 몰레가 이전의 고백을 철회한 뒤 화형에 처해지는 것을 묵인하여, 윤리와 신앙을 지키겠다는 완고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왕의 며느리와 간통한 혐의로 고발된 2명의 젊은 시종을 공개적으로 재판하고 처형한 것은 훨씬 더 중대한 문제였다. 클레멘스 5세의 죽음은 또 다른 타격이었지만, 플랑드르 사람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은 훨씬 더 큰 타격이었다. 필리프는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 플랑드르 원정에 나섰지만, 휴전 협상은 불화를 초래했다.
필리프의 장관들 가운데 하나가 반역을 모의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전쟁을 위해 모은 돈을 모두 반환하라는 요구가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돈이 필요한 필리프는 반환을 늦추었고, 조직적인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프랑스 북부와 동부의 귀족들은 왕에게 불만을 터뜨렸고, 가벼운 뇌졸중으로 쓰러진 왕은 11월초에는 성 루이의 고향인 푸아시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건강을 회복하자 고향인 퐁텐블로로 갔다. 죽기 전날 마지막 세금 징수를 중단하고,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다.
[평가]
필리프는 초연하고 엄격한 자제력을 가진 냉정한 사람이었으며, 남의 눈을 끄는 인상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키가 크고 금발의 미남이었기 때문에, '단려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군주의 호사를 마음대로 즐긴 필리프는 영지에 어울리는 궁전을 짓고 유지했지만, 주요관심사는 왕이라는 직책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이었다.
필리프는 하느님이 그와 그의 왕국을 지켜주시고 그를 가톨릭 신앙의 특별한 수호자로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 병을 고치는 힘을 주었다고 믿고, 그 치유력을 자랑했다. 자신의 정통 신앙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성직자 같은 소명 의식을 가진 그는 누군가가 죄를 짓거나 이단자라는 고발을 받으면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그런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그는 관념적 이상주의자였지만, 가능한 것과 필요한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웅대한 계획 가운데 실용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획은 미련 없이 포기했다. 때로는 권위주의적이고 단호해 보였지만, 판단의 확고함과 독립성이 부족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좀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면, 그런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리프는 지적이고 유능한 장관들을 승진시키고 보호하면서 그들에게 조언을 청할 때가 많았고, 신하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다. 유례 없이 자주 신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거나, 때로는 정책 수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자문은 정치적 방편이었을지 모르지만, 필리프가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교회 당국이 그의 행동을 승인한 것도 그와 마찬가지 구실을 했다.
필리프는 모든 점에서 인상적인 통치자였다. 일부 이탈리아 작가들은 그와 그의 노선을 싫어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전쟁과 세금 및 영향력 있는 조언자들을 비난하면서도 그의 경건함과 선의를 인정했다. 그에 대한 불만거리의 기억이 희미해진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의 통치기를 가렴주구가 없었던 황금 시대로 여기기도 했다.
또한 최근의 역사가들은 다양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 평가들은 대체로 국가적·종교적 편견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필리프 치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들을 볼 때, 그는 빈틈 없고 의심 많고 엄격하고 관념적이고 단호한 인물이었다.
또한 자신이 백성들의 윤리와 복지를 심판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확신한, 복잡한 성격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E. A. R. Brown 글
참고문헌
필리프사세
Medieval Statecraft and the Perspectives of History : Joseph R. Strayer, 1971
L'Europe occidentale de 1270 à 1380 (Histoire générale, histoire du moyen âge,
vol. 6) : Robert Fawtier, 1940
첫댓글 호오 ..ㅡㅡ 참고문헌..들 다 갖고계신거에요?아니면 ? 글 저장해야지.
아! 아니요! 전.. 브리태니커에서 갖고 온것입니다. 거기에 참고문헌도 잇기에 보시라고 올린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