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공부해서 남 주나” 삶의 철학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28호(2019. 07. 09)
홍인기(8회, 82세) 전증권거래소이사장
고위관료, 대기업 등 5개 회사 CEO, KAIST 등 대학교수 역임한 ‘지식탐구자’
올해 82세인 홍인기(8회) 동문은 서울법대 재학 중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1960년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재무부 초대 증권보험국장, 대우조선 해양 초대사장, 한국증권거래소 최장수 이사장(6년), 3개 증권사 등 5개 기업의 대표(CEO)를 지냈다.
증권거래소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2017년까지 서강대, KAIST
등에서 20여년간 인재들을 키웠다. 홍인기 동문은 연초 ‘미•중•러•OPEC간의 에너지국제정치’를 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요즘은 지구환경보호와 글로벌 공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자료수집을 하고 있다.
홍인기 동문과 기자는 한 공간에서 일한 인연이 있다.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1998년 당시 한국경제신문 증권부 출입기자로 증권거래소를 취재하며 곁에서 지켜봤다. 20여년 만에 전화통화를 한 뒤 지난달 25일 서울 신사역 인근 오피스텔에서 만났다. 조그마한 사무실은 영어서적과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국신문들로 빼곡했다. 늘 지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주인의 체취가 느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활기차고 건강해 보입니다. 하루 일과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여든이 넘으니 예전 같지 않아요. 몇 년 전만해도 매일 새벽기도를 갈 정도로 일찍 일어났으나 요즘엔 7시쯤 기상합니다. 잠에서 깨면 조간신문 3~4개 보고 사무실로 나옵니다. 지인들과 주로 점심을 하고, 오후에는 학동공원에서 한 시간 정도 규칙적으로 걸어요. 사무실에 있는 시간에는 책이나 외국신문, 잡지를 읽는 것이 하루 일과예요.”
며칠 전 교보문고에 갔다가 ‘에너지국제정치’를 구입해 읽었습니다. 에너지전문서적을 쓰게 된 계기는.
“1990년대 증권업계에서 일하면서 당시 급성장하는 중국경제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증권거래소 이사장으로서 중국의 증시관계자들과 교류도 많았고요.‘ 중국이 앞으로 무섭게 크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후 대학에서 중국금융시장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중국경제와 에너지’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새 책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미국의 셰일 혁명 성공으로 국제에너지수급시장에서 에너지동맹관계가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와 OPEC간에는에너지(석유, 가스)를 둘러싼 현대적인 에너지 국제정치가 전개되고 있어요. 한국입장에서 에너지4강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늘 유심히 관찰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관료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군요.
“당시 우수한 인재들은 국가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고시에 대한 선호가 강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입사해 부하직원들이 대부분 대학선배나 연장자들이었습니다. 남덕우재무장관이 금융시장이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고 이재국에서 증권보험국을 분리, 신설하면서 초대증권보험국장을 맡았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재과장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것입니다. 1965년쯤으로 기억이 되는데,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 각 부처에 일정과 재원조달방안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건설비용을 놓고 서울특별시, 육군공병단, 건설부, 재무부 등에 방안을 내라고 지시했지요. 그 중 재무부 이재국에서 낸 안이 가장 예산이 적게 나와 채택됐습니다. 청와대로 가서 김학렬 경제수석,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을 만나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가 있지만, 저는‘애국자’라고 봐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증권보험국장을 끝으로 민간기업으로 떠난 이유가 있었습니까.
“당시 관료들은 유능했고, 국가발전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인생목표로 삼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일했고, 고속승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꼭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부하직원이 큰 사고를 냈어요. 관리자까지 연대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됐지요.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부하직원들에게 늘 “공부해서 남 주나”를 강조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지식탐구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팔판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토박이로, 삼청초등학교를 다녔어요. 당시 서울시내에서 공부 좀 하는 학생들 사이에는 ‘경기 중’이‘ 서울 중’보다 인기가 더 있었어요. 그런데 서울중고의 김원규교장께서 ‘혜안’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별로 수학 잘하는 학생 5명씩을 뽑아 경시대회를 열었습니다. 서울중학교에 시험 보러 갔다가 멋진 학교에 모두들 쏙 빠졌어요. 수학인재들이 대거 서울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8회 동기생들은 대학입시에서 서울대 전체수석을 포함해 3명이 단과대 수석을 휩쓸 정도로 성적이 좋았어요. 동기 중에 인재들이 많아 나는 교장선생님의 주목도 못 받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웃음)”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은.
“대기업을 일군 창업자들이나 2세 경영인 중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굳이 한 분만 꼽으라면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입니다. 요즘 건강상태가 아주 안 좋아요. 김회장은 ‘수출대국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입니다. 1960, 70년대만해도 국교정상화가 안 됐던 러시아와 폴란드 등 동구권,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지역을 대상으로 수출시장을 개척해 큰 성과를 냈습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입니다.”
관료, 기업경영자, 대학교수로 ‘3모작인생’을 사셨습니다. 후회되는 일이 있는지요.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뒤 공부를 게을리 한 것입니다. 고등고시 사법과에도 도전할 수 있었으나 재무부 사무관의 ‘단맛’에 빠져 시험준비를 못한 게 가장 아쉬워요. 또 하나는 국내외연수와 유학 등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박사학위를 따지 못한 것은 정말 후회가 됩니다.”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부하직원들에게 새로운 지식습득에 매진할 것을 늘 주문하곤 했습니다. 증권거래소이사장으로 부임한 뒤해 외연수제도를 도입해 미국 등지로 나가 글로벌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었어요. 요즘도 당시 직원들이 해외주재경험이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며 인사를 받는 경우가 많아요.”
미ㆍ중 무역분쟁 등으로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한국경제 지속성장을 위한 제언을 해주세요.
“우리기업들의 해외투자가 늘고 있는 배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생산코스트 절감이나 해외시장개척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내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어요. 혹시라도 기업인들 사이에 외국으로 빠져나가야 할 속사정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기업인들의 마음을 붙잡아 국내에서 투자하고 일하게 만들어야 해요. 국내투자가 늘어야 고용문제도 해결됩니다.”
서울고 재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고등학교는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시기이지요. 하지만 ‘공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서울고’ 명성이 살아있는 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온 동문선배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모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고교 때 배운 지식과 결과물이 평생을 살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40, 50대의 고민도 깊습니다.
“70, 80대 고령자를 ‘꼰대’라고 하며 무시하는 시각은 버렸으면 좋겠어요. 이들 노년층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노후가 길어진 만큼 평소 노후대비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은퇴 전부터 재정, 건강, 취미 등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글· 사진_ 최인한(34회) 객원편집위원, 아그로플러스고문, 시사아카데미일본경제사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