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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이사야 40장
이사야서 40장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40:1절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헨델은 이 이사야 40:1절 말씀에서 큰 위로와 힘을 덧입고 그 유명한 ‘메시야’ 라는 오라토리아를 작곡했습니다. 그는 말년에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많은 빚까지 지게 되어서 절망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헨델의 시대는 끝났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날, 그는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찰스 제넨스라는 친구가 그에게 가사에 곡을 붙여 달라고 성가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책 표지에 이사야 40:1절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책을 열어보니, 성경의 말씀, 특히 이사야 말씀으로 가득차 차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줄 사람을 찾았건만 그럴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헨델은 그 글을 읽는 동안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는 추위도,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2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체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위대한 대작 “메시야”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 고통하는 인생들을 위로해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슨 말씀으로 저들을 위로해 주어야 할까요? 오늘 위로의 말씀을 통해 위로할 내용을 잘 배우심으로 저 고통의 멍에를 지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노역의 시대가 끝나고 죄사함의 시대가 왔다고 전하여야 합니다.(2) 2절을 보시면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죄 값을 다 치뤘다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배나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석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죄를 범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될 때에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더구나 중한 죄를 지어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하는데 특별사면으로 출소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메시지가 없을 것입니다.
군복무기간을 다 마치고 제대할 때도 참으로 기쁜데 하물며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할 우리들이 죄 용서함을 받고 죄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 될 때에 얼마나 감사가 되고 위로가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직접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함으로서 죄 값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큰 위로와 힘을 덧입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1: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은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보통 고난이 아닙니다. 넘치는 고난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위로도 넘치는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고난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넘치는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넘치는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넘치는 위로’ 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헨델이 바로 이런 넘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괴롭혔습니다.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멸시를 당하신 메시야, 침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니 말할 수 없는 위로, 하늘의 위로가 그 마음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남모르는 마음에 고뇌와 슬픔, 눌림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왠지 마음에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 이해받고 싶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위로를 찾다가 도리어 마음의 상처만 더해집니다. 인간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영적인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의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위로, 참된 영혼의 위로를 덧입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우리는 충만해지고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둘째,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가운데 나타났다고 전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 할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리워졌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의 영광이 크고 화려하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세계를 지배하던 초 강대국이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벨론의 도성은 성벽위로 마차 6대가 함께 지나갈 정도로 웅장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공중정원은 지금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거대한 바벨론에 비하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열등감을 느끼고 바벨론을 부러워했습니다. 바벨론의 신 마르둑을 은근히 사모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너무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3절을 보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느니라.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전에는 초라하게 생각되었던 여호와의 영광이 마침내 나타나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이를 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세상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게 된다고 전해야 합니다. 6b,7절을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실제로 바벨론 제국은 불과 100년 동안의 영화를 누리다가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페르시아 군대가 쳐들어와서 성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며칠째 술을 마시며 수중축제를 벌이다가 맥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백성들은 이미 벨사살에게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쳐들어오자 오히려 환영을 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영화는 실로 풀의 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며칠전 천국으로 떠난 일용이엄니 탈렌트 김수미 집사님의 영화도 실로 들의 꽃과 같음을 보았습니다.
타이거 우즈도 한때 ‘골프의 황제’로 불리워졌습니다. 클린턴 대통령 재위 시절에는 대통령이 제발 한번 같이 라운딩을 하자고 사정을 해도 자기 스케줄이 바빠서 못하겠다고 거절했던 사람입니다. 대통령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오래 전에 우리나라 제주도에 왔을 때에 온 나라가 술렁거렸습니다. 국가원수급의 경호를 서고, 그가 아침식사 때에 계란을 몇 개 먹었는가 까지 일거수 일투족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륜의 죄를 짓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에 사정없이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내고 아내에게 이혼당했습니다. 모든 광고시장에서 퇴출당해서 수 천 억원이 한 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와 권력, 인기와 명예, 미모 등 모두 다 순간입니다. 들에 꽃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8절을 보면 “꽃은 마르고 풀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우리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히13:8).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1:17).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요 끝이 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오. 지금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1:4절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를 살리고 새롭게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잘 들으면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환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왕으로, 목자요 우리 주 예수님으로서 영원하십니다.
10,11절을 보시면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셔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죄의 사슬을 끊으십니다. 악한 마귀의 세력들을 다 내쫓아 주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생명의 꼴로 먹여 주십니다.
15절에 보면 세계 열방은 한 방울 물이요, 저울 위에 티끌이요, 먼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사람은 메뚜기와 같고, 24절에서는 귀인들이 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없습니다. 감히 이 세상에 그 누가, 그 무엇이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연설을 할 때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로다” 하면서 아부를 했습니다. 이때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교만해졌다가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28,29절을 보면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믿되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말합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간절히 기다리며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원어적으로는 ‘비틀어서 하나로 묶는다’는 뜻입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모든 생각과 의지와 관심을 비틀어 묶어서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오직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절대 딴 생각하지 않고,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그 분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집중시켜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사39:14절에서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내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바라보고 앙망했던지 눈이 희미해지기까지 집중을 했습니다. 그는 왕이였지만, 삶의 위기 앞에서 사람을 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벽을 향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 영원하시고, 땅끝까지 창조하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능력을 부어 주셔서 곧 죽을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자세로 믿고 있습니까? 그냥 막연하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스기야가 한 것처럼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두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흘리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매달립니까?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독수리는 평소에는 다른 새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면 그 크기가 참으로 큽니다. 그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나릅니다. 다른 새들은 바람이 몰아치면 다 피하지만 독수리는 바람을 타고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이와같이 세상 사람들은 위기앞에서 금새 낙심하게 될 때 여호와를 앙망하는 우리들은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새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적인 힘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죄수들을 태우고 로마로 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서 거의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수 십일을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서 파도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서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 졌더라”고 했습니다(행27:20). 그러나 이때 하나님을 앙망하던 사도바울은 담대히 일어나 외쳤습니다. “여러분이여 이제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말씀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노라”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에 바울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풍랑을 주관하시는 사시는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을 앙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힘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귀아래서 노역의 때는 끝나고 죄사함의 시대가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세상 영광은 풀의 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므로 말씀을 굳게 붙들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외치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하늘의 기쁨과 평안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같은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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