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래의 人香萬里 ⓬ ,백일홍 심은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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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서원과 정자, 고택, 향교, 사찰, 묘지 주변에는 어김없이 배롱나무(백일홍, 百日紅)가 자리한다.
삼복더위가 내리쬐는 한여름.
짙푸른 녹음 사이로 진홍빛 꽃을 피워 올리는 백일홍은 여느 꽃들과는 결이 다른 우아한 기품을 지닌다.
벚꽃처럼 찰나의 화려함을 남기고 덧없이 스러지는 꽃이 아니다.
그 이름처럼 무려 백일 동안 붉은 빛을 머금고 견뎌낸다.
한 송이가 스러지면 또 다른 꽃봉오리가 터져 나오고,
이렇게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여름에서 초가을 문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붉은 향연을 펼친다.
송나라 시인 양만리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열흘을 넘겨 피어 있는 꽃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백일홍은 그 법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백일이나 찬란하게 붉은 빛을 뿜는다.
짧고 덧없는 시간이 아니라 백일을 두고 피어나는 백일홍의 기개는 흔들림 없이 꿋꿋한 강인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시들지 않는 붉은 꽃잎처럼, 삶의 거센 격랑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변치 않는 붉은 마음으로 피는 충절(忠節)의 꽃
배롱나무만큼 다채로운 별칭을 지닌 나무도 드물다.
해를 거듭할수록 묵은 껍질을 벗고 매끈한 줄기를 드러내는 특성 덕에 개미나 원숭이도 미끄러진다 하여
경상도 일대에서는 '개미 미끄럼나무', 일본에서는 '원숭이 미끄럼나무'로 불린다.
또 줄기를 손으로 긁으면 잎이 마치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 하여 ‘간지럼 나무’라는 별칭도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이 꽃이 지고 나면 곧 추수철이 다가와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남도에서는 '쌀밥나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중국 자미성에서 유래했다 하여 '자미화'라는 이름도 있다. '자미(紫薇)'는 황제를 상징하는 북극성을 뜻해
궁궐에도 많이 심어졌다.
특히 배롱나무가 해마다 묵은 껍질을 벗어 던지며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속성은,
마치 불필요한 욕망과 허영을 내려놓고 온전한 자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수양의 길을 닮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서당과 서원에 백일홍을 심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학문에 정진하며 청렴결백하게 살겠다는 다짐,
신의와 지조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붉은 꽃잎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찰에 심어진 백일홍 또한 수행자들이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본연의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심어진 교훈목이었다.
무엇보다 백일홍의 붉은 꽃은 변치 않는 마음, 곧 '단심(丹心)'을 상징했다.
스러질 듯 다시 피어나며 끊임없이 꽃봉오리를 틔우는 모습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일깨운다.
선비들이 절개와 지조의 정신을 백일홍에서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진주성(城)의 문화해설사 최정미 씨는
“붉은 꽃을 피우던 배롱나무가 자신을 심어준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3년 동안 돌연 흰색 꽃을 피운다는 전설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부모상을 당하면 흰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르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오랫동안 붉게 피던 꽃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는 모습은 마치 신하가 자신이 모시던 임금을 잃고 상복을 입는 듯하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백일홍은 단순히 계절이 오면 꽃을 피우는 나무가 아니다.
오랜 세월 절개와 충절을 간직한 채 우리 곁에 피어나, 붉은 꽃잎으로 한 시대를 지탱한 굳건한 신념을 전하고 있다.
‘절개와 지조’의 성삼문, 백일홍 흠모한 까닭
조선시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자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성삼문(1418~1456).
그의 이름은 곧 충절과 강직한 선비 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그가 유독 사랑했던 꽃이 있었으니, 바로 백일홍이었다.
성삼문이 백일홍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그가 백일홍을 그리워한 배경에는 비극적 운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을 생각하며,
성삼문은 배롱나무 꽃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단종에 대한 충정을 가슴에 품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39세의 젊은 나이에 극형에 처해졌다.
사지가 찢겨지는 ‘거열형’이라는 끔찍한 형벌 앞에서도 그는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자신을 믿어준 세종대왕과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충절은 붉게 피어나 지지 않는 백일홍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성삼문은 생전에 백일홍을 읊은 시 한 수를 남겼다.
"어제 저녁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가 피어,
서로 일 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하리라.“
그가 유독 백일홍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삼문에게 배롱나무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신념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해마다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듯, 백일홍은 충절과 청렴함, 그리고 선비로서의 굳은 지조를 상징하는 나무였던 것이다.
이런 백일홍의 상징성은 이미 조선시대에도 인정받았다.
조선 초기 서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강희안(1417~1465)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도
백일홍을 매화와 함께 ‘1품’으로 분류되며 최고의 나무로 꼽혔다.
백일홍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강희안이 최고로 꼽은 이유가 더욱 깊이 와닿는다.
감탄고토 풍토 속 백일홍이 전하는 메시지
서원과 향교, 왕궁 터 주변에 배롱나무가 심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뿌리 깊은 자리에는 백일홍이 지닌 상징성과 가치를 후대에 전하고자 한 깊은 뜻이 서려 있었다.
선비들이 목숨처럼 지킨 청렴결백과 절개, 굳건한 지조의 정신이 이 꽃에 투영되었고, 그중에서도 성삼문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그가 사랑했던 백일홍은 마치 그의 충절과 결연한 의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기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던 불굴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빛나는 귀감이 된다.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시대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요동쳐도 신념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덕목임을 백일홍은 일깨운다.
권력의 향방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이는 묵직한 경종이 된다.
정파와 이해관계에 따라 신념을 쉽게 저버리는 감탄고토(甘呑苦吐)의 풍토 속에서,
성삼문과 백일홍이 전하는 메시지는 더욱 깊이 와닿는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삶.
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며 전하는 이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길 때, 비로소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맑은뉴스(https://www.ccn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