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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전에 대항 환상
겔 40:1-4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겔 40:1-4 / [새 성전의 환상] 우리가 포로로 잡혀 온 지 25년이 되고 예루살렘 도성이 멸망한 지 14년째가 되는 해 1월 10일에 여호와의 손이 나를 붙잡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셨다. 2) 온갖 신비한 환상들 속에서 주님은 나를 데려다가 이스라엘 땅의 아주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셨다. 그 산의 남쪽에는 성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3) 주께서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셨을 때 보니 구리로 만든 사람처럼 빛이 나는 한 사람이 손에 삼으로 꼰 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들고 대문에 서 있었다. 4) 이때에 그가 내게 말하였다. `너 사람아, 너는 이제 두 눈과 두 귀를 열고 내가 보여주는 것을 똑똑히 보아라. 네게 이것을 보이고자 주께서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본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주어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포로되었던 이스라엘과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앞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성전의 환상(1-2) 하나님의 권능이 임한 선지자 에스겔에게 구체적인 징표로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 성전이 무너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보게 하십니다. 이는 그가 최종적으로 받은 예언이자 에스겔서의 대망으로서, 성전회복에 대한 이상입니다. 이 시기는 주전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주전 593년)로 부터 약 이십년이 경과한 시기입니다(1:1, 2; 33:21). 뿐만 아니라 이날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여기서 ‘극히 높은 산’은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의미합니다(17:22, 23; 욜 2:32). 이사야, 미가 등 여러 선지자들은 말일 곧 메시야 임재의 때에 이 산 위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것으로 예언하였습니다(사 2:2; 미 4:1). 또한 ‘다윗 성’(왕상 8:1; 대하 5:2)을 지칭했으며, 후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뀐 것으로(사 10:24),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을 특별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사 2:2; 미 4:1; 계 21:10).
본 것을 전하라(3-4)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놋’은 성경에서 ‘견고함과 확실성’(렘 15;20),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천사(1:7)의 초자연적 특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삼 줄과 척량하는 장대는 모두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로써 ‘삼 줄’은 긴 공간을 재는 도구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되었으며, ‘척량하는 장대’는 비교적 짧은 공간 곧 성벽 등의 높이를 잴 때 사용된 도구로서 앞으로 보여 줄 성전의 구조가 얼마나 세밀하게 제시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비록 새 성전이 역사적으로 세워지지는 않았으나 이미 완성된 것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환상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라는 것입니다(시 120:1-2).
적용: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에게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장래 일을 말하며, 꿈을 꾸며 이상을 볼 것”(욜 2:28)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기도가 내 인생보다 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내려놓았던 기도가 하나님의 예정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을 통해서 익히 들은 바 입니다. 내가 부르짖었던 기도는 아직도 주님 가까이에서 대기 중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남의 믿음보다는 우리 자신의 믿음이 우리 인생에 훨씬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 설 교 >
너는 본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겔 40장 1-49 / 손재호 목사
에스겔서 33-48장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33-39장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의 백성과 언약을 회복하고 그의 백성 안에 계시면서, 그 백성은 땅에서 예배하며 번성하고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메시지의 마지막 말씀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적인 마곡 땅의 곡과 그의 연합군을 하나님께서 전멸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온 세상이 알게 하십니다(39:13, 21, 24, 29). 40-48장 말씀은 33-39장에서 이야기체로 한 회복의 메시지를 그림 언어로 다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에스겔 선지자에게 환상을 통해서 자신의 성전을 이 땅에 회복하시고(40:1-43:12), 제사장과 왕을 다시 세워 섬기게 하시며(43:13-46), 그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고(47-48장), 그 거룩한 도시를 세우실 것을 말씀합니다(48장). 이 놀라운 하나님의 회복 역사의 중심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입니다(47:1-12). 그래서 그 성의 이름을 ‘여호와 샴마’ 곧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라는 말로서 에스겔서 말씀을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0-48장 말씀은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의 말씀인 38장과 39장을 통하여 보여주신 후에 주신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시간에 요한계시록과 연결하여 보았습니다만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악의 세력이 심판을 당하고 나서 새로운 성전과 새로운 땅의 분배는 참된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성전의 바깥 뜰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사로잡혀 온지 이십 오년 곧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에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이 날은 유대의 옛날 달력으로 하면 희년의 나팔을 부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이상 중에 새로운 성전을 본 것이 하나님의 회복과 연결시켜서 보기도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서 이스라엘 땅 매우 높은 산위에 내려놓아집니다. 이 산은 예루살렘이 있는 시온산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보다는 높은 곳이기는 하지만 매우 높은 곳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 매우 높은 산에 내려 놓았다”라는 이런 표현은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가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곳을 매우 높은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높은 곳에서 남쪽을 향하여 보는데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성읍은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놋과 같이 빛난 형상을 한 사람이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다”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보고 말하는 것을 귀로 듣고 보고 들은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하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을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마음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는 이 성전이 모세나 솔로몬이 성막이나 성전의 설계도대로 건축될 건물로 된 성전이라면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이상 중에 본 성전은 단지 건물로 된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47:1-12절을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면 성전 동편 문지방 밑으로 물이 흘러나옵니다. 건물에서 문지방 밑으로 물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 보면 성전 동편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점점 불어나서 큰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이 강물이 가는 곳 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물이 흘러가는 강가로 나무가 자라고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니 바닷물이 살아납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납니다. 강 좌우에 과실나무가 자라고 그 잎이 시들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은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은 약재료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물이 나오는 곳이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본 성전은 장차 생명수를 공급하실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39절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에는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사 때에 전제처럼 붓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에 이런 풍습을 배경 삼아 참된 생수는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렇습니다. 이 생수는 바로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가 이상 중에 본 성전을 마음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그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바로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건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약은 아직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건물이 지어집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어진 이상대로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후에 예수님 당시에 헤롯성전이라고 불리는 성전도 에스겔의 이상 중에 본 성전은 아닙니다. 이상 중에 본 성전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둔 부분은 모세와 솔로몬이 건축한 성소와 지성소의 모양과 같지만 그 크기는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건물로 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 2:19-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주심으로 성령이 임한 성도가 바로 성전이 됩니다(참조. 고전 3:16, 6:19). 그런데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이 된 것을 신약에서도 건물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 지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20-22절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을 통해서 본 성전이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 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 대요, 고도 한 장대며”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전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었습니다. 그 담의 두께와 높이는 한 장대 곧 약 3.2미터가 됩니다. 이 담은 성전 안과 밖을 분리하는 담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담입니다(참조. 엡 2장). 곧 이 담은 거룩함과 거룩하지 못함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 담으로 유대인이 이방인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담을 자기 육체로 헐어내시고 자기 피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담이 에스겔서 42:15-20절 말씀에도 나옵니다. 에스겔 42:15-20절을 보면 “그가 안에 있는 전 척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향한 문 길로 나가서 사면 담을 척량하는데 그가 척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북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남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서편으로 돌이켜 그 장대로 척량하니 오백척이라.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담은 정 사각형으로 된 담인데 한 면이 오백척 곧 약 250미터가 됩니다. 이 담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우리가 본대로 이 담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예수 그리스도 밖이냐 하는 것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제는 어떤 특정 건물과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이냐 그리스도 밖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46절까지는 성전의 바깥뜰을 말합니다. 성전 바깥뜰은 다시 ‘바깥뜰’과 ‘안뜰’로 나누어집니다. 6-16절에 보면 먼저 동향한 문에 이르러 그 현관을 측량합니다. 현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현관 좌우에는 세 개씩 전체 여섯 개의 문지기의 방이 있습니다. 그 방의 문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서 원래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같은 재료가 사용되었습니다. 17-19절을 보면 바깥뜰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박석 즉 벽돌로 포장되어 있습니다(참조. 대하 7:3). 동쪽과 북쪽과 남쪽 담의 중간에는 현관이 있습니다. 현관 좌우로 바깥뜰은 건물을 좌우로 각각 5개씩 한 방향에 열 개, 그래서 총 삼십 개의 방들이 있습니다. 이 방들은 42:5절을 참조 해 볼 때 그냥 기둥만 있는 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바깥뜰의 공간은 성전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사용합니다. 20-23절 말씀은 북쪽 문과 현관의 측량입니다. 그리고 24-27절 말씀은 남쪽 문과 현관의 측량입니다.
28-37절은 성전 바깥의 안뜰의 측량인데 28-31절은 안뜰의 남쪽 문과 현관의 측량입니다. 성전 안뜰은 성전 바깥 구역의 안쪽 뜰을 말합니다. 이 안뜰 문을 통하여 성전 건물이 있는 성전의 뜰로 들어옵니다. 성전 안뜰의 문의 현관도 바깥뜰과 같이 층계가 있습니다. 바깥뜰은 일곱 개의 층계가 있지만 안뜰의 문은 여덟 개의 층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거룩함의 정도가 높아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안뜰의 현관도 바깥뜰의 현관과 같이 벽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깥 뜰로 들어가는 문 현관의 좌우처럼 안뜰 현관의 좌우에도 여섯 개의 문지기 방이 있습니다. 38-42절에 보면 안뜰에 들어가는 현관에 붙은 제사 준비용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안뜰의 현관문의 왼쪽 코너에는 특별한 방이 있습니다. 이 방은 제물을 잡아서 씻는 상이 이 방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번제에 쓰는 또 다른 상이 있습니다. 희생의 고기를 삶아서 낼 때 쓰는 갈고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방은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리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44-46절을 보면 안뜰의 현관 안쪽에 두 개의 방이 있습니다. 안뜰의 현관 안쪽은 성전 건물을 둘러싼 성전 뜰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북쪽과 남쪽의 코너에 각각 한 개씩의 방이 있습니다. 한 방은 성전 건물 안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고, 한 방은 성전 뜰에 있는 제단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쓰는 방입니다. 48-49절은 성전 앞뜰 현관에 관한 말씀입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에 대한 환상을 전체적인 평면도로 보자면 정 사각형의 담으로 구별된 곳으로 그 안에는 뜰이 있고 뜰 안에 내전이 있습니다. 이 직사각형 내전 안에 다시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와 지성소는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과 크기만 다르지 형태는 같은 모양입니다. 이런 성전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 중에 보여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여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마저 파괴된지 십사 년 후에 에스겔이 전한 이 성전에 대한 이상을 듣고서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범죄와 절망에도 불구하고 다시 포로에서 회복시켜 주시고 성전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말씀을 보는 우리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게 됩니까? 이제는 건물로 된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성전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주의 보내심을 따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은 그 머리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성소를 사모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9:9-12절을 보면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하늘 성소를 요한계시록 22:1-5절과 에스겔서 47장의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절을 보면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가 이상 중에 본 성전의 결론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우리의 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수를 마시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영광스러운 새 성전의 비전
서론
“우리가 사로잡힌 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겔40:1) 에스겔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인데, 포로가 된 때는 B. C. 598년입니다. 598년에서 25년이 지났으니까 이 이상이 임한 때는 B. C. 573년입니다. 그리고 성이 함락되었다고 했는데 이 성은 예루살렘 성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때는 B. C. 587년이고, 14년이 흘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상이 임한 때가 B. C. 573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에스겔 선지자가 B. C. 573년에 이 비전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어도 하나님이 임하여 비전을 주시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디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여기 에스겔이 본 이상은 아홉 개의 장으로 내용이 길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핵심은 성전이 회복될 것이며, 예배가 회복될 것이고, 이스라엘 땅이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용이 어려워서 유대인들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에스겔 40~48장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 본문을 읽고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부모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오면 가르쳐 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들도 모르고, 유대인들도 모르고, 성서 해석학자도 잘 모르는 대단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기 때문에 피해서 지나가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에스겔 40~42장을 중심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새 성전 비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서 이상 중에 이스라엘 땅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에스겔의 영혼을 끄집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에스겔의 육신은 바벨론에 있고,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극히 높은 산에 내려놓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시온산은 해발 750m입니다.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산을 극히 높은 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이 시온산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시온산은 종교(宗敎)의 핵심이 되는 산이기 때문에 극히 높은 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극히 높은 산에 내려다보니 성읍 형상 같은 것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성읍 형상이 에스겔이 본 새로운 성전이 환상입니다. 그리고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손에 척량기구를 들고 있습니다. 한 손에는 삼줄을 들고 있고, 또 한 손에는 장대가 있습니다. 이 장대는 작은 장대가 아니고 여섯 척이나 되는 큰 장대입니다. 한 척의 길이가 45cm 정도 되지만, 성전을 척량하는 한 척의 길이는 55cm 정도 됩니다.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잡고 있는 장대는 여섯 척이라 했기 때문에 3,3m입니다. 즉 삼줄과 장대를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는 것입니다.
놋 같이 빛나는 사람에 대해 학자들은 천사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말합니다.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이 아닌 영적인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분이 에스겔에게 말씀합니다. “에스겔아, 너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증거해라”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Ⅰ. 새 성전의 이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담’은 동서남북 정사각형으로 되었고, 한 면이 500척(275m)이고, 높이는 6척(3.3m)이고, 넓이는 6척(3.3m)입니다. 엄청 큰 담입니다. 동문, 남문, 북문이 있고 서쪽에는 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쪽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대문처럼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깥문과 안문이 있습니다. 바깥문과 안문 사이를 문간이라고 하는데 문간의 길이가 50척(27.5m)입니다. 문간에는 방이 양쪽으로 각각 세 개씩 있습니다. 합 6개 입니다. 이곳은 문지기가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담은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입니까?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 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겔42:20) 이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새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동문, 남문, 북문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일곱 계단을 올라가야 갑니다. 그리고 여기에 뜰이 있는데 바깥 뜰, 안 뜰, 성전 뜰이 있습니다. 안 뜰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도 동문, 남문, 북문 세 개가 있습니다. 바깥문과 구조가 같습니다. 그리고 안 뜰 문간에는 제사장이 살고 있습니다. 또 안 뜰에서 성전 뜰로 가는 계단은 여덟 계단입니다. 여덟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하여 안 뜰로 들어가게 되면 제단과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은 세로가 100척(55m), 가로가 20척(11m)입니다. 성전의 2/3는 성소라고 하며, 1/3은 지성소라고 합니다. 성전 좌우로는 방들이 많이 있는데, 이 방은 제사장이 사는 곳입니다. 방들 뒤에 또 방이 있는데, 제사장의 부엌입니다. 백성은 네 귀퉁이마다 있는 부엌에서 밥을 해 먹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성전인데, 이 성전 안에 들어가면 벽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벽화는 모두 종려나무 그림입니다. 종려나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과 풍요, 영광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과 다른 성전은 무엇이 다릅니까? 제1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입니다. 원래 다윗 왕이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짓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재료를 준비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이 유다 백성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B. C. 58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B. C. 539년에 고레스 칙령으로 돌아와 B. C. 516년에 성전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 성전을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님 당시에 헤롯 대왕이 스룹바벨이 성전이 작다고 하여 증축했습니다. 이 성전을 제3성전 헤롯 성전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성전들과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비전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다른 성전들에도 뜰이 세 곳이 있지만, 이름이 각각 다릅니다. 바깥에 있는 뜰은 이방인의 뜰, 안에 있는 뜰은 여인의 뜰, 더 안쪽에 있는 뜰은 유대인 제사장의 뜰 혹은 남자의 뜰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에스겔 성전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자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방인도 구원하십니다.
둘째, 에스겔이 본 성전 안에는 떡 상, 금 촛대, 분향 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실체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떡과 빛이 되시며,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기도를 올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려 속죄함으로 인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본 새 성전에는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룹 천사가 지키지도 않습니다. 법궤 안에는 원래 세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의 두 돌비,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가 들어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이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다 이루시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속량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만나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성전 안에는 그림자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것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또 물두멍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었는데 이제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 정결함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물두멍이 필요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은 구약 시대의 성전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성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Ⅱ. 새 성전에 대한 해석
1. 문자적으로 해석은 불가능하다.
에스겔이 본 것은 환상이지 육신의 눈으로 물리적인 성전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상을 영적으로 해석해야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새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이 생명수는 발목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고, 온 천하가 헤엄칠 수 있는 물이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겠습니까? 문자적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문자적인 해석을 하는 세대주의자들도 이것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이 생명수가 되어 천하 만민을 구원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도 문자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영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은 과거에도 지어진 적이 없습니다. 또 앞으로도 이런 성전을 짓는 다고해도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2. 일부 유대인(성전협회)과 세대주의자들은 아직도 문자적, 미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모슬렘 성전이 지어진 곳에 모슬렘 성전이 헐리고, 에스겔의 성전이 지어질 것을 기다리고 있는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 중 어떤 사람들은‘templeinstitute(성전협회)’라고 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 이슬람 성전이 파괴되고, 새 성전을 지으려면 재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면서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에스겔이 이상 중에 본 성전을 미래적, 문자적으로 결코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3. 바른 성서적인 이해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스가랴 6:12-13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와 같이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입니다. 스가랴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 순이(the Branch)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성전을 건축했습니까?
이 예언은 요한복음 2:19-21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메시야가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예수님의 육신이고, 예수님의 육신은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성전임을 증거하고 있고, 교회도 참 성전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이방 성도들도 역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19-21) 우리가 돌입니다(벧전 2:14). 우리는 성전의 한 돌입니다. 돌이 쌓이고 쌓여서 거룩한 집이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교회요, 제사장은 성도요, 제사는 참된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Ⅲ. 새 성전의 실천적 의미
새 성전 안에는 거룩한 사람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새 성전 밖에는 속된 것들만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들을 분리하는 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새 성전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새 성전 안에 들어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종려나무가 상징하는 것처럼, 즉 영원한 생명, 영원한 축복, 영원한 승리가 새 상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으면 영원한 생명, 축복, 승리가 없습니다.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새 성전은 그냥 들어오지 못합니다.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예수 믿지 않은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 안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바깥 뜰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안 뜰로 들어가야 하고, 여덟 계단을 넘어 성전 뜰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바깥 뜰에만 머무르게 하면 안 됩니다. 안 뜰로, 성전 뜰로 들어가는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성전 뜰로 가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한 번도 성령 체험을 못 한 사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바깥 뜰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한 번만 경험해도 변합니다. 그러나 평생 예수 믿어도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사람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기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 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끌고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결 론
바벨론에 포로가 된 유다 백성은 칠십 년에 후에 돌아간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칠십 년이 되기 전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어도 이 성전에 거할 백성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백성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성전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세상에서 교회가 없으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소망이 없으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다른 것들은 거짓된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해도 주일에 일하는 사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공부를 해도 교회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 공짜로 가르쳐 준다고 하는 사람 중 정상적인 사람을 못 봤습니다.
이 성전을 보면 규격이 너무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대충대충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정확하게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 정확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위대한 법칙을 주셨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죄로 심은 것은 죗값으로 거두고, 기도로 심은 것은 은혜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정확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소망을 두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깥 뜰에만 머무르지 마시고, 성전 뜰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 주신 마지막 성전
겔 40:1-4, 43:10-11
우리가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곧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vision)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겔 40:1-4).
인자야 너는 이 전(殿)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겔 43:10-11).
제가 이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목사로서 에스겔 성전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설교합니다. 지리산에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말씀을 깨달은 이후 처음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알아야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생각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연구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해봐야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셨지만 그 중에서도 에스겔만큼 고생 많이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30세에 선지자로 부름받은 뒤 20년이 지난 50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 대해 에스겔 40-48장에 기록했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이 세상에 한 번도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성전,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성전에 대해 기록한 에스겔 40-48장이야말로 신,구약 66권의 결론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다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성전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을 흉보고, 의심하고, 욕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에스겔 성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도적질하고 사기 치는 죄를 범해도 에스겔 성전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기업(基業)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고후 6:16). 남에게 눈 흘기고, 차별하고, “저 사람 나쁜 사람이야, 상대하지 마” 하고 욕하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혀를 금하라”(벧전 3:10)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 심판 날에 그 말에 대해 심문받습니다(마 12:36-37). 남의 얘기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사 시리즈 제7권 이후의 출간이 늦어지는 이유가 바로 에스겔 성전 때문입니다. 에스겔 성전에 대해서만 600페이지 분량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신구약의 결론인 성전에 대해 다루다 보니 내용이 방대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지막 성전에 대한 이상(vision)을 보고 듣게 하신 뒤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주님 재림하실 때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만 가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 기록된 새 예루살렘 성(城)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곳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거듭난 사람만 새 예루살렘의 성전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은 ‘여호와삼마’, 즉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에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거하십니다(계 21:3). 죽음이 영원히 없고, 아픈 것, 병드는 것이 없는 세계입니다. 에스겔 성전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돼 있으니, 내가 믿고 나도 가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앞으로 나올 구속사 시리즈에 에스겔 성전의 입체도, 평면도를 성경의 기록에 따라 그려서 컬러로 실을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의 어느 신학자도 손대지 못한 일입니다. 평강제일교회를 통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성전을 재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품으시는 하나님
매년 12월 14일은 허그데이라고 합니다.
허그데이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포옹해 주고 안아 주는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거리에 프리허그 라고 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프리허그! 안아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아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거리를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느닷없이 "안아 드릴까요?“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십중팔구 미친 사람이나 치한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어쩌면 뺨을 얻어맞을지도 모릅니다.
이 프리 허그 운동을 최초한 사람은 호주의 “후안만” 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는 2년 전부터 매주일 마다 시드니 거리에서 “프리허그” 라고 쓴 피켓을 들고는 길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공짜로 안아드립니다“ 하며 다가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멀찌감치 피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후아만” 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후아만의 캠페인에 동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참 좋은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동참하는 좋은 운동이 되었습니다.
프리허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포옹의 힘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정신치료는 물론 생명을 구하는 힘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심장 결함으로 죽음 직전에 있던 한 어린 아이가 건강한 쌍둥이 언니가 안아 주자 소생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포옹의 힘!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포옹을! 아니 이것 보다 더 뜨거운 포옹을 받은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누굽니까? 에스겔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을 포옹합니다.
1절을 보면 에스겔은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갔다” 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갔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을 안았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안고 이스라엘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안고 이스라엘로 데리고 갔을 때! 이때가 언제 일까요?
첫째로 1절을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 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 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때는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지 25년 되던 해,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지 14년 1개월 10일 되던 해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려서 망해 버렸을 때입니다.
에스겔이 망해 버렸을 때에! 이스라엘이 망하고 ,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 졌을 때에! 하나님이 에스겔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에스겔을 안고 이스라엘로 데리고 갔을 때!
이때는? 온 이스라엘과 에스겔이 절망 속에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었을 때에 그들은 그래도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이 조만간 회복 시켜 주시리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25년이 지나도 14년이 지나도 하나님은 까딱도 안하십니다.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버린 이스라엘 사람들과 에스겔 선지자!
다 절망합니다. 다 절망의 깊은 늪 속에 빠져 버립니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에스겔이 절망 속에 빠져 허덕거릴 때에 하나님이 환상 중에 에스겔을 찾아옵니다.
그럼 찾아오신 하나님! 에스겔에게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안고는 이스라엘로 데리고 갑니다.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매우 높은 산 위에 에스겔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보여 줍니다. 미래의 이스라엘 땅을 보여 줍니다.
미래에 세워질 성읍과 하나님의 성전의 모양과 크기를 보여 줍니다.
아니 보여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함께 그 성읍과 성전에 들어가 직접 그 모양과 크기를 측량을 합니다.
적당히 건성으로 보여주고 대충 대충 측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확실하게 측량합니다. 얼마나 확실하고 세밀하게 보여 주고 측량을 하는지 에스겔은 40장에서 48장까지 무려 9장에 걸쳐서 그 모양과 크기가 “이렇다, 저렇다”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린 여기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각자 각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현 처지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우리가 어떤 실수와 죄악을 범했든 간에, 우리에게 깊은 관심 갖고, 우리를 사랑을 품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심과 사랑을 줍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냉정하고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에게만 관심과 사랑을 줍니다.
실패하고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아주 가슴 아픈 소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형 제도를 그냥 내 두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기독교계에서 나라에 건의를 했습니다. 사형 제도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이건 너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면 없이 종신형을 주어서 감옥에서 죽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외국처럼 500년 형을 주거나, 천년 형을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법 재판소에서 사형제도에 합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즉, 현행의 사형제도는 위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속하는 것이, 그냥 내 두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형제도는 있지만 마지막 사형 집행은 김영삼 대통령 때! 차기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997년 12월 30일에 실시한 사형입니다. 그 후로 우리나라는 13년 동안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엔도 우리나라는 실제적으로 사형이 없는 나라로 이미 규정 발표를 했습니다.
그래 아예 없애자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우리 헌법재판소에서 거부를 한 것입니다.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 못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품어주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품어 주십니다. 그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은 품어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못된 사람이 한 사람 나옵니다. 누굽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탕자! 탕자는 정말 못된 아들입니다.
죽어도 품어 주어서는 안 되는 아들입니다.
1. 탕자는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쓴 아들입니다. 얼마나 떼를 쓰고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지 아버지가 유산을 떼어 줍니다.
2. 탕자는 아버지의 능력을 비웃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자본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아니 아버지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혼자 능력 있는 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한 아들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외국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그 많은 재산을 다 없앱니다. 사업을 하다가 없앤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했다고 말합니다. 허랑방탕하여 낭비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헛된 곳에, 방탕하게 썼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다 없앴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업 시도도 제대로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다 날렸다는 것입니다.
4. 탕자는 가문을 욕되게 한 아들입니다.
망했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비참하게 살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누구누구의 자식이라고, 어느 가문의 자식이라고,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아버지까지 가문까지, 나라까지 망신시킬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이 탕자가 견디다 견디다 못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봅니다.
아들이 뛰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뛰어 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깁니다.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힙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부릅니다.
풍악꾼을 부릅니다. 노래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온 동네잔치를 벌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잔치는 특별한 잔치입니다. 이건 아버지가 크게 마음을 쓴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런 잔치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게 특별한 잔치요, 아버지의 엄청난 결단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나중에 나타난 큰 아들! 툴툴 거립니다.
노골적으로 아버지에게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자기는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도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다 허비한 저 놈에게 이렇게 융숭한, 특별한 대접을 해 줄 수 있냐? 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특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자의 아버지! 지금 과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상시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탕자의 아버지! 개의치 않습니다. 기쁘게, 신이 나서 탕자를 맞이합니다.
이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 탕자의 아버지!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실수를 해도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좋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품으리니 내 품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자도 오고, 돈 없는 자도 오라고 말씀합니다.
돈 없어도 되고, 값없어도 되니 오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격이 없어도 되고, 염치가 없어도 되니 오라는 것입니다.
와서 포도주를 마시고, 젖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망해 버린 분이 계십니까?
절망 속에 빠져 버린 분이 계십니까?
완전히 소망을 잃어버린 분이 계십니까?
세상에, 사탄에게 속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분이 계십니까?
오늘 하나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품어 주리니 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회복해 주겠노라고 부르십니다.
회복을 약속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에는 TV 교회가 있습니다. 방송국에 시간을 사서 교회를 운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 TV 교회 교인입니다.
TV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선교를 합니다.
그런데 유명한 T.V 교회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은 “프레이즈 더 로드” 즉, “주를 찬양하라” 프로그램으로 T.V 교회를 창립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이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은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미국을 들썩거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온라인으로 셀 수도 없는 헌금이 매주 들어 왔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님은 이 T.V. 교회를 통해 들어온 헌금을 사치와 방탕으로 보냅니다. 그의 애완견의 개집에 에어컨을 설치할 정도입니다. 그는 디즈니랜드 정도의 엄청난 크리스천 위락시설을 짓겠노라고 돈을 보내라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를 좋아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많은 돈을 보냈고 그는 그 돈으로 엉뚱한 짓을 했습니다. 결국 짐 베이커 목사님은 사기 횡령죄로 기소되어 45년 장기 감옥형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감옥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철저히 회개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범수가 되어 5년 만에 출소를 하였습니다. 지금 짐 베이커 목사님은 LA의 빈민촌에서 자원봉사자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책을 썻습니다. “I WAS WRONG" "내가 잘못했다”는 책입니다.
그 책에 그를 변화시킨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어느 날 밤입니다.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목사님께 오더니 창피해 하는 목사님을 꼭 품어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눈알 하나와 자기 눈알 하나를 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뺀 눈알 하나를 자기 눈에 넣어 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 보거라” 이제는 너의 눈이 아니라 내 눈 나 예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짐 베이커 목사님의 삶은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부족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이제는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로 달려 나가 하나님의 넓은 품안에 안기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