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최 사장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면서 중얼거렸다.
육십이 거의 다 되어 보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얼굴에 핏기가 돌아 복숭앗빛처럼 발그스름한 최 사장은 산전수전을 다 헤친 듯 날카로운 눈에서는 여유가 뿜어져 나왔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사람은 죄를 지어 경찰서에 잡혀온 피의자처럼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공손한 태도고, 한 사람은 이를 신문하는 형사처럼 눈을 반쯤 감았으나 매서운 눈초리로 상대를 주시하고 있다. 수철에게 신원보증을 해 줄만한 사람도, 여건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회사든, 조그마한 가게든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꼭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신원보증서' 라는 것을 모를 리는 없지만 집을 나와 취직을 하려는 수철에게 이것을 내세우기에는 하늘에서 별을 따서 가지는 것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채용을 시켜주면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찬 쫄깃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안 되겠습니까?.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아, 세상이 어디 그러나. 자넬 뭘 믿고 채용을 해."
복잡하고 불확실한 사회에서 보증이라는 담보와 계약만이 존재 할 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처지가 이렇다 보니 사정한다고 될 문제가 아닌데도 이토록 사정하며 매달리는 것이다.
"사장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보답에 어긋나지 않도록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수철의 애원 섞인 말에 최 사장은 조금 전과는 달리 묵묵부답이다. 종전처럼 안 된다면 안 된다는 말 할 시간을 넘길 만큼 여전히 수철을 노려보고 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을 약간 아래로 깔고 있던 수철의 포도 알처럼 검고 투명한 눈 속으로는 애절함이 흐른다. 약간 상기되어 발그스름한 얼굴, 큰 눈이지만 떴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반쯤 감긴 눈으로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최 사장은 이윽고 오른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탁 치면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답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청년의 서글서글한 눈을 담보로 하지! 자네, 내일부터 출근하게."
최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수철에게 악수를 청했다. 세상을 많이 겪어 본 최 사장은 감각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지만 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어쨌든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힘차게 내리친 행동으로 볼 때 한 번 결정한 사항은 누구라도 되돌릴 수 없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내보인 것이다. 아무리 선한 눈을 담보로 했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착하고 열심히 일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일을 하다 보면 부주의로 사업주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으며, 열심히 잘 하겠다는 처음의 열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퇴색되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은가.
겉으로는 열심히 하겠다고 힘있게 말했지만 담보와 계약만이 존재하는 사회의 차가운 속성상 최 사장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는 포기를 하던 수철은 뜻밖의 수락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하다'는, '열심히 일 하겠다.'는 말을 번갈아 말했다.
실상 뜨내기를 보증 없이 채용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나 다름 아닐 것이다. 가게 일이 험하여 아무리 나설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일을 하게 되면 현금을 만지고 차량을 운전해야 할 처지이기에 대단히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 사장은 목을 꼬아 창고에서 매장으로 통하는 문을 막 나서는 후리후리한 키에 거뭇한 얼굴의 서른 대엿 보이는 나 과장을 바라보며 불러 세운다.
"나 과장, 이리 오게"
"네, 사장님"
"인사하게, 내일부터 같이 일할 사람일세."
"네에, 알겠습니다."
잘 길들여진 하인이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듯한 짧고, 야무진 대답이다.
"나경숩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나 과장은 수철에게 오른손을 불쑥 내민다. 거의 180 센티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눈매는 매서워 보였다.
"박 수철 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첫인상이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좋게 봐 주셔서......"
최 사장은 정오를 갓 넘긴 시간인데도 퇴근을 해야겠다는 혼잣말을 남기면서 입구 쪽으로 걸 어 문을 나서는 최 사장 뒷덜미에 두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 최 사장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른손을 가로 저으면서 문을 나서려 하자 나 과장은 사장의 뒤를 따르려는 수철을 밀치고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 가게 앞에 세워둔 승용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오르려는 최 사장을 향해 허리를 구 십 도로 굽혔다.
"사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가게 잘 보게. 나 과장."
"네, 염려 마십시오. 사장님."
승용차 문이 닫히자 엔진 소리와 함께 승용차는 가게를 뒤로하고 다른 차들과 섞여 어디론가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자 그들은 다시 가계 안으로 들어서서 의자에 앉았다.
"사장님은 거래처에 신경을 많이 쓰시고, 간혹 사모님이 오셔서 사장님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으며 경리 업무를 보지만 그는 잠깐 이죠. ! 그 외에는 내가 가겔 보죠."
"아, 그렇군요."
"근데, 형씨는 참 운이 좋군요. 여태까지는 여기 직원을 채용할 때는 여기 일하는 사람들의 친척이나 아는 사람 등 알음알음으로 했는데.....것도 내가 말입니다."
수철은 나 과장이 중간에 말을 잠깐 끊었다가 다시 이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말로서 마치고 있음을 의아했다. 뉘앙스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나 과장은 처음부터 자신을 비꼬는 듯한 인상을 주었으나 수철은 내색하지 않고 고분하게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정말 다행이네요."
하고 말았다.
나 과장은 혼자 가게를 둘러보라며 최 사장 책상 옆에 붙어 있는 자신의 자그마한 간이 책상으로 가서 노트에 무언가 기록을 했다. 수철은 고개를 약간 숙여 목례를 하고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매장은 50여 평으로 비교적 넓었으나 출입구와 창고로 향하는 문을 제외한 모든 벽에는 앵글로 짠 진열대가 천장 끝에 닿을 만큼 제품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어 그런지 조금은 답답하게 보였다.
출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키가 낮은 유리 진열대 뒤로 잘 정돈된 최 사장 책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전화기 3대와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컴퓨터 한 대가 놓여져 있었다.
책상 좌측 구석에는 거래처 장부와 오래된 듯한 노트 한 권이 포개져 있어 나 과장에게 물어보니 제품 가격을 적어 놓은 것이란다. 무언가 기록을 마친 나 과장은 자신의 책상 바로 옆에 있는 자그마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수철에게 권하면서 말했다.
"가게 일은 거의 내가 다 보지요"
"네...그러십니까? 그럼, 가게 살림을 모두 맡아서 하시는 거네요?"
"말하자면 그렇지요."
"........"
그러니까 나 과장이라는 사람은 이 가게의 핵심인 셈이다. 모든 업무는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즉 알파와 오메가 같은 존재다. 이 뿐 아니라 심지어는 직원들의 신상까지 파악하여 나름대로 처리하는 것을 보면 나 과장에 대한 최 사장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가게가 많이 커졌지만 10년 전 자신이 처음 들어 왔을 땐 최 사장과 사모님 그리고 자신, 세 사람이 가게를 꾸려가도 될 만큼 작았단다.
그때는 주로 여기 보다 훨씬 큰 서울의 대형가게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받아 파는 중간 도매 역할 밖에 못했지만 약 5년 전부터 가격이 싼 중국제품들을 직수입하였는데 수입시기와 최 사장의 사업 운이 따라줘서 그런지 매출이 급성장하여 그 후로는 거의 대부분의 물건들을 서울의 대형 가게처럼 제조회사에서 대량으로 구입하여 가격에 대한 경쟁력을 높였다 한다.
이런 큰 가게에 알음알음이 아니라 출입구의 구인 광고를 보고 들어왔던 자신을, 그것도 신원보증도 없이 채용시켜준 최 사장의 고마운 마음에 빚을 진 느낌이 들었다.
나 과장은 나말고도 몇 사람이 방문했지만 최 사장은 두 어 마디 말을 붙여 볼 정도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려보냈단다. 커피를 마시며 채용 배경을 듣던 수철은 다 마신 빈 종이 잔을 자판기 옆 휴지통에 넣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젠 말씀도 놓으시고요. 한참 동생뻘인데요...."
"이젠 돌아가도 됩니다. 그럼, 내일 아침 10시까지 출근해요."
나 과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 사장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 벨이 울리자 의자로 가 앉더니 고개를 외로 곤 채로 송수화기를 잡으면서 전화를 받는다.
"뭐야! 그 건 그렇게 하면 안 돼? 김 기사, 그러지 말고 그냥 들어오너라!"
나 과장은 나가지 않고 통화를 듣고 있는 수철을 계속 응시하며 송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김 기사라는 사람에게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업무 전화구나, 생각을 하고 통 유리로 된 가게문을 밀치며 나서는 수철에게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왼손으로 송수화기를 막고 말했다.
"그럼. 내일 봐요."
"네. 과장님."
수철이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는 사이 밀쳐진 문은 제자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다음 날 출근을 한 수철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가게 청소부터 했다. 일이라고 해야 처음이라서 그런지 단순했다. 손님이 물건을 빼내어 간 자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과 주문한 물건들을 다른 기사들이 포장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 그리고 이것들을 손님의 차에 실어주는 것이 전부다. 제품을 두터운 종이박스에 가지런히 챙겨 넣고 누런 테이프로 포장을 마치고 차에 실을 때는 혼자서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울 때도 있었다.
이럴 때는 다른 기사는 물론 모두가 서로 거들어 서로 도와주면서 했다. 하지만, 손님이 적어온 주문 종이를 받아들고 스스로 물건을 챙겨 포장을 하고 영수증을 끊어줄 만큼 노련한 손놀림이 되기까지 수철은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 과장은 웃으면서 수철 앞에 섰다.
"박 기사는 다른 사람 보다 일을 빨리 배우는 구먼"
나 과장의 이러한 칭찬에 수철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잠깐 생각하다가
"뭘요, 다 과장님이 도와준 덕분이죠."
이런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실상 수철은 일부러 이런 말을 들으려고 노력한 것도, 다른 직원들을 추월하려고 이를 악 문 것도 아닌, 그저 늦게 들어 왔으니, 빨리 일에 적응하려고 어느 제품은 어디에 있고, 어떨 때 쓰는 것이며, 제품 하나 하나의 입출고 단가는 얼마인지, 일을 하면서 머릿속을 더듬더듬 한 것 뿐 이었다.
일을 빨리 배우게 된 것은 나 과장이 도와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언행에 따른 이삭줍기였으며 이것 또한 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오히려 어느 순간인가 꼭 찍어 말할 수 없으나 직원들이 자신을 피하는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일별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대했다.
이러기에 새로운 제품이 들어오면 특징과 입출고 가격을 다른 직원 보다 먼저 외워 주문서를 작성하여 도움을 주려고 하였으나 의도적인 따돌림에 머쓱했으므로 때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자신을 집단 따돌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수철은 내색하지 않고 나름대로 일을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한 번 물건을 빼낸 자리는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정리하면서 가격과 용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하려고 했으며 최 사장 책상 위의 낡은 노트에 적힌 가격표를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제품의 실물을 연상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 과장의 칭찬이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불과 두 시간도 되지 않았다.
수철은 이 말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장에서 창고로 들어가는 문 바로 위의 앵글선반에 진열되어 있는 이상하게 생긴 제품 하나를 꺼내 들고 어디에 사용하는 건지 몰라 포장 뒤의 설명서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꼬아 보니 김 주임이 엷은 웃음으로 서 있었다. 순간 노르스름하고 투명한 김 주임의 눈과 포도 알처럼 검고 서글서글한 수철의 눈이 정통으로 엇갈렸다.
김 주임은 잠깐 진한 웃음을 후 한 쪽 눈을 찡긋하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는 듯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두 번 까딱거리고 창고로 빨려 들어갔다.
무슨 일일까, 손에 든 제품을 제자리에 두고 김 주임 뒤를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일을 배우는 것도 그랬지만, 나 과장의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직원들이 자신을 따돌리려는 기색이 괴로웠다. 수철은 내색하지 않고 나름대로 그들과의 관계복원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썼으나 김 주임이 자신을 만나자고 하는 손짓은 의외였으리 만큼, 궁금증을 너머 불안한 생각을 갖기에 충분했다.
매장에 직원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 아닌 만큼, 항상 혼자 있는 것처럼 자신과 대화를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어쩌다 업무관계로 말을 하게 될 경우에도 건성으로 한마디 툭, 던지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기에 상대가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은 수철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필경 무슨 흉계를 꾸미려는 것일까.
자신보다 5살 위인 김 주임이 주위를 살피면서 자신을 보자고 한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언제나 혼자 아닌 혼자였기에 반갑기도 했다. 반가움으로 끝나야 할 텐데, 하면서 눈을 풀었다.
최 기사는 배달 가고 없었고, 나 과장과 김 기사가 식사 교대하기 위해 먼저 가게 옆 자그마한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으므로 매장에는 김 주임과 수철 두 사람뿐이었다.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몰라 주위를 살핀 뒤 수철을 창고로 부른 모양이다.
먼저 들어가 있던 김 주임은 이어 들어와 창고 입구 벽에 기댄 수철을 보고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박 기사, 나 과장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어때?"
"........"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듣고 싶어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번뜩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쳤다.
"괜찮아. 얘길 해 봐. 느낌이 있을게 아냐?"
자신을 따돌림 하던 직원들 중 그나마도 김 주임은 다른 직원들보다 덜했지만 무턱대고 나 과장을 평하는 듯한 말을 하고 싶지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입을 다문 것이다.
여태까지 근무를 하면서 누구에게라도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진 고통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 과장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로 표현한다면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그럴만한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네, 그런 칭찬을 들어도 기분 안 좋아요. 처음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누굴 놀리는 것 같더라구요. 제가 뭘 잘못했기에 과장님이 직원들 시켜서 절 따돌리게 하는지 알 수도 없어요. 그리고 최 사장에게 필요 이상으로 아부하는 것조차 눈꼴사납고요, 하여간 가까이 하기에는 좀 어려운 사람이더라구요. '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이런 말을 도로 집어넣느라 수철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칭찬 받으니 기분이 좋은데요."
자신을 멀건이 보면서
"박 기산 아직 뭔가를 모르고 있군 그래."
"........무슨....."
"나 과장을 조심해야 돼. 박 기사."
김 주임은 이렇게 딱 세 마디 말만 남기고 매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것도 마지막 말의 '나 과장을 조심해야 돼, 박 기사.' 에 대한 수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수철의 어깨를 가볍게 한 번 툭 치고 혹시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날듯이 창고를 재빠르게 빠져나간 것이다.
'나 과장을 조심해야 돼. 박 기사' 라고 김 주임이 던진 말은 나 과장이 칭찬 조로 '박 기사는 다른 사람보다 일을 빨리 배우는구먼'에 대한 대처 요령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곧 민방위 훈련을 하니 어디로 어떻게 대피를 해야 한다는 피신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까. 호의로 하는 소리인지, 나 과장의 묵인으로 또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므로 수철은 오후 내내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했다. 정말로 진실을 알 수 없는 사람들뿐이다.
열심히 일을 한 덕분일까 수철은 웬만한 것은 혼자 처리할 정도로 익숙해졌을 무렵, 가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최 사장 책상 앞의 유리 진열장 안을 정리하던 수철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삼신상삽니까? 나, 손공구요."
"아, 손 사장님 이시네요. 전 박 기삽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릉의 단오, 진해 군항제, 야시장 등 전국 행사장을 돌며 장사를 하는 소위 장돌림 손 사장이다. 가게에서 주로 취급하는 제품들이 공구라서 그런지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대개 성씨 뒤에 '공구'라는 자랑스러운 훈장 아닌 훈장을 달고 다녔기에 손 사장 역시 환갑이 다 된 나이지만 스스로를 '손 공구'라는 이름을 달고 다녔다. 이 바닥에선 '손 공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기도 했고, 큰 곳을 다니므로 삼신상사에 대 고객이기도 하다.
"박 기사. 주문할 것 있으니 적어 봐요."
"네, 천천히 불러 주십시오."
하면서 주문서를 작성할 준비를 하였다
"아맥스 십자드라이버 다섯 개......., 일자 두 개......., 십팔 인치 이 십일 인치 중국산 파이프렌치 각 두 개.....,포장 테이프 열 개.....청 테이프......
"네, 이게 전부 입니까? "
"그래, 것 밖에 안 돼."
"그럼, 제가 한번 불러 볼게요. 아맥스 십자드라이버 다섯 개, 일자 두 개, 십 팔 인치........이게 다죠? 손 사장님."
"맞아, 계산서와 함께 여기로 배달을 좀 해주면 안 될까. 나, 지금 바빠서 못 가거든."
"지금 계신 곳이 어디십니까?"
"여기 창원이야. 내일 바로 밀양에 가려니 구색이 빠져서 그래, 미안하지만 좀 배달 해 주거라. "
"거기 까진 곤란한데요.....요것 가지고는...."
"아, 이거 왜이래. 내가 그쪽과 거래한지 십 년이 되었지만 이런 부탁은 첨이야 첨, 형편이 급하니 좀 봐 주라."
"그럼, 그르죠 뭐."
수철은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천천히 놓으면서 최 사장 책상 뒤쪽 벽 위 부분에 걸린 동그란 벽시계에 눈을 돌렸다. 오후 다섯 시 사십 분을 가르치는 시계가 수철의 눈에 순간 빨려들었다.
손 사장이 장사를 하는 창원까지 배달을 가려면 지금부터 물건을 챙겨 나서더라도 일곱 시 삼십 분 퇴근시간까지는 돌아 올 수 없는 거리인 것이다. 수철이 한창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데 나 과장은 언제 수철의 곁에 왔는지 책상 위에 주문서를 한 손으로 집어 들면서 말했다.
"어디서 주문한 전화야?"
"손 사장님이 사정이 급하게 됐다며 창원으로 배달 오래요, 지금."
"그래서, 그럼 간다구 했어? 지금 이 시간에...."
"....네에"
예전에도 손님 중에서 간혹 늦은 시간에 배달해 달라는 일이 있긴 있었다. 주문한 양이 적으면 가지 않았지만, 많을 경우엔 퇴근 시간을 넘겨서라도 배달했는데 오늘은 구색이 빠져 보충하는 수준이었으나 상대가 대 고객인 손 사장이라서 나 과장이 아니라 누구라도 배달 허락을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배달한다고 그래! 내게 물어 보지도 않고, 왜, 니 맘대로 배달해 준다고 했어!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도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나 과장의 거무스레한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마침내 가면을 스스로 벗어 던졌다. 입에서 시커먼 단어가 봇물 터진 듯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손에 쥐었던 주문서를 매장 바닥에 팽개친 나 과장의 목에서 시퍼런 힘줄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놀란 수철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깐 나 과장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 과장은 고개를 숙여 땅만 쳐다보는 수철의 머리 위로 연이은 서릿발이 쏟아 졌다.
"십 오 만원 어치 가지고 어떻게 창원까지 배달을 간단 말이야? 퇴근 시간을 넘기면서 까지 창원을 다녀오는 문제가 아냐! 갈 사람이 없으면 박 기사 자네가 가면 되지만 차 기름 값에, 왕복 고속도로 통행료를 따지면 뭐가 남아! 적자야, 적자! 알기나 해? 알만한 게 까불고 있어! 이런 건 내가 아니라도 사장님의 방침이야! 그리고 상인들은 한 번 청을 들어 주면 계속 들어줘야 하니 아예 처음부터 누굴 막론하고 이런 부탁은 잘라야 해! 여태까지도 그랬고...... 멍청하게 시리..."
나 과장의 꾸지람은 일에 대한 잘못을 따지는 책망이기 보다 모욕 그 자체다.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눈을 부릅뜨고 처음에는 저도 안 된다고 했지만 사정이 딱한 것 같았고 또 손 사장 같은 분은 큰손님 아닙니까. 장살 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손 사장 마음이 틀어지면 어떡하려고요? 그리고 과장님은 저를 왜 그렇게 못마땅하게 구시는 겁니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철은 마음을 꾹 눌러버렸다.
사장 다음으로 권한을 움켜쥐고 있는 나 과장을 자극해서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 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나 과장의 나무람이 섬뜩할 정도로 폭언을 하는 내면에는 이 뿐만 아니라는 것을 수철은 잘 안다. 오랜만에 몸을 아끼지 않고, 똑똑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장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조바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해. 분명하다고. 한발자국 물러서는 것이 좋을 듯싶어 목구멍에 접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꺼냈다.
"죄송합니다...과장님."
"죄송하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야. 못 간다고 빨리 연락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박 기사, 앞으로 조심해. 한 번만 더 뉘 맘대로 하다간 큰코다칠 줄 알아. "
경고성 말투다.
"........."
호되게 당하던 수철은 문득 얼마 전 창고에서 김 주임이 일러준 '나 과장 조심해야 돼, 박 기사.' 한 말이 생각났다. 이런 말을 들은 후 나 과장을 대할 때마다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가듯 조심 또 조심했지만 오늘 같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로서 수철을 벼르고 있던 그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이 나 과장 말대로 최 사장의 뜻일까. 이만큼 사업을 성공시킨 것으로 봐서는 그럴 것 같지는 않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리가...
앞을 내다본다면 이런 경우는! 예외가 될 법하기도 했지만 꾸지람치고는 가히 살인적일 만큼 쓰레기 같은 말을 들은 수철은 이로 벗겨진 나 과장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면을 벗어 던진 실제의 나 과장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진 악마의 모습이었다.
손 사장에게 다시 연락하기 위해 내려놓았던 전화기를 집어 들면서 슬쩍 나 과장 쪽을 훔쳐보니 거무스레한 그의 얼굴은 아직도 석양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목에는 핏발의 떨림이 여전했다.
"박 기삽니다, 손 사장님."
"아, 박 기사 지금 출발하려고?
"그게 아니고요, 가게 사정상 배달이 어렵게 됐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아낀 해준다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손 사장님.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왜 이래, 장살 그따위로 할거야? 정말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당장, 사장 바꿔!
"죄송합니다, 손 사장님. 사장님은 오전에 퇴근 하셨고 요. 배달 갈 사람이 없어서 그러니 오해 마십시오. 죄송하게 됐습니다."
수철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럼, 나 과장 바꿔!"
수철은 고개를 약간 돌려 나 과장의 눈치를 살폈다. 나 과장은 한바탕 싸움이라도 한 듯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전화를 하는 수철을 향해 눈빛을 태우는 것이 마치 자신이 조금이라도 반항적이거나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게 할 듯한 자세라 미칠 지경이다.
자신을 제외한 직원들에게는 일을 하다가 설령 잘못을 해도 조금 전 자신에게 한 것처럼 혹독하게 하지는 않았음이 분명했다. 서러움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기껏해야 '그러면 되나! 그럼 안 되지.'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나 과장이 필요 이상으로 최 사장에게 아부하는 것도 눈꼴사납지 않게 봐 주었고,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라주는, 소위 예스맨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은 힘들게 시키더라도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나 과장을 미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니까.
잠시 눈치를 살피던 수철은 기어코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허리를 굽히며 전화를 이어갔다.
"과장님도 지금 자리에 안 계세요. 아무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손 사장님."
이렇게 어물쩍 넘어 갔다. 수화기 저 쪽에서 '씨팔'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었다. 수철은 전화를 끊고도 분명히 자신을 제어하려는 나 과장의 술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직원들 중 제일 늦게 들어온 자신에게 가혹할 만큼 야단칠 리 없지 않는가. '분명해, 틀림없어.' 오달지고 총명한 수철의 깔끔한 일 처리에 나 과장의 견제는 극에 달해 수철의 목을 서서히 조여들고 있었다.
며칠 후 김해 거래처에 배달 건수가 있어 두터운 종이 박스에 주문한 제품을 포장해서 화물 승합차에 실은 다음 출발했다. 산업도로를 지나 낙동대교에 진입할 무렵 매서운 바람이 차가 달리는 속도만큼이나 맹렬히 차장을 스쳐 지나갔다. 겨울의 낙동대교는 수철의 가슴만큼이나 황량해 보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 거래처에 도달한 수철은 사장을 만났다.
"김 사장님, 안녕하세요. 배달 왔습니다."
"어....박 기사, 왔구먼. 그래, 수고했어."
수철은 제품을 포장한 박스를 차에서 내렸고 나서 주문서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사장님."
계산기로 한참 주문한 내용과 금액을 확인하던 김 사장은 필체로 보아 작성자가 수철 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박 기산 주문할 때마다 빈틈이 없어, 다른 기사는 간혹 틀릴 때가 있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화가 나기도 했고...결재는 며칠 있다가 보낼 테니 달아 두라고."
"배달하면 바로 결재해 주신다구 하던데요?"
"누가 그래? 난 결재에 대해선 아무소릴 안 했는데...."
"나 과장님이 그러던 데요."
"내가 전화 넣을 테니 그냥 가면 돼."
조금 전 칭찬할 때와는 다르게 퉁명스런 말투다.
"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사장님."
왔던 길을 되돌아 온 수철은 차를 가게 앞 공터에 세우고 화장실에 잠시 들러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는 나 과장 앞으로 가 다녀온 일을 보고했다. 그런데 나 과장은 수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눈을 먼저 부라렸다.
"박 기사, 월요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오늘이 토요일이고 내일은 어차피 쉬는 날이기에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만 두라는 소리나 다름 아니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낮선 곳에서 서러움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괴로운데 이번엔 아예 사표를 쓰라는 나 과장 말에 수철의 얼굴이 순간 납덩이처럼 파랗게 굳어 졌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목숨의 줄을 끊는 선고가 어이없게 내려지다니... 수철은 나갈 때는 나가더라도 영문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어리둥절한 말투를 던졌다.
"?......네?...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넌, 전에도 뉘 맘대로 일을 처리하더니 오늘은 수금도 안 해 오고 그것도 모자라 차를 저따위로 긁어 놨어?........저 차가 뉘 차니?"
하며 손가락으로 승합차를 가르쳤다.
"수금은 온라인으로 보내준다고 했고요, 차를 긁다니요? 배달하면서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수철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이다.
"없었긴 왜 없었어. 차 오른 쪽 옆구릴 가서보란 말이야. 눈깔이 있으면......"
"네, 알겠습니다."
곁에서 신경을 곤두 세워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한 수철은 배달을 마친 승합차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목구멍이 좁아서도, 크게 말할 기운이 없어서도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 과장의 불편한 심경을 건드리지 않게 위해서다. 승합차 오른 쪽 옆구리에는 분명히 배달하고 돌아 올 때만해도 없었던 자국이 거짓말처럼 조수석에서 뒤로 길게 긁혀져 있었다. 그것도 여러 갈래로, 선명하게. '이건 누군가 계획적으로 한 것이 틀림없어. 분명히 나 과장의 짓 일거야.' 이런 생각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양 손가락 열 개가 안으로 오그라들어 부르르 떨리면서 피가 역류함을 느꼈다. 얼마 전 손 사장 배달 건으로 굴욕적인 말을 들었던 기억이 선명한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누굴 못 잡아먹어서 떠도는 영산처럼 눈을 번득일까. '개털 보다 못한 저 놈을 그냥......'하면서 유리창너머 자신의 책상 앞에서 무언가 들여다보고 있는 나 과장을 향해 터지려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무섭게 응시할 뿐이다.
최 사장을 한 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최 사장에게 구원을 요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가슴에 분노의 해일이 일어났다. 설령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더 이상 나 과장과 같이 근무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가게를 그만두자. 어차피 그만 둘 것 같으면 깨끗하게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머금자 가슴에서 무언가 올라와 치 바치고 있었다. 내가 있을 자리, 내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 내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가게라고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사의를 표하고 가게문을 나서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에는 최 사장 얼굴이 구름으로 떠돌더니 서러움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