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피가 끓어… 일제에 항쟁” 비밀결사 만든 여고생
오늘 3·1절 104주년… 여성독립운동가 임부득 생애 재조명
1929년 일제 맞서 선전물 만들어 배포 직전 발각돼 두 차례 옥고
“경제적 독립” 여성해방 운동도… 동아일보, 당시 활약 상세히 보도
여성 독립운동가 임부득(오른쪽)이 1970년대 남편 김철주와 함께한 모습. 유족 제공
“우리들의 피가 끓고 힘이 넘쳐흐른다. 노예적 교육제도는 철폐하고 결사, 연구의 자유를 얻어 조선민족 본위의 교육제도를 실현해야 한다. 일본제국에 끝까지 항쟁하자.”
1929년 7월 전북 전주 청수정(현 완산구 교동).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주여고보) 4학년 임부득(1911∼1987)은 집에서 이 같은 내용이 실린 선전물 ‘뉴쓰’를 만들어 등사했다. 인파가 몰리는 전주극장 앞에서 뿌리기 위해서였다. ‘뉴쓰’는 ‘3·1운동의 유래와 금후의 태도’ 토론문을 실어 당시로부터 10년 전 벌어졌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하지만 배포 전 계획이 발각돼 임부득과 전주여고보생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됐다.
임부득의 비밀결사 사건을 ‘여학생 중심의 비사, 격문 선포 중 발각’이란 제목의 기사로 보도한 1929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DB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잊혔던 여성 독립운동가 임부득이 학계에 의해 조명되고 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임부득을 필두로 전주여고보 여학생 19명이 결성한 비밀결사 ‘적광회’는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며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고자 했다.
‘뉴쓰’는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민족에게 박해를 가하고 있다. 실로 조선 농민을 위해 싸울 용감한 투사는 투옥되거나 혹은 학살되었다. …경찰 당국과 협력하여 불온사상 단속의 명목으로 백주에 학생의 검속, 고문, 투옥을 감행한다”(1930년 3월 5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고 고발했다.
이들의 활동은 당시 동아일보에 “같은 학교 3, 4학년생을 중심으로 사상 선전을 하는 동시에 모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뉴쓰’라는 선전문 창간호를 전주 청수정 임부득 여사의 집에서 등사해 준비했다”(1929년 8월 3일자 ‘여학생 중심의 비사, 격문 선포 중 발각’)고 보도되기도했다.
임부득은 이 사건으로 붙잡힌 학생 중 유일하게 치안유지법, 출판법 등 위반으로 기소돼 1년간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31년 만기 출소했지만 1934년 전북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붙잡혀 또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전주형무소 행장(교도소 기록)에 따르면 임부득은 교도소 측과의 면담에서 “우리 여성이 경제적으로 해방된다면 정치적 해방도 얻을 수 있다”면서 “여성은 빨리 인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장 교수는 “18세 소녀가 식민지의 모순을 깨닫고 스스로 공부하며 조직을 만들어 주변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과정이 관련 사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당대 여성이 지역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른 사례는 흔치 않다”고 했다. 지난해 신진연구자 지원 사업을 통해 임부득 연구를 지원한 독립기념관의 한시준 관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부득의 오빠 임휘영(1908∼1972)과 남편 김철주(1908∼1977)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휘영은 1926년 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동맹휴학에 참여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임휘영과 함께 동맹휴학에 참여한 뒤 자퇴한 김철주는 3년 뒤 임부득과 혼인했고, 부인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았다. 김철주는 1945년 작성된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의 전주경찰서 요시찰 대상에도 포함돼 있다.
임부득 부부는 광복 후 조용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손자 김모 씨는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조부모님께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 자식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주변에도 알리지 않고 사셨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