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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현종실록(2)
3. 현종의 가족들
현종은 헌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었다. 13명의 부인 중 원정왕후 김씨는 소생이 없
었고, 원화왕후 최씨가 2녀, 원성왕후 김씨가 덕종, 정종을 비롯 2남 2녀를, 원혜왕후 김씨가 문종을 비롯한 2남 1녀를
낳았으며, 원용앙후 유씨와 원목왕후 서씨는 소생이 없었다. 그리고 원평왕후 김씨 1녀, 원순숙비 김씨 1녀, 궁인 한씨
1남, 궁인 박씨가 1남을 낳았다. 그 외에 원질귀비 왕씨. 궁인 이씨 등은 소생이 없었다.
이들 가족 중 제1비 원정왕후를 비롯한 각 왕후들의 삶은 간략하게 언급한다. 이외에 덕종, 정종, 문종 등의 아들들
은 각 왕들의 실록에서 다루기로 하고, 왕들 중에 경성왕후(덕종비), 효사왕후(덕종비), 인평왕후(문종비) 등도 ‘덕종실
록’, ‘문종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원정왕후 김씨(?-1018)
원정왕후 김씨는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 김씨 소행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현종이 왕위에 오른
1009년 5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책봉된 직후부터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현종을 따라 몽진길에 올라 많은 고
초를 겪었다. 그리고 1018년 4월 무진일에 현덕궁에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소생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죽을 당
시 개성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었는데, 그녀도 아마 이때 사망한 것 같다.
능호는 화릉이며, 능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원화왕후 최씨(생몰연대 미상)
원화왕후 최씨는 성종의 딸이며 제3비 연창궁부인 최씨 소생이다. 원정왕후 김씨와는 이복남매간이며 원화왕후가 왕
비에 책봉된 후 곧 제2비로 책봉됐다.그녀도 현종이 나주로 몽진갈 때 함께 갔다는 기록이 있다.
입궐초에는 향춘전에 머물렀기에 향춘전왕비라고 불리었으며, 후에 상춘전이라고 고쳤다..그녀 소생으로는 효정공주
와 천수전주 두 딸이 있다.
사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능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원성왕후 김씨(?-1028)
원성왕후 김씨는 김은부의 딸이다. 1011년 현종이 나주로 몽진갔다 돌아오면서 공주에 머문 적이 있는데, 당시 공주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는 자신의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짓게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011년 2월 현종은 그녀를
왕비로 맞아 들이고, 그녀의 동생 둘도 함께 왕비로 맞아들인다. 원혜왕후와 원평왕후가 그녀의 두 동생이다.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는 덕종(제9대 왕), 정종(제10대 왕),인평왕후, 경숙공주 등이 있다. 1028년에 생을 마감하였
고, 능호는 명릉이다.
원혜왕후김씨(?-1022)
원혜왕후 김씨도 김은부의 딸이며, 원성왕후의 친동생이다. 원성왕후가 왕비에 책봉된 직후에 입궐한 듯하며 문종(제
11대왕),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비) 등을 낳았다. 1022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능호는 회릉이다.
원용왕후 유씨(생몰년 미상)
원용왕후 유(柳)는 성종의 아우 경장태자의 딸이다. 태새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1013년(현종4년) 5월 계묘일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은 태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1013년(현종 4년) 5월 계묘일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
행은 없었으며 죽음과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원목왕후 서씨(?-1057)
원목왕후 서씨는 이천 사람이며 내사시랑 서눌의 딸이다. 서눌은 서희의 아들이므로 그녀는 서희의 손자가 된다.
1022년 8월에 숙비에 책봉되었으며, 흥성궁주로 불리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1057년(문종11년) 생을 마감하자 문종은
화장을 명하고 유골만 묻혔다. 자식을 낳지 못했으므로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능호가 내려지지 않았다.
원평왕후 김씨(?-1028)
원평왕후 김씨는 원성왕후와 원혜왕후의 친동생이며 김은부의 딸이다. 언제 입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열상으
로 봐서 원목왕후가 입궐한 1022년 이후일 것이다. 1022년에 그녀의 둘째 언니 원혜왕후가 죽었는데, 그녀는 아마 죽
은 언니를 대신하여 입궐한 듯하다.
소생으로는 효경공주가 있으며, 1028년에 생을 마감했다. 능호는 의릉이다.
4,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왕규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과 1018
년 다시금 2, 3차 침입을 감행한다.
거란의 침입 구실은 목종폐립 사건이었다. 거란에게 목종폐립 사건의 내막을 알려준 측은 동여진이었다. 여진은 당
시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서여진은 고려와 가까웠던 반면 동여진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1010년 초에 좌
사낭중(내사문하성의 정5품 벼슬) 하공진이 동여진은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보복으로 유
종이, 조공차 화주관(함경남도 영흥지역)에 온 여진인 95명을 죽여버렸다. 조정에서는 하공진이 객기로 동여진을 공격
해서 실패한 일과 그 수하인 유종이 조공으로 온 사신을 죽인 일로 사건의 책임을 물어 귀양 보냈으나, 동여진 측은
거란왕에게 달려가 목종폐립 사건의 내막을 고변하게 되었다.
여진으로부터 목종이 강조에 의해 강제로 폐립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거란왕은 그 해 5월 고려 조정에 강조를 거
란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1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
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이다.(북쪽에서 남쪽으로 침입할 때는 겨울을 택하여 침입한다.따뜻한 곳으로
가기 때문에 전쟁하기에 유리하다.그리고 압록강이 겨울에는 수량이 줄어들기에 도하하기가 쉽다.)
거란의 침입이 예상되자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군사지휘의 최고책임자)로 삼고, 상장군 안소광을 도병사로,소부
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사 30만을 보내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시켜 거란군을 방어하도록 했다.(고려 초기 인구 780만명 정
도, 5%면 약 40만 정도의 군대를 보유한다고 가정할 때, 가구당 6명으로 잡으면 약130만호 3집에 1명꼴로 징집될 것
임 10%면 국가가 힘든 면이 있음)
성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거란왕은 부하를 시켜 화살로 고려군측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대들의 전임금 왕송이 우리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전왕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고려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답장을 하였고, 거란왕이 재차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
용했지만 고려군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왕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병력 20만을 인주(의주 부근)남쪽으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은 강조가 머물고 있는 통주로 출동시켰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로 출동하자 강조(康兆)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그들과 대응하였다.강조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1병력은 강조의 통솔 아래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병력은 통주 근방 산에, 제3병력은 통주성에 진을
쳤다.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조가 지휘하고 있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강조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오면 검차(劒車)을 앞세우고 적을 공략하였다. 이 같은 고려군의 검차전략으로 거란은 더 이상
진군을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해야 했다. 그래서 거란은 야음을 틈타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률분노가 이끄는
별동부대로 하여금 고려의 본영이 있는 삼수를 급습하게 하였다.
몇 번에 걸쳐 승진을 거듭하던 강조는 적군의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나 군사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적을 삼수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군이 본영을 습격하자 고려
군은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하였고, 그 틈을 이용해 거란의 대군이 앞쪽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줄 것을 바랐지만,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그때 행영도통부사(행영도통사
바로 아래 직책)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흥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들
권유했으나 양규(楊規)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마디
로 거절했다.
그 사이에 거란군은 다시 곽주로 진군했다. 그러자 곽주 방어사 조성우는 야밤을 틈타 도망쳤고 대회덕, 이용직 등은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곽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양규는 별동대 7백명을 이끌고 흥화진을 출발, 통주에 흩어져 있던 군사 1천명을 모아 곽주에 머무르
고 있던 적병 6천 명을 전멸시키고, 양민 7천여 명을 구해 통주로 후퇴했다.
이 때 거란왕이 이끄는 20만 병력은 서경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었다. 이에 중신들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하지만 강감찬의 결사적인 반대로 현종은 백관들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다. 이때 거란의 침입으로 귀양에
서 풀려난 하공진(河拱辰)과 호부 원외랑 고영기(高英起)가 2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을 쫓아와 정전교섭을 자청하여
거란왕을 만나러 갔다. 거란왕은 ‘왕은 간 곳이 얼마나 머냐?’고 물으니, ‘왕은 이미 수천리 밖으로 피했으나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하고 거란왕을 속였다.
현종은 몽진 과정에서 몇 번에 걸쳐 죽음의 위험이 있었으나 중랑장 지체문의 호위로 무사할 수 있었다.그리고 거란
군이 계속 남하함에 따라 현종과 백관들은 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현종의 어머니의 외가(헌정왕후 의붓어머니 장
화왕후 친정)가 있는 나주로 피신했다.
그 때 흥화진에 있던 양규가 죽은 강조을 대신하여 도순검사가 되면서 곽주를 회복한다. 보급로에 문제가 생긴 거란
군의 성종은 사신으로 갔던 하공진을 볼모로 잡고, 물러가면 강동6주를 되돌려 주고 거란에 입조하겠다는 고려 현종의
약조를 받고 개경점령 10일만에 서둘러 철수한다,
하지만 양규의 활약으로 후방에 진을 쳤던 거란군의 기세가 조금씩 꺾이자, 이틈을 노려 고려 장수들은 패잔병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맹렬한 기세로 거란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구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었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도 이수에서 적군 2천5백명을 무찔렀
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병력을 합쳐 거란군 선봉대를 애전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때 개경에서 회군
한 거란왕이 대군을 이끌고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바람에 고려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수십 대의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이미 지칠대로 지틴 거란군은 1011년 정월 별수없이 퇴각하게 된다. 이에 정성이 이끄는 고려 군대가 퇴각
하는 거란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많은 병력을 수장시키고 강동 6성을 회복한다.
결국 거란의 성종은 5만의 병사가 죽는 등 많은 희생을 치루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은 일단락된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했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석을 내리
고 은률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
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공히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과,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
다.현종의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이 사기을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
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이 글은 양규의 용맹과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이 같은 기개를 본받아 그의 아들 양
대춘도 최충이 ’지조가 탁월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 방면에도 통달한 인재‘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장수로 성장한다.
○.거란족- 지금은 없어진 민족이지만, 거란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4세기에 등장하여 선비족이 중원으로 들
어간 후 그 지역을 대부분 차지하였다. 대싱안링산맥 일대와 랴오허강 중상류지역에서 세력을 폈고, 수.당시대에 와서
는 더욱 더 성장하게 되고, 5대 10국시대에는 중원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워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 되었다.
○.전연의 맹약(澶淵의 盟約)- 거란은 5대 10국시대 5대의 하나였던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도와 후당을 멸하여 준
댓가로 연운16주를 획득하여 만리장성을 넘은 지역을 차지했지만, 그 뒤 송이 건국돼서 후진 때 빼앗긴 연운 16주(지
금의 베이징을 포함한 16개 주)를 수복하려 했기에 서로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거란도 여세를 몰아 중원(황하유
역)으로 친출하려 하고 송은 빼앗긴 땅을 도로 찾으려 하는 일대접전이 벌어지지만,서로간의 역부족인 것을 인지하고
강화를 맺었는데, 이것이 전연의 맹약(1004)이다.
송은 해마다 비단20만 필과 은 30만 냥을 요(거란)에 줄 것을 약속했고 송,요의 황제는 형제 관계를 맺는다.송 진종
이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요 성종이 동생이나. 후대에는 나이로 따져서 형과 동생을 정한다. 이후 양국은 더 이
상 전쟁을 하지 않고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첫댓글
거대한 강물과 같은 시간은
거친 물결속에 무엇이던 삼키며
영원히 흘러 갑니다
역사라는 미명하에 삶도 죽음도
지나고나면 별다른 의미도 없이
그 물결속에 삼켜지며 사라집니다
추일슬풍님
긴글 쓰느라 무더운 여름 수고가
많습니다~^^
건강도 챙기십시요!
미미한 저의 게시글에 항상 관심을 보여주시는
보쳉님에게 호의의 마음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