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반도체 이익 나눠야 보조금” 삼성-SK 압박
[美 반도체 보조금法 논란]
‘국가안보 우선’ 지급조건 공개
“일정 기준 넘는 수익 반납하고 생산-연구시설 접근권 제공해야”
국내업계 “美투자 리스크만 커져”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미국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에 미 정부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일정 기준 이상 초과수익은 반납하도록 했다. 또 반도체 기업의 생산 및 연구시설을 미 정부에 공개할 경우 보조금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첨단기술을 두고 겨루는 반도체 기업의 기밀이 노출될 수도 있어 미국에서도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반도체과학법에 따른 반도체 보조금 지급 기준을 공개했다. 미 정부는 이 기준에 따라 보조금을 신청한 미국 투자 반도체 기업에 390억 달러(약 50조 원), 연구개발(R&D) 분야에 132억 달러(약 17조 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상무부는 경제, 국가안보, 투자 계획의 상업적 타당성 등 6가지 보조금 지급 조건을 제시하면서 국가안보에 가장 큰 비중을 두겠다고 밝혔다. 특히 “국가안보 프로그램에 집약될 수 있고 실험·전환·생산시설 접근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을 찾는다”고 명시했다. 반도체 생산 및 연구시설을 미 정부에 공개하는 기업에 지급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상무부는 이어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이상 반도체 지원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 일부를 미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업이 보조금을 신청할 때 예상 수익을 제출하도록 하고, 이로부터 일정 기준을 넘어선 수익을 올릴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까지 이익을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이날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이 회계장부를 공개하도록 할 것”이라며 “어떤 기업에도 백지수표(blank check)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거나 계획했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보조금 신청에 따른 부가 조건이 새로 나오면서 부담이 얼마나 더 커질지와 충족 가능성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득보다 실이 많다’는 평가까지 나오지만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에서 이탈하기도 힘들어 고심도 깊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들이 수익을 올릴 경우 미국 정부가 어차피 법인세를 많이 거둬 갈 텐데 각종 명목으로 이익까지 회수하겠다고 해 보상은 줄고 리스크만 커졌다”고 우려했다.
美, ‘영업기밀’ 반도체 시설 공개까지 요구… 국내업계 “득보다 실”
美, 보조금 75%까지 이익 환수 방침
초과수익 심사과정 ‘과잉개입’ 우려
돈 무기로 반도체 패권 장악 속내
韓기업 “美 눈치 안볼수 없어” 한숨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527억 달러(약 67조 원) 규모의 보조금 지원 절차에 들어간 가운데 초과이익 환수, 반도체 시설 공개를 부대 조건으로 내걸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중국과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를 앞세웠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영업기밀, 연구개발(R&D) 비용 등이 포함된 회계장부 공개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탓이다. 공급 과잉을 막기 위해 한국과 대만 등 주요 반도체 생산국과 생산 규모 조정에 나서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바이든 행정부가 ‘돈’을 무기로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미국으로 가져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보조금 조건으로 시설 접근권 요구
미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반도체과학법 보조금 지급 기준을 담은 지원공고(NOFO)를 발표하며 보조금 지급 목적을 “미국 경제와 안보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상무부는 특히 “국가안보 프로그램에 집약될 수 있고, 실험·전환·생산시설 접근을 제공할 수 있는 지원 기업을 찾는다”고 공고했다. 미국의 첨단무기 개발에 도움이 되는 반도체 기업에 우선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면서, 이들 기업에 반도체 생산 및 연구시설을 공개해야 한다는 단서를 단 것이다.
이와 함께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이 사전에 제출한 전망치를 일정 기준 넘어서는 수익을 거두면 이 중 일부를 미국 정부가 환수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원한 자금의 최대 75%까지 되가져갈 수 있다. 또 기업이 계속된 투자와 업그레이드를 통해 공장을 장기간 운영할 수 있는지 심사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각에선 사실상 기업의 영업기밀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는 반도체 기업들은 수율(투입 대비 양품 비율) 개선 기술에 대한 보안을 위해 제조시설 등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초과이익 심사 과정에서 상세한 투자 현황과 수익성 지표를 요구하는 등 과도한 개입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백악관은 2021년에도 ‘반도체 대책회의’에서 반도체 기업에 재고, 수요, 판매 정보 등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에 투자한 반도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과 대만 등 주요 생산국에 대한 압박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이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아시아, 유럽 동맹국과 공급 과잉을 막기 위한 정책 논의를 가속화할 것”이라며 “우리는 협력해야지 경쟁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보조금 투명성을 이유로 반도체 수입 쿼터(제한)를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최대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반도체 투자나 공장 증설을 못 하도록 하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구체적인 기준도 이달 중 공개된다.
● “보조금, 받으라는 건가” 당혹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들 기업은 세부 조건을 면밀히 검토한 뒤 보조금 신청에 나설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고민이 특히 깊다. 삼성은 2021년 11월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신규 공장을 세운다고 발표했고 현재 기초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향후 20년간 11곳의 공장을 신설한다”는 계획도 미 정부에 제출했다.
최근 반도체 업황이 바닥인 데다 각 기업들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있어 미 정부의 지원을 쉽게 포기하긴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의 별도 기준 현금, 현금성 자산 및 단기금융상품 규모는 3조9217억 원으로 2021년 말보다 79% 줄었다. 무엇보다 삼성은 대만 TSMC와의 경쟁 때문에 미국에서의 공장 설립이 불가피하다.
미국에서 패키징 공장 투자를 추진하는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무작정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는 처지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라며 “(보조금을) 무턱대고 패싱할 수도 없고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미국과의 소통 채널을 통해 수시로 협의를 벌이고 있다. 우리 기업에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박현익 기자, 세종=김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