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1권 42호](통권 192호)(2009년 12월 2일)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필리핀에서 생각했다 (계속)
장 기 홍
그 다음 안내된 곳은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였는데 그것은 “城안”이라는 뜻이며 과연 높은 성벽을 쌓고 인공 운하를 둘러 난공불락이었다. 지금 관광객으로 빽빽한 이곳은 스페인의 식민 거점이었다. 성안에 들어서니 고색창연한 고딕 건물“성 어거스틴 성당”이 있다. 300여년간 약탈자들이 예배드리던 곳이다. 성당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있었다. 신랑도 양친이 데리고 들어오고 신부도 양친이 데리고 들어온다. 신부보다 훨씬 더 예쁘게 화장한 들러리 아가씨가 전후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양도 인상적이었지만 주례 앞에 도착한 신랑이 장모와 정색으로 입맞춤을 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트라무로스의 백미는 필리핀 독립의 영웅 호세 리잘의 기념관(정식 명칭은 “호세 리잘 신전”)이었다. 스페인의 식민주의 運이 거의 다 되었던 1896년, 35세의 젊은 안과醫 호세 리잘(Jose Rizal)은 필리핀 독립을 위한 혁명 결사의 혐의로 체포 투옥 사형되었다. 지금 그의 기념관이 되어 있는 건물에는 그가 마지막 갇혔던 감방이 있다. 유물을 배견하고 갖가지 사연을 읽으며 필자는 대략 그 무렵의 내 나라 형편을 생각했다. 리잘처럼 나라 위해 죽어간 우리의 지사, 의사, 열사들을 생각했다.
리잘의 사형이 집행된 형장은 감옥에서 멀지 않은 성 밖 광장이다. 총독은 8명의 필리핀 병사를 시켜 리잘의 등을 쏘게 했다. 최후의 순간 그는 몸을 반바퀴 돌려 옆으로 눕고 얼굴은 하늘을 보며 숨졌다고 적혀 있다. 마지막 밤 그는 옥중에서 유명한 그의 시 “나의 마지막 작별”을 썼다. 그 시는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한국어판이 기념관의 판매원에 의해 나의 손에 쥐어졌다. 4 쪽의 장시를 나는 눈물 때문에 한꺼번에 다 읽을 수 없었고 여러 번 나누어 읽어야 했다. 나는 영어 원문을 얻어 번역하여, 나 나름의 요약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 너를 위해 즐겁게 마치리.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자유 위한 투쟁에서 아낌없이 생명을 조국 위해 바쳤구나, 하이얀 월계수꽃 덮인 전나무 관이거나 교수대거나 황량한 들판이거나 조국과 고향 위해 생명을 던졌다면 순교한 곳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리? 동녘에 해 떠오를 때 그 여명 속에서 나는 죽으리. 새벽 희미한 어둠 속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나의 피 흩뿌려 어두운 새벽녘 밝혀 보리라. 나의 어린 시절이나 혈기 넘치는 지금이나 나의 소망은 동방의 진주 티없이 맑은 부드러운 너 너를 바라보는 것이었노라, 나의 즐거움 열망 다 버리고 이제 나는 너를 떠나야 하누나, 아! 너 위한 만세를 부르노라. 최후의 승리 위해, 너에게 생명을 이어 주기 위해 조국 하늘 아래 숨져 신비의 대지에 기리 잠드리니,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꽃 한 송이 피거든 내 혼에 입맞추듯 입 맞춰 다오. 달빛 햇빛으로 나를 비춰다오, 밝아오는 새 빛 보내다오, 작은 새 한마리 내 무덤 십자가에 평화의 노래 부르게 해다오, 너무 이른 내 죽음을 슬퍼해 다오. 기도해 다오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죽어간 형제들 위해, 고난 속 눈물짓는 어머니들 위해, 감옥 속 고문에 뒹구는 형제들 위해, 지아비 잃은 여인과 아이들 위해 기도 드려 다오. 깜깜한 밤 무덤가에 어디선가 양금과 피리소리 들리면 사랑
------------------------------------------------------------------------------------
발행인 : 장기홍 연락처 : 711-862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 2리 709
편집인 : 강병조 장 기 홍 ☏010-5558-4208
E-mail changkhong@hanmail.net
하는 조국이여 이 가락은 너 위해 부르는 내 노래 소리이려니. 내 무덤가 십자 비석도 잊혀져가면 삽으로 밭을 갈고 내 시신의 재는 거둬 조국 온 땅에 고루 뿌려다오. 그러면 나는 잊혔다 해도 서러워 않고 조국 하늘과 골짜기를 맴돌며 너의 귀에 울리는 가락되고 절실한 기도가 되리. 내 끝없이 사랑하며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그대를 두고 형장으로 끌려 간다. 저기 노예, 수탈, 억압, 처형 없는 곳, 누구도 내 믿음과 사랑을 짓누를 수 없는 하늘나라로 가노라. 잘 있거라, 서름이 남아 있는 나의 조국이여, 부모님, 형제들, 사랑하는 여인이여, 어릴적 친구들이여. 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안식에 감사해요. 잘 있어요, 내 사랑하던 이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어니!
리잘 기념관을 나와서 나는 요금 시비가 없고 절대 안심이라는 R & E 마아크의 모범 택시를 탔는데 운전수 이름이 “호세”라 적혔기에 물으니 자기 생일이 호세 리잘의 처형일인 12 월 30 일이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이름을 그렇게 지어 주었다고 했다.
예속이 싫고 독립이 소원이던 것은 무엇인가? 나라를 원했던 것은 왜인가? 나라가 그렇게도 좋고, 그렇게도 소속이 좋은가? 나라라는 대아(大我)가 무엇이기에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더 아까운 목숨을 바쳐 일으켜야 했던가! 리잘이나 안중근이나 안창호나 유관순이나 모두가 바로 그 소원의 화신이 아닌가!
필리핀이라는 나라와 국민은 스페인의 식민통치라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이지 본래 필리핀 군도에는 나라가 없었다. 타 국가 타 민족의 정복에 대항하는 피정복민들의 방어 기구로서 생겨난 것이 필리핀이라는 나라였다. “우리도 나라를 만들어야만 정복자를 물리칠 수 있겠다.” 이것이 동기였고 그래서 나라가 생겨난 것이다.
국가의 기원에 상고하면 어느 지역에서 내적 발전의 결과로 생겨난 국가도 있으나 대개는 남의 땅과 사람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한 정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즉, 정복과 방어의 기구 혹은 조직체로서 국가가 생겨났다. 싸움 때문에‘나라’가 생겨났다니! 싸움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던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리투스가 생각난다.
사람을 포함하는 생물의 역사를 요약하면 공간 점령의 역사, 곧, 삶의 터전의 확장사다. 그 확장을 위한 노력이 일반 생물계와 원시인의 세계에서는 순리에 따라 진행되어 왔으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과욕이 날뛰고 충돌과 전쟁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영토확장의 기구 내지 조직체가 국가라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방어를 위한 기구 내지 조직체가 국가이다.
힘이 있으면 독립할 수 있으나 힘이 없으면 예속을 면치 못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이다. 티베트나 내몽고를 “내 땅이다”하고 억지를 쓰고 붙들고 있는 중국을 보라. 중국의 무리에 물론 문제가 있지만 나라를 지키지 못한 티베트인이나 몽고인에게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한마디로 너와 나로 갈라져 싸운 싸움의 역사라고 말했지만, 실로 조물주는 싸움을 시키는 무서운 조물주다. 그래서 늘 국력이 문제가 되며 국력을 기르는 것은 사람이 체력을 유지해야 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의무이다. 중요한 것은 무력만이 국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점점 무력보다는 경제력과 지혜가 국력인 시대가 되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 자신의 걱정을 하려한다. 국력이란 영어로는 national power, 곧 “국력”과 동시에 “민족력”의 뜻이다. 우리가 만일 “남한의 국력”과 “북한의 국력”이라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누구가 정복자냐, 누구가 피정복자냐의 논리가 아닌가! 그것은 민족으로는 자멸의 길이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독립이라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민족이 많다. 세계사는 늘 “민족”이 단위가 되어왔다. 우리는 “민족력”을 길러야겠다. 힘을 길러 타민족을 정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제 노릇을 바로 하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민족력”을 좀먹고 있는가? 우리 민족의 우둔함이 약화의 원인이다.
핵폭탄은 누구에게 사용할 것인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사들여야 하니, 민족의 견지에서 보면 다 민족력을 좀먹는 일이다. 우리가 현명하기만 하면 단일 민족이라는 장점은 극히 유효할 것이다. 왜 소아(小我)를 지키느라 급급한가 하는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자기 필름을 돌린다'
강 병 조
며칠 전 병실에 들렸더니, "강 박사님, 저를 이렇게 괴롭힐 수가 있습니까?"하고 접근하는 한 50대 남자 환자가 있었다. 면담실로 불러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물어보았다.
20여 년 전 필자가 근무하던 병원에 이 환자가 입원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주치의(전공의)를 미워해서 속으로 욕을 많이 했는데, 당시 교수이던 필자가 그 사실을 알고 오늘 자기를 여기서 괴롭힌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엉뚱한 생각이요 엉뚱한 피해망상이다. 이 환자를 보면 망상과 환각이 어떻게 생기는지를 잘 이해할 수가 있다. 필자는 이 환자가 과거 필자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었기 때문에 안면이 있는 정도인데,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특히 속으로 주치의를 욕을 했는지를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자기가 한 욕을 필자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기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정신과적 용어로는 자기 마음의 투사(投射, projection)라 하고,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자기 필름(film)을 돌린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느낌이 각자 다르고 해석도 각자 다르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각자 자기 필름을 돌리면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의문도 생긴다. 미인에 대한 기준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미인'이라고 하는 그런 객관적 미인도 있다. 이렇게 의견이 일치되는 것을 정신과에서는 합의상 확인(合意上 確認, consensual validation)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합의상 확인도 실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통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항상 객관적인 사실(事實, fact)과는 관계없이 자기스스로 괴로워하고 기뻐하는 경우가 많다. 죄를 지으면 남은 몰라도 자기는 알기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 반대로 좋은 일을 하면 남은 몰라도 자기는 알기 때문에 스스로 기뻐한다. 행복도 결국 객관적인 사실이나 조건보다는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정신병 환자들은 대부분 마음이 부드럽고 순진하고 양심적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죄를 지어도 양심에 가책이 되어 죄의식을 많이 느끼고 심하면 죄책망상이나 피해망상이 생기기도 한다. 반대로 성격장애(깡패, 사기꾼 등) 환자들은 남을 괴롭히고도, 양심이 없어서 괴로워하지 않으며 죄의식이 없다.
자기 경험만이 필름이 아니라 교육이나 이념이나 종교도 필름이다. 세뇌시키고 오래 기억되게 하는 모든 것은 다 필름이 될 수 있다. 세뇌나 경험 이전에 유전인자 속에 각인된 진화상의 경험이나 돌연변이의 기억단백질도 필름이 될 수 있다. 자기의 필름을 통해서, 자기의 색안경을 통해서 본 이 세상사는 남과 다르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찰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필름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 환자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는 대단히 어렵다. 자기 얼굴을 자기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아니면 거울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필름을 돌린다는 사실을 깨달으려면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정신병적 망상은 감정의 중추에 도파민이 많아서 생긴다는 것이 50여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항정신병약인 도파민 수용체 차단제(도파민을 낮추는 약)를 복용시키니 망상이 없어졌다. 또한 정신치료로서 자기의 과거 경험을 말하게 하고 자기의 그릇된 해석과 연관을 이해시키면 망상이 없어질 수도 있다.
인간의 뇌는 약이라는 물질에 의해서 망상이라는 마음의 현상을 바꿀 수가 있다. 또한 물질이 아닌 정신치료로서도 이런 망상을 치료할 수가 있다. 물질이 마음이요, 마음이 물질이다. 뇌는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나 물질과 마음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날개 유전자가 없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날 수 없는 한계가 있듯이, 정신치료로서 고칠 수 없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소아마비 환자가 피나는 노력을 하여 세계 수영대회에서 일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를 발달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수양하면 정신상태가 상당한 정도는 건강해짐을 우리들은 경험하고 있다.
마음 수양을 위해서 필자가 최근 읽은 한 책과 몇 가지 좋은 글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도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교사(敎師) 크리슈나무르티가 지은 <시간의 벽(壁)을 넘어서>란 책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의 마다나 팔레라는 도시에서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서 엄격한 사도교육(師道敎育)을 받은 독특한 사상가 이다. 그가 가르치고자 하는 사상의 요지는 절대적인 '진리(眞理)'의 추구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인간이 자기 자신속의 자아나 '나'를 완전히 버렸을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통하여 얻어진 절대 무조건적인 '자유'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존엄성과 완전한 가능성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 심성(心性)의 완전한 해방은 나아가 세계평화를 실현시키는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내셔날리즘의 전면적인 타도와 세계국가의 창건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이다. 이렇듯 그의 사상은 깊은 통찰과 폭넓은 관심으로 생활의 지혜를 일깨우고 있다.
필자의 마음에 와 닿은 몇 구절을 적어본다.
"자기 이해는 슬픔의 끝이며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어떤 종교나 뛰어난 스승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의 마음(心性)의 완전한 변화와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배운다는 것이 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마음이 믿음에 자유롭다면 그때 비로소 믿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공 지 시 항 : 2009년 12월 모임
1木 모임 -- 2009년 12월 3일 (목) 7 시
3木 모임 -- 2009년 12월 17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회의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