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후 정전 64주년과 적치 90일.~~~~~~~
1950년 6 월 25일 은 나 중학교 1 학년 때다 서울이 3일만에 점령 됐다. 하루아침에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공산주의 세상으로 바뀌었다.서울이 수복되기까지 90 일 동안 우리는 말로만 듣던 생지옥을 경험했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뀐 서울! 적의 탱크가 길거리에 즐비 했고 팔뚝에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동네를 누볐다.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은 인민군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방문해 동무니 반동이니
하는 말을 써 가며 휘젓고 다녔다.우익 인사들은 재산 몰수와 함께 인민재판에 넘겨져 군중속에서
죽여라 하면 곧바로 몽둥이와 돌로쳐 죽였다. 인긴 산양터다.
어제까지 보통사람인줄 알았는데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닌다. 높은 벼슬이나 한 것처럼 으스댔고
그 사람 한 마디면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서울 인민 위원장에는 "이승엽" (해방전 남로당 2인자}
이 인명됐다. 그러나 박헌영 예언괴는 달리 서울에서 인민 봉기는 일어나지 읺았다.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자 말자 서대문 형무소로 달려가 죄수들을 석방해 영웅 호칭을 주었고
풀려나온 죄수들은 보도연맹(남로당)과 함께 만세라고 쓴 풀랜카드를 들고 다니며 적십자 병원
서울대병원에 입원중 못 떠난 국군 부상병을 전부 사살했다 서울대 병원 간호사인 내 이모도 납북됐다.
보도연맹 가입된 자들은 인민군과 우익인사 9500여명을 죽였고 8만 4천여명을 납북 시켰다.
공산당 세상이되자 친북국회의원 (미군철수하라고 주장한자들)48명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집회를 했고 교회의 목회자 300여명은 인민군 입성 환영 예배를 봤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처형 납북 행방불명이 됐다.
대전 교도에는 제주 4. 3 사건 관계자와 14 연대 반란자들 2 천여명이 수감돼 있었다.대전까지 밀어닦치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교도관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수감자들이 문을 부수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국군 17연대가 도착헤 달아나려는 죄수들에게 사격해 진압했다.히로써 남로당원들 모두 처형당했다.
고향에선 의용군 동원 한달내내 연극 보기와 노래배우기/북한식 토지개혁. 완장찬 자들의 만행등
인찬상륙으로 일부 유엔군이 수원 이천 여주선으로 진입하지 길이 막혔음에도 후퇴하면서
대전교도소 우물에 683명. 광주교도소300명. 고창316명 함양 500명. 여주 300여명. 양평286명. 가평216면
철사줄로 묶여 학살됐다. 이것은 유엔 리버티 뉴스에에서 나온 숫자이다
적치하 90일은 농촌보다 도시 서울이 생지옥이었다.자전거 끌며 양식 구하러 오던 그들 재봉틀 갇고와
보리쌀 한 말과 바꿔 가던 그들. 집안의 가보를 갇고와 보리쌀로 바꿔간 그들도 지금은 저승으로 갔을 것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두번째로 세상이 바뀌었다.농촌과 도시에서 미쳐 도망을 못 가거나 월북을 못한
완장찼던 사람들을 우익 인사들이 한 풀이를 했다.인민군과 내무서원들이 쫒겨가면서 미아리 고개로
우익 인사를 끌고 갔다
철사줄로 묶어서 3천여명이 끌려가다 거의가 사살괬다. "이해연"의 부른노래가. 단장의 미아리 고개다.
내 동네에서만 30명 이상의 완장찼던 자들이 붙잡힌 후에 지금 것 소식이 없다. 이 가족이 종북세력이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