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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7월22일 토요일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수도회] 사랑 받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는 능동적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아가 3,1-4ㄴ
† 복음 요한 20,1-2.11-18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점차 예수님을 알아 뵙게 되는
과정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신 적이 있었지요
(루카 8,2 참조). 그 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지요. 물론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앞에 계신데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부르시지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이런 화법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통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지요. 이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이때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입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막달레나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께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도망갔어도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대하게 되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내 앞에 현존하시고 활동하고
계심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부활하신 예수님
2017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언젠가 어느 일반 예식장에서 결혼식 주례를 선 적이 있습니다.
신랑 측이 신자가 아니라서 성당에서 관면혼배를 하고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는데, 주례를 꼭 좀 서 달라면서 간곡히 부탁을
하더군요.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서 그냥 승낙을 했지요.
결혼식 당일, 시간에 맞춰서 예식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주관하는 예식장 직원이 저를 찾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 계속해서 결혼식이 있어서 주례사를 짧게 해주셔야
합니다. 모든 예식이 30분 내로 끝나야 다음 결혼식에 지장이
없거든요.”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무슨 결혼식을 30분 이내로
끝내나 싶었습니다. 예식장에서야 많은 결혼식이 있어야 수입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더군요. 성당에서의
결혼식을 일반 사람들은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혼인미사가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혼인미사가 아무리 길어봐야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데 뭐가 길다고 할까 라고 생각했는데,
예식장 주례를 서면서 알게 되었지요. 예식장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것이었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배우는 단어들 가운데 ‘빨리빨리’가 꼭 끼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있다는 것이겠지요. 해방 이후 근대화를 목표로 한
빠른 경제 성장에 맞춰져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는데, 정말로
빠른 것이 무조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 역시 현대를
살아가면서 ‘빨리빨리’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
삶 안에서 서두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잠시
마음을 열고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장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정도로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라고 복음은 말하지만,
사랑했다면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이야기했던 서두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사가 먼저 “여인아, 왜 우느냐?”라고 물었고,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바로 빨리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서두름에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계속해서 서두르면서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도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나의 청원이 들어지고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에 있는 서두름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내 삶의
속도를 늦춰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듯이 우리 역시 계속
부르십니다. 잠시 멈춰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게 딴 거 없네요. 옆에 있는 게 사랑이네(이종수).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의 만남.
망각의 축복(‘좋은생각’ 중에서)
주차장에서 겪은 일이다. 차를 어디에 세웠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자동차 열쇠 버튼을 연신 누르며 헤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얘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뿔사, 다른 층에 와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검색창을 켠 순간 머릿속이
새하애졌다. 혹시나 해서 “뭘 찾으려 했지.”라고 입력한 뒤에 엔터를
눌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질문이 수십 건 떴다. 비단 나만
겪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력이 예전만 못한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한데 기억력 전문가들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한 달 전 월요일 저녁에 무얼 먹었나요?”라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한 날 뭘 했나요?”라고 물으면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를 ‘섬광 기억’이라고 한다. 놀랍고 중대한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지난밤 안경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생각 안 나도,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길거리에서 언뜻 스친 비슷한 얼굴이나
향수 냄새, 음악 몇 소절에도 떠오른다. 섬광 기억은 나이가 들어도
무뎌지지 않는다.
잊히지 않는 기억은 또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신발을 어디에
두었는지는 종종 깜빡한다. 반면 신발이 무엇인지, 신발 끈을
어떻게 묶는지는 잊지 않는다. 왜 그럴까? 뇌는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기억은 정리해 버린다. 자주 반복하는 중요한 정보는
간직하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은 잊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만약 사람이 모든 걸 기억한다면 불행할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트라우마’다. 코넬대
신경학과 노먼 렐킨 교수는 말했다.
“망각은 기억만큼 중요하다.”
사람은 잊어버리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망각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점점 잊는 게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건 정리해 삶의 핵심에 가까워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억력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그러나
행복은 많은 것을 기억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은 과감하게 잊어버릴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힘들겠지만 잊어버리도록 사람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면서, 시시콜콜한 것을 모두 기억하지 않음을
감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갑곶성지후원회원들의 영적성적을 돕기 위한 묵상집 쓰담쓰담
8월호가 나왔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 받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는 능동적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7월22일 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요한 20, 1-2.11-18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
사랑 받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하는 능동적 사랑
마리아 막달레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과 사도들을
동행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루카 8,2-3).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셨습니다(마르 16,9). 그녀는
지독한 마귀에 걸렸거나 중병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비도덕적인 생활을 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에 성모님과 그분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에서 있었습니다(요한 19,25).
그녀는 예수님께서 처형 당하신 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열두
제자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제자들에게 알린 다음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생애는 주님께 대한 항구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 모두를 건네며 함께 하지요. 그녀는 예수님의 갈릴래아의
복음선포 여정은 물론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의 길, 그리고
무덤에까지 오직 사랑 찾아 사랑으로 자신을 내놓은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밤새도록 성읍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사랑하는 임을 찾아다닌”(아가 3,1-2) 아가서의 신부와 같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 헌신적이고 항구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사랑하는 분의 고통과 죽음을 함께 겪어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하느님 자비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버린 빈무덤 밖에 서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무척 사랑했으나,
빈무덤을 보며 더 이상 직접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확인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은 순수했으나 감각세계를 넘어
온전히 승화되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그녀의 스승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러자 그녀의
눈물이 기쁨으로 바뀝니다(요한 20,11-16).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영적인 기쁨을 체험하고, 사랑의
홀로서기를 한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렇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전달자가 됩니다. 우리도 이 성녀의 주님께 대한 항구한 사랑을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감정들과 감각 작용들에 애착을
갖고 매일 때 변함없는 사랑은 왜곡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말없이 주님 곁에 머물며 헌신적으로 주님을 사랑했기에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이
성녀처럼 사랑하는 분의 애정어린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그분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랑의 열정을 키워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가장 먼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이 성녀의
간절함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온몸으로 선포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임을 간절히 찾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서
신음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머묾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능동적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길 소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불행 끝 행복 시작
2017년 가해 7월22일 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요한 20,1-2.11-18)
불행 끝 행복 시작
복음서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 가운데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입지전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다시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교회 전통 안에서 그녀를 복음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동일시하면서
‘회개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복음서 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종합해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름: 마리아
고향: 갈릴래아 지방 막달라
생애: 일곱 마귀로 고초를 겪다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됨
영예로운 칭호:
1. 예수님의 여제자
2. 예수님 부활의 최초목격증인
3. ‘사도들의 사도’(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공로:
1. 전 재산을 바쳐 예수님과 제자단의 생계를 후원
2.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 장례절차 마무리
3.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림
예수님과 제자단의 생계를 뒷받침한 것을 보아 마리아 막달레나는
꽤나 부유한 가문의 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마귀에 들려 고생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숫자가 한두
마리가 아니고 일곱 마리입니다. 일곱이란 숫자는 완전함을
뜻합니다. 그녀는 적당히 마귀에 들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마귀에
들린 것입니다.
제가 듣고 본 것을 종합해보니 악령 들린 사람들은 영혼, 정신의
집이 텅 빈 사람이더군요. 그 텅 빈 장소에 주님을 반대하고
모욕하는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합니다. 악령이
활동을 시작하면 악령 들린 사람은 스스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마리아 막달레나는 자신 안에 자신이 있지 않고 일곱 악령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었지만 이미 죽은
목숨이었던 것입니다.
악령 들린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이리로 저리로
돌아다닙니다. 그 어디를 가도 마음의 평화나 안정을 누릴 수
없습니다. 너무도 괴로운 나머지 틈만 나며 비명을 지르고 아무데나
몸을 짓찧곤 합니다. 자기 몸과 마음도 파괴시키지만 가족들과
이웃들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습니다. 자기중심,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던
그녀였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왕따였고, 철저하게도
이방인이었던 그녀, 세상 사람들의 눈에 벌레 같은 존재였던 그녀를
향해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많은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나를 바라보시는 측은지심의 시선 하나로 족했습니다. 그분의
깊은 시선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했습니다. “마리아야,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네가 겪은 고생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제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시작이다.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하자!”
예수님의 따스한 눈빛은 깊은 구렁 어둠 속에 앉아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밝은 빛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몰골의 그녀를 본래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에 힘입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리
악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녀의
선택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하늘같은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갚아드리는 것...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베풀어졌던 똑같은 방식의 은총과 축복이 반복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17년 가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오늘은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이유는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읽었던 것처럼 막달레나가 주님을 가장 애타게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뒤집어 놓으면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그릇은 바로 놓아야 빗물이 고일 수 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으로 오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묵시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언제나
너의 집 앞에 있단다.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너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제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모진 고난과 박해를 받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막달레나는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일 수도
있고,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일 수도 있고, 부정한 행위를 한 후에
잡혀 온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성서가 전해주는 막달레나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죄 중에 있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막달레나는 지금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역시 나약하고, 부족하고,
쉽게 넘어지고, 원망과 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받은 것
많았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숨어 지낼 때, 막달레나는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능력과 재능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열정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이 마리아에게 전해졌고, 마리아는 이제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연도를 할 때, 성인호칭기도를 합니다. 천상의 성인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떠난 영혼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영혼에게 천상의 모든 성인들이 먼 여정의 길동무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 미움, 멸시, 조롱, 저주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
사랑, 자비, 이해의 마음으로 부르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이웃들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사랑은 결심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을 찾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시메온과 안나처럼 언제나 삶의 중심은 하느님이신
분들입니다. 시메온과 안나가 주님을 뵙고 축복의 인사를 드렸던
것처럼 아침 일찍 성당에 오셔서 기도하시는 분들은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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