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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아들들의 세계와 셈의 후손들
(창 10:1-11:26)
이제 노아 홍수는 끝났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대청소하시는 일이 끝났다. 온 세상을 폭력과 불신으로 가득 채우며 "혼돈이 질서인 세상"을 만들던 소위 그 잘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매력 덩어리로 보였던 "사람의 딸들"과 그들 사이에 태어났던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인 네피림들도 역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악을 대량생산하던 "악인들"이 사라졌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와야하지 않을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유전인자들"로서 홍수 후의 세상을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어가지 않을까? 그들은 온 세상을 뒤엎는 홍수, 모든 문명의 전설 속에 기억되고 있는 파국적인 대홍수를 몸소 경험한 자들로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살지 않을까? 이런 신천신지의 꿈에 대해 창세기의 저자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하지만 낙관적이기 보다는 더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상에는 다시 니므롯 같은 무서운 "사냥꾼"이 등장하며, 그는 결국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며, 이번에는 "물의 혼돈" 대신 "언어의 혼돈"이 찾아와 온 세상이 분열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제도의 개선이나 새로운 "철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가느다란 희망이 된다. 홍수 전의 세상에서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던 "노아"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의 불씨"였다(창 5:29). 이번에는 셈의 10대 후손이 새로운 약속의 씨앗과 모종이 된다. 그가 누구일까?
이제 창세기에서 다섯 번째의 "개벽"이 시작된다. 노아는 "950년을 살고 죽었다"(9:29). 족장 노아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계'(toledot)가 시작된다"(10:1 상). 그리고 창세기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이루는 "셈의 세계"가 11:10에서 시작되며 아브람의 출생으로 태고사는 끝을 맺는다(1:1-11:26). 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세계들" 사이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타난다. 즉 바벨탑을 중심으로(11:1-10)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번성하였는지 먼저 말하며(10:1-32), 이어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후예를 소개한다(11:10-26).
그러나 이 흐름은 역사적인 순서라기 보다 문학적인 배열을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노아 아들들의 세상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는 "홍수 후에 그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는 말로 마치며(10:32), 이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더라"와 완벽한 짝을 이루고 있다(11:9). 이리하여 창세기 10장에서 여러 나라들이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벨탑 이야기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연대적으로 볼 때 10장의 중심적인 이야기 보다 앞에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것을 중앙에 둠으로써 족보를 연달아 제시하는 단조로움을 문학적으로 피하며, 모든 나라들이 "언어의 혼란"으로 흩어지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모으고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준다.
노아 아들들의 후예(10:1-32)
이 장은 자주 "열국의 목록"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지도"(Youngblood 128)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인종과 언어와 지역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는 족보를 우리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족보는 마치 영국 왕실처럼 "계대"를 따라 모든 일가친척들을 소개하여 "지속적인 연속성"을 만들어가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아시아의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A가 B를 낳다"는 형식은 직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후손", "후계자", 혹은 "나라들"을 뜻하며, "아버지"는 "조상," 혹은 "창건자"를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족보에서 "아들"은 "자손"으로도 번역된다(창 46:18,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벨사살과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관계는 후임자와 전임자의 관계이며(단 5:11), "에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 즉 "후계자"이다(마 9:27).
(2) 계보는 4수, 7수, 10수의 패턴을 따라 형성되어 가고 있다.
① 창세기 15:16에서 "네 자손이 4대(dor, daru)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할 때 "한 대"는 약 80년으로 여겨지는 "한 기간, 혹은 한 세대의 싸이클"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6:16-20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4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 4대의 패턴을 따른 족보이므로 완전한 족보가 아니다. 아므람은 "레위 지파(tribe)의 고핫 족(clan)의 가족(family)"으로 소개되지만 민수기 3:27, 28에서는 아므람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 6:20에서 "요게벳은 아므람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는 표현은 직계를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46:16-18에서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아들 중에는 증손자와 고손자도 포함되어 있다.
② 창세기 10장에서 야벳의 후손과 함의 아들 구스의 후손과 미스라임의 자손들이 7수 패턴을 따라 소개된다. 신약에서는 마태가 7대 손의 형식을 따라 메시야의 계통을 소개해 간다(1:1-17). 그는 1:8에서도 "요람" 다음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시야"를 넘어 바로 "웃시야"로 넘어간다(왕하 8:25; 11:2; 14:1, 21). 즉, 마태의 족보도 대단히 선별적이며 각 계대는 엄밀한 연속성을 따라 소개되고 있지 않다.
③ 창세기 5장과 10장에서 족보는 홍수를 전후로 10대 단위로 주어지며 10장에서는 7수와 10수를 사용하여 완전수 70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70개의 나라가 소개된 것은 그 당시 나라들이 70개 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70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열국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나라들"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역설하면서 홍수 후 인류의 통일성이 강조된다. 창세기 10장의 70나라는 역대상 1:5-23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수로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족보와 역사 계산에 있어서 어림수가 사용된다. 창세기 15:13에서 "400년 동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사는 기간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애굽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즉, 400년은 미래를 내다보며, 어림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12:40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정확히 계산한 햇수이다.
(4) 만약 성경의 족보를 연속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등장을 주전 2000년 경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노아 홍수는 그로부터 290년 전인 주전 2300년이 되고 아담은 약 주전 4000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기록인 우룩의 길가메쉬에 따르면 비록 60진법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홍수를 멀고 먼 과거의 일로 말한다.
성경의 족보에서 지속적인 연속성은 아담에서 에노스, 라멕에서 셈, 데라에서 아브람 정도로 연결되고 나머지는 확실치 않다. 출애굽의 세대들로서 브사렐은 야곱으로부터 7세대, 엘리샤마는 9세대, 여호수아는 11세대로 소개된다(대상 7:22-27).
(5) 족보는 문화와 민족에 따라 기능을 달리한다. 애굽 왕실의 족보는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며, 히타이트(Hittite)의 족보는 의식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역사성과 연대성은 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의 족보는 무엇 보다도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다(마1, 눅3). 창세기의 문맥에서 보면, 10장에 제시된 70나라의 배경 속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며, "그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12:3). 아브라함의 "씨"도 창세기 끝에서 "70명"으로 소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46:27; 출1:5 참조). 즉 이 70나라는 이후 애굽으로 간 야곱의 식구도 모두 70명을 예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둘째 아담으로서 "열국의 아비"가 된다(창 17:5). 이 선택된 "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원래의 축복(창1:26-28)이 회복된다.
창세기의 저자는 열국의 목록과 고대의 지도를 제시하면서, 몇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말해준다. 여기의 사건과 인물과 나라과 지명은 앞에 나올 창세기와 오경의 이야기와 특별한 연관성을 가지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야벳(10:1)
앞장에서 홍수가 끝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9:1). 이것은 원래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1:22). 즉, 노아는 새로운 아담으로 세움을 받으며,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과 "홍수 후"라는 두 단어는 첫절과 끝절(30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며 수미일치를 이룬다. 이리하여 저자는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홍수 기사(6:9-9:29)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노아"는 죽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이 각각 족장으로서 대표성을 가지며, 그들의 후손들이 이루는 나라들이 소개된다.
이 당시의 세계는 노아의 세 아들을 따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야벳(2-5절), 함(6-20절), 그리고 셈(21-31절)의 후손들이 나타나며, 각각 아들에 이어 후손들이 제시된다. 32절은 마지막 결론으로서 저자가 열국의 목록에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는 목적을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다"로 제시한다(32절). 저자는 독자들에게 열국들을 파노라마처럼 소개하며,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의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2) 야벳의 아들(10:2-5)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영블라드는 야벳이 장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0:21). 흥미롭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셈이 야벳의 "맏형"(<공동>), 혹은 "형"(<표준>, <개역>)으로 소개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야벳이 셈의 "형"으로 나타난다(NIV, RSV, NKJ // LXX). 마소라 사본에는 셈이 "큰 자 야벳의 형제" 즉 "맏형 야벳의 형제"('achi yepet haggadol)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셈을 야벳의 형으로 고집한 것은 아마 성경에서 이 세 사람은 항상 "셈, 함, 야벳"으로 소개되기 때문인 것 같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강사문은 "히브리인들의 방향 감각"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북남동서의 순서를 따르므로, 북쪽의 야벳인들과 남쪽의 함의 후손들과 동쪽의 셈족들 순서로 나타나며, 서쪽에 있는 야완 족속은 야벳의 줄기에 속해 있으므로 야벳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1998:124-25).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0장은 "셈, 함, 야벳"(1절)으로 시작하고, 이어 "야벳"(2절), "함"(6절), "셈"(21절)로 이루어지므로 완벽한 동심구조로 이들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세 형제들은 10장에서 "셈"으로 마쳤기 때문에, 바벨탑 이후에 바로 "셈의 후예"로 시작하여(11:10) 아브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먼 나라에 사는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민족으로 넘어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할 때, 지리적인 용어인 "지역"('지방' <공동>, '지역' <표준>;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생략됨), 언어적인 용어인 "방언"(<개역>; '언어' <공동>, <표준>, <개역개정>), 인종적인 용어인 "종족"(<개역>, <표준>; '씨족' <공동>), 그리고 정치적인 용어인 "나라"('부족' <공동>, <표준>)를 따라 열국들을 분석하고 있다(10:5). 바로 이런 기준 때문에 "가나안"은 언어학적으로 훨씬 가까운 셈족이 아니라, 함족 아래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스바"와 하빌라(10:7, 29)는 함족(10:7)과 셈족(10:28)에 두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사문은 야벳의 후손들이 길이는 짧지만 폭이 넓은 "방계족보"의 형식 속에 담겨 있음을 잘 지적한다(125쪽). 야벳은 7수 패턴을 따라 일곱 아들(10:2)과 일곱 손자를 가지며(3-4절), 모두 14명으로서 각각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저자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다섯(마곡, 마대, 두발, 메섹, 디라스)명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고멜과 야완의 자손들 7명만을 기록한다(3-4절). 즉, 이들의 후손이 여기에서 총체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으며 대표 14명만 소개된다. 이 후의 성경 역사와 문학에서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 포함된다(시 72:8-10). 이미 발람의 예언에서(민 24:7 이하),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통치 계획 속에 포함된다(민 24:23--24).
3) 함의 후손(10:6-20)
함의 후손은 모두 아들 4명(6절)과 손자 24명과 증손 2명(7-18절)으로 구성하며 4대에 걸쳐 모두 30 족속을 이루게 되며 방계 족보의 형식으로 소개된다. 이리하여 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가장 많은 나라들을 이루게 된다. 저자는 먼저 함의 네 아들들인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소개하고(6절), 이어서 야벳의 명단처럼 구스의 아들들을 소개한다(7절 상).
구스의 다섯 아들이 소개된 후에, 자연스럽게 함의 둘째 아들인 미스라임(애굽)의 후손들로 넘어가지 않고(13절), 갑자기 구스의 네째 아들인 라아마의 두 아들(7절 하)로 넘어간다. 이리하여 구스 가문에만 모두 "일곱 명의 아들들" 혹은 "씨족들"이 만들어진다. 아마 이것도 저자가 완전수인 "7곱 씨족"을 만들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구스의 첫 아들은 "스바"(Seba)나 "쓰바"(강사문)로 불려지며, 라아마의 첫 아들 "스바"(<개역>)는 "쉬바"(Sheba)나 "세바"(<공동>)로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구스의 후손 "일곱 족속들"을 소개한 후, 저자는 또 미스라임으로 넘어가지 않고 구스가 낳은 새로운 아들인 "니므롯"과 그의 도시들을 소개하고 있다(8-12절). 이리하여 갑자기 족보의 형식이 깨어지고 서술체로 넘어가며 니므롯의 인물됨(8-9절)과 그의 왕국이 소개된다(10-12절). 이리하여 10장에 나타난 열국의 목록에서 "니므롯"은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니므롯은 여기에서 (1)"세상의 첫 영걸"(gibbor) 즉, 위대한 군인으로 나타난다(삼상 9:1; 사 9:6; "장사" <공동, 표준>, "용사" <개역 개정>).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자로서 아마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자로 여겨지는 것 같다. 또한 그는(2)"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군"으로 소개된다(10:9). 여기에서 "여호와 앞에"란 최상급을 가리키므로 "당대 최고의 사냥군"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왕들은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냥에서 이룬 업적들을 자랑한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궁궐 양각세공에 자신의 용맹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니므롯의 활동을 인정했다거나 거부했다는 점을 명백히 시사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는 반역하리라"(marad, "to rebel")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어두운 그림자를 깔고 있는 느낌을 준다.
니므롯의 정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1)니므롯은 사냥과 전쟁의 신이며, 바벨론의 수호신인 니누르타(Ninurta)로 여겨진다. 그는 "화살, 강한 영웅"(the Arrow, the mighty hero)으로 불려졌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주전 2000년대에 널리 숭배되었다.(2) 니므롯을 역사적인 왕이나 신화적인 인물로 연결시키기를 원하는 학자들은 그를 앗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주전1246-1206년)와 동일시한다. 혹은 그는 "아카드의 왕 사르곤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Youngblood 130).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기를 원치 않는 학자들은 니므롯을 메소포타미아의 이상적 왕의 원형으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들에 따르면, "니므롯"은 적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세운 주역으로 그려진다.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은 천부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대담한 자로서 사람들로 하나님에 대해 오만하게 모욕하도록 자극하였다…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로 덮으려고 하기 전에…그는 홍수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탑을 세워 그들 조상들의 파멸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13-14).
"그는 주 앞에서 중대한 범죄를 하는 자였으므로, '니므롯처럼,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탈굼 네오피티 창 10:9).
"그는 사냥에 있어서 강하고 힘센 자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자였다. 그는 '셈의 [종교적] 법규를 버리고 니므롯의 법을 따르라"는 말로서 사람들을 속이곤 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용사 니므롯과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데 용사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용사였다"(탈굼 단편 창 10:9).
니므롯에 대한 이런 해석은 후대의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지만 창세기의 본문 속에 그와 "바벨탑"의 관계가 암시되는 것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창세기 저자는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Babel)과 에렉(Erech)과 악갓(Accad)과 갈레(Calneh)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0:10). 여기에는 "시날"(즉 바벨론)이 처음 나타나며, 또한 니므롯의 왕국이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 지명은 다음 장에 나타나는 "바벨탑"에 대한 복선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성경의 저자들은 바벨론을 실물보다 더 큰 상징적 가치를 가진 도시로 묘사하며 "하나님을 도전하는 세계의 제국"(사 13-14장)과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발전시킨다(계 17).
저자는 비로소 (자손의 족보로 돌아가 미스라임의 자손들을 제시하며, 다시 일곱 이름을 소개한다(10:13-14). 이리하여 7수의 패턴을 가진 마지막 이름들이 나오며, 뒤에 소개되는 이름들은 특정한 숫자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있다. 함의 후손들 중 중심을 이루는 자는 "미스라임"(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저자는 가나안의 후손을 모두 10족속으로 소개하며 그들의 영토를 상세하게 말한다(19절).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저자의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 땅은 장차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될 땅이기 때문이다(12:6).
4) 셈의 후손(10:21-31)
저자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21절)고 말함으로써 야벳(2절)과 함(6절)과는 다른 소개 형식을 취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족보 형식에서 서술체로 문체를 바꾸어 셈이 창세기 10장의 중심 인물이요, 그의 후손이 역사의 중심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셈의 후손들 명단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항을 주목하게 된다.
(1) 저자는 바로 이 절에서 "셈과 야벳의 관계"와 "셈과 그 후세대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뿐, 함을 배제해 버리는 것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때문인 것 같다(9:26-27). 그는 과거 이야기를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그의 중심 관심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방향에 있다. "에벨의 자손"이란 표현은 뒤에 나오는 족보를 바라본다(11:10-26; 민 24:24 참조). 따라서 노아 자손의 명단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는 앞서고 뒤따르는 설화의 맥락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2) 셈의 후손들 명단은 아주 선별적이지만, 6대에 걸친 방계 족보 속에 담겨 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아들 5명(5종족), 손자 5명(5종족), 증손자 10명(10종족)과 6대손 욕단에게서 나오는 13명(13종족)을 포함하여 26명(혹은 종족)으로 소개된다.
(3) 셈의 직계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지만(22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며 "에벨"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은 이후의 역사에서 "에벨"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에벨"(Eber)은 "히브리"(Hebrew)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최근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주전 2400년대로 추정되는 에블라 비문에서 "에브리움"(Ebrium)으로 나타난다. 그는 에블라에서 28년을 다스린 왕으로 소개된다(Youngblood 131).
(4) 에벨은 셈의 마지막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이지만,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계통이 된다. 그는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을 낳으며, "벨렉 때에 세상이 나누어진다"(25하). 여기에서부터 셈의 후손은 에벨의 두번째 아들 욕단(10:26-29)의 계통으로 이어진다. [욕단의 후손들 중에 "스바"(<개역>)가 다시 등장한다. 그 역시 "쉬바" 혹은 "세바"(<공동>)로 수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5) 따라서 저자는 셈의 족보를 에벨과 욕단을 거쳐 바벨론을 이루는 족속들(10:21-32)과 에벨과 벨렉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두 가문을 대조하고 있다(11:10-26). 이리하여 그는 셈의 한 계통이 바벨론 성을 짓고, 다른 계통은 아브라함의 가문이 됨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셈의 후손이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에 대해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으로 암시를 준다(10:25). "벨렉"(Peleg)은 히브리어로 "분열"이란 뜻이다. 여기에서의 "분열"이 지리적, 사회적, 영적인 분열 중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이리하여 장차 인류의 두 큰 주류가 셈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름(shem)을 내고자 애쓴 자들은 "혼돈의 성" 바벨론을 짓고 흩어지지만(1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셔서 그의 이름(shem)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2).
5) 노아의 후손(10:32)
"이들은 그 족보와 나라를 따라(나누어진) 노아의 후손들의 부족들이며,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나라들이 땅에 퍼져 나갔다"(사역; 10:32)는 서술체 문장은 10장의 후기로서, 열국이 나누어진 주제를 다시 부각시켜준다. 이리하여 저자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이야기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0장에서 인종과 언어와 지정학적인 범주를 따라 노아의 후손들을 묘사하다가, 11장에서는 갑자기 신학적으로 비약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열국을 분산시키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다시 열국을 자신 앞으로 모으시려고 하심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흩어짐(11:1-9)
바벨탑을 건축하는 기사는 족보를 다루는 창세기 10, 11장에서 셈의 두 계통 사이에 놓여 있다. 즉, 이 이야기는 (1)셈으로부터(10:22) 에벨(10:24)과 욕단(10:26-29)으로 이어지는 한 계통과 (2)셈으로부터(11:10) 에벨을 거쳐(11:14) 데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계통(11:25) 사이에 나타난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벨론 건설 기사는 욕단으로부터 14대 끝에 놓여있다(10:26-29). 그렇지만 벨렉의 계통에서는 10번째 끝에 아브람의 부름이 나온다(11:27-12:3). 따라서 셈의 후손들은 에벨의 두 아들에 의해 두 계통으로 나누어지며(10:25) 하나는 바벨론에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자리잡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핵심단어들을 반복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shem)이 중심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shamayim)에 이르는" 성과 탑을 쌓는다(11:4). 그러나 이름을 내려고 한 "거기서"(sham) 흩어진다(2, 8절).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바벨"(babel) 즉, "하나님의 대문"(Akk. bab'el)이라고 지었지만, 그 이름은 그들의 언어가 "혼돈"(balal)에 빠진 것과 이어진다(11:9). 인간들은 "벽돌을 만들"(nlb) "모여 살자"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혼잡케 하여"(nbl) "흩어버리자"고 하신다.
우리는 바벨탑 건축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1) 노아의 후손들은 이제 바벨론의 고대 명칭인 시날로 왔다(11:2).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에 있다. 건축가들은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웠다(11:2).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집을 세웠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 롯도 "동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간 사람들마다 모두 바벨론과 소돔을 세우는 것처럼 헛된 일을 하고 만다. 창세기 저자는 "생명"과 "번영"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복을 떠나고 있음을 말한다(Sailhammer).
(2) 인간들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성을 쌓는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도시와 망대를 쌓아 하나됨을 드러내고 싶었다. 만약 바벨탑의 배경이 가나안 땅이었다면 그들은 돌과 회반죽(mortar)으로 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11:3). 그들이 만든 "성"과 "대"는 전문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하며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다. 예배자들은 외부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그들을 잠깐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28:12)를 본 것은 "하늘에 닿는 탑"(11:4)과 유사하다. 고대의 사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종교적인 건물을 세운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높은 성을 짓고 그 안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세우시고자 하는 통일성과 다르다.
(3) 인간들은 "흩어짐"을 두려워한다(11:4).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흩으시는 사역을 거부하는 자율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성곽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한다(브루거만 100). 자기 자원으로서만 생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하늘을 찌르는 성을 세우는 자들"을 심판하신다(5절). 이 절은 마치 노아 홍수 기사에서 8:1처럼, 모든 이야기를 돌려주는 고리 기능을 한다. "이 절 앞에는 오직 인간의 행동 만 나타나며, 뒤에는 하나님의 행동만 나타난다. 항상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신다"(Youngblood 126).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탑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나빠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하시는가? 여기에서 실마리는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말에 있다. 즉 탑이 너무 높기 때문에, 뭔가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유대문헌에서는 이 점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자"(주빌리 10:19).
"그들[탑을 세우는 자들]은 송곳을 가지고 하늘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진흙이나, 놋쇠나 철 중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살펴보자.'"(바룩 3서 3:7-8).
"우리가 탑을 만들어 궁창에 올라가 그 물이 쏟아질 때까지 도끼로 찍어보자"(b. Sanhedrin 109a).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쟁으로 보았다.
"[천사가 바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려고 탑을 세운 자들이며, 주께서 그들을 제거하셨다"(바룩 3서 2:7).
현대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웅주의적 거인주의, 문화적 낙관주의, 과학적 낙관주의 이데올로기"를 찾는다(김이곤 81). 바벨탑은 "고대의 대성당"(cathedral of antiquity; Parrot)이라기 보다 인간 교만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제국이 추구하는 교만과 자족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신다.
(5) 이 도시는 "온 지면에 흩어짐"(parats)을 피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parats)"(11:8). 이 사실은 결론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11:8-9). 이것은 두 의지와 계획의 대립과 싸움을 보여준다. 바벨탑을 쌓기 전에 "온 땅"의 구음은 하나였고, 언어도 하나였다(11:1).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온 땅에" 흩어버렸다(11:8).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때, 결국 의사소통이 깨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6) 언어 혼잡의 모티프는 후에 스바냐 3:9-11에서, "주님께서 뭇 나라의 언어들을 정화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며, 그의 성산에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바벨탑으로 흩어진 인간의 언어와 사상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스바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다(행 2:8-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의 언어는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참으로 이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셈의 후예(11:10-26)
셈의 후예는 다른 "후예들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짧지만, 창세기의 고대사에서 여섯 번째 주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10명이 등장한다. 5장에서 유명한 인물들인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로 마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셈으로 시작하여 아브람으로 마친다.
10장에서 인류는 "번성하여" 70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졌다(11:1-9). 이제 셈의 후손들이 길게 소개되며(11:10-29),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넘어간다(12:1-3). 즉 전자는 "모든 나라들을 돌보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후자는 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해 준다(브루거만 94).
창세기 5장과 11장의 두 족보를 비교해 보라(표 1)
대수 창세기 5장 창세기 11장
1대 아담 셈
2대 셋 아르박사(가이난)
3대 에노스 셀라
4대 게난 에벨
5대 마할랄렐 벨렉
6대 야렛 르우
7대 에녹 스룩
8대 므두셀라 나홀
9대 라멕 데라
10대 노아 아브람, 나홀, 하란
이런 구조에서 보면, 저자는 10대에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말해준다. 열국은 흩어졌지만,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셈의 족보는 아브람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 족보를 통하여 저자는 태고사(창 3-11:26)와 족장사(11:27-50:26)를 완벽하게 이어준다.
창세기의 여섯 번째의 "세계"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이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이다. 즉, 저자는 신화의 배경 속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조상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야곱의 이야기에서이며 세속 역사에서는 이집트 왕 메르넵타의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조상은 세계사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실로 하나님은 이 복잡한 세속 세계사의 뒤얽힌 실타래로부터 '아르박삿'이라는 한 오라기의 줄을 이끌어내어(10:22) 마침내 아브라함으로 연결되는 구원사와 연결시켰던 것이다(11:10-26)"라는 김이곤의 관찰은 탁월하다(김이곤 78).
"셈의 후예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 데 이제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 이스라엘의 창조는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여기에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기 위하여 무엇을 미리 준비한 것이 없다(암 9:7; 겔 16:3을 보라).
노아 아들들의 세계와 셈의 후손들(창10:1-11:26)
이제 노아 홍수는 끝났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대청소하시는 일이 끝났다. 온 세상을 폭력과 불신으로 가득 채우며 "혼돈이 질서인 세상"을 만들던 소위 그 잘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매력 덩어리로 보였던 "사람의 딸들"과 그들 사이에 태어났던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인 네피림들도 역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악을 대량생산하던 "악인들"이 사라졌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와야하지 않을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유전인자들"로서 홍수 후의 세상을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어가지 않을까? 그들은 온 세상을 뒤엎는 홍수, 모든 문명의 전설 속에 기억되고 있는 파국적인 대홍수를 몸소 경험한 자들로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살지 않을까? 이런 신천신지의 꿈에 대해 창세기의 저자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하지만 낙관적이기 보다는 더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상에는 다시 니므롯 같은 무서운 "사냥꾼"이 등장하며, 그는 결국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며, 이번에는 "물의 혼돈" 대신 "언어의 혼돈"이 찾아와 온 세상이 분열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제도의 개선이나 새로운 "철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가느다란 희망이 된다. 홍수 전의 세상에서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던 "노아"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의 불씨"였다(창 5:29). 이번에는 셈의 10대 후손이 새로운 약속의 씨앗과 모종이 된다. 그가 누구일까?
이제 창세기에서 다섯 번째의 "개벽"이 시작된다. 노아는 "950년을 살고 죽었다"(9:29). 족장 노아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계'(toledot)가 시작된다"(10:1 상). 그리고 창세기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이루는 "셈의 세계"가 11:10에서 시작되며 아브람의 출생으로 태고사는 끝을 맺는다(1:1-11:26). 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세계들" 사이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타난다. 즉 바벨탑을 중심으로(11:1-10)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번성하였는지 먼저 말하며(10:1-32), 이어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후예를 소개한다(11:10-26).
그러나 이 흐름은 역사적인 순서라기 보다 문학적인 배열을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노아 아들들의 세상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는 "홍수 후에 그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는 말로 마치며(10:32), 이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더라"와 완벽한 짝을 이루고 있다(11:9). 이리하여 창세기 10장에서 여러 나라들이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벨탑 이야기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연대적으로 볼 때 10장의 중심적인 이야기 보다 앞에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것을 중앙에 둠으로써 족보를 연달아 제시하는 단조로움을 문학적으로 피하며, 모든 나라들이 "언어의 혼란"으로 흩어지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모으고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준다.
노아 아들들의 후예(10:1-32)
이 장은 자주 "열국의 목록"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지도"(Youngblood 128)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인종과 언어와 지역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는 족보를 우리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족보는 마치 영국 왕실처럼 "계대"를 따라 모든 일가친척들을 소개하여 "지속적인 연속성"을 만들어가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아시아의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A가 B를 낳다"는 형식은 직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후손", "후계자", 혹은 "나라들"을 뜻하며, "아버지"는 "조상," 혹은 "창건자"를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족보에서 "아들"은 "자손"으로도 번역된다(창 46:18,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벨사살과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관계는 후임자와 전임자의 관계이며(단 5:11), "에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 즉 "후계자"이다(마 9:27).
(2) 계보는 4수, 7수, 10수의 패턴을 따라 형성되어 가고 있다.
① 창세기 15:16에서 "네 자손이 4대(dor, daru)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할 때 "한 대"는 약 80년으로 여겨지는 "한 기간, 혹은 한 세대의 싸이클"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6:16-20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4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 4대의 패턴을 따른 족보이므로 완전한 족보가 아니다. 아므람은 "레위 지파(tribe)의 고핫 족(clan)의 가족(family)"으로 소개되지만 민수기 3:27, 28에서는 아므람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 6:20에서 "요게벳은 아므람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는 표현은 직계를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46:16-18에서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아들 중에는 증손자와 고손자도 포함되어 있다.
② 창세기 10장에서 야벳의 후손과 함의 아들 구스의 후손과 미스라임의 자손들이 7수 패턴을 따라 소개된다. 신약에서는 마태가 7대 손의 형식을 따라 메시야의 계통을 소개해 간다(1:1-17). 그는 1:8에서도 "요람" 다음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시야"를 넘어 바로 "웃시야"로 넘어간다(왕하 8:25; 11:2; 14:1, 21). 즉, 마태의 족보도 대단히 선별적이며 각 계대는 엄밀한 연속성을 따라 소개되고 있지 않다.
③ 창세기 5장과 10장에서 족보는 홍수를 전후로 10대 단위로 주어지며 10장에서는 7수와 10수를 사용하여 완전수 70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70개의 나라가 소개된 것은 그 당시 나라들이 70개 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70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열국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나라들"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역설하면서 홍수 후 인류의 통일성이 강조된다. 창세기 10장의 70나라는 역대상 1:5-23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수로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족보와 역사 계산에 있어서 어림수가 사용된다. 창세기 15:13에서 "400년 동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사는 기간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애굽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즉, 400년은 미래를 내다보며, 어림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12:40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정확히 계산한 햇수이다.
(4) 만약 성경의 족보를 연속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등장을 주전 2000년 경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노아 홍수는 그로부터 290년 전인 주전 2300년이 되고 아담은 약 주전 4000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기록인 우룩의 길가메쉬에 따르면 비록 60진법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홍수를 멀고 먼 과거의 일로 말한다.
성경의 족보에서 지속적인 연속성은 아담에서 에노스, 라멕에서 셈, 데라에서 아브람 정도로 연결되고 나머지는 확실치 않다. 출애굽의 세대들로서 브사렐은 야곱으로부터 7세대, 엘리샤마는 9세대, 여호수아는 11세대로 소개된다(대상 7:22-27).
(5) 족보는 문화와 민족에 따라 기능을 달리한다. 애굽 왕실의 족보는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며, 히타이트(Hittite)의 족보는 의식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역사성과 연대성은 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의 족보는 무엇 보다도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다(마1, 눅3). 창세기의 문맥에서 보면, 10장에 제시된 70나라의 배경 속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며, "그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12:3). 아브라함의 "씨"도 창세기 끝에서 "70명"으로 소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46:27; 출1:5 참조). 즉 이 70나라는 이후 애굽으로 간 야곱의 식구도 모두 70명을 예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둘째 아담으로서 "열국의 아비"가 된다(창 17:5). 이 선택된 "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원래의 축복(창1:26-28)이 회복된다.
창세기의 저자는 열국의 목록과 고대의 지도를 제시하면서, 몇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말해준다. 여기의 사건과 인물과 나라과 지명은 앞에 나올 창세기와 오경의 이야기와 특별한 연관성을 가지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야벳(10:1)
앞장에서 홍수가 끝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9:1). 이것은 원래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1:22). 즉, 노아는 새로운 아담으로 세움을 받으며,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과 "홍수 후"라는 두 단어는 첫절과 끝절(30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며 수미일치를 이룬다. 이리하여 저자는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홍수 기사(6:9-9:29)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노아"는 죽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이 각각 족장으로서 대표성을 가지며, 그들의 후손들이 이루는 나라들이 소개된다.
이 당시의 세계는 노아의 세 아들을 따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야벳(2-5절), 함(6-20절), 그리고 셈(21-31절)의 후손들이 나타나며, 각각 아들에 이어 후손들이 제시된다. 32절은 마지막 결론으로서 저자가 열국의 목록에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는 목적을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다"로 제시한다(32절). 저자는 독자들에게 열국들을 파노라마처럼 소개하며,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의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2) 야벳의 아들(10:2-5)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영블라드는 야벳이 장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0:21). 흥미롭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셈이 야벳의 "맏형"(<공동>), 혹은 "형"(<표준>, <개역>)으로 소개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야벳이 셈의 "형"으로 나타난다(NIV, RSV, NKJ // LXX). 마소라 사본에는 셈이 "큰 자 야벳의 형제" 즉 "맏형 야벳의 형제"('achi yepet haggadol)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셈을 야벳의 형으로 고집한 것은 아마 성경에서 이 세 사람은 항상 "셈, 함, 야벳"으로 소개되기 때문인 것 같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강사문은 "히브리인들의 방향 감각"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북남동서의 순서를 따르므로, 북쪽의 야벳인들과 남쪽의 함의 후손들과 동쪽의 셈족들 순서로 나타나며, 서쪽에 있는 야완 족속은 야벳의 줄기에 속해 있으므로 야벳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1998:124-25).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0장은 "셈, 함, 야벳"(1절)으로 시작하고, 이어 "야벳"(2절), "함"(6절), "셈"(21절)로 이루어지므로 완벽한 동심구조로 이들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세 형제들은 10장에서 "셈"으로 마쳤기 때문에, 바벨탑 이후에 바로 "셈의 후예"로 시작하여(11:10) 아브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먼 나라에 사는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민족으로 넘어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할 때, 지리적인 용어인 "지역"('지방' <공동>, '지역' <표준>;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생략됨), 언어적인 용어인 "방언"(<개역>; '언어' <공동>, <표준>, <개역개정>), 인종적인 용어인 "종족"(<개역>, <표준>; '씨족' <공동>), 그리고 정치적인 용어인 "나라"('부족' <공동>, <표준>)를 따라 열국들을 분석하고 있다(10:5). 바로 이런 기준 때문에 "가나안"은 언어학적으로 훨씬 가까운 셈족이 아니라, 함족 아래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스바"와 하빌라(10:7, 29)는 함족(10:7)과 셈족(10:28)에 두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사문은 야벳의 후손들이 길이는 짧지만 폭이 넓은 "방계족보"의 형식 속에 담겨 있음을 잘 지적한다(125쪽). 야벳은 7수 패턴을 따라 일곱 아들(10:2)과 일곱 손자를 가지며(3-4절), 모두 14명으로서 각각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저자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다섯(마곡, 마대, 두발, 메섹, 디라스)명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고멜과 야완의 자손들 7명만을 기록한다(3-4절). 즉, 이들의 후손이 여기에서 총체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으며 대표 14명만 소개된다. 이 후의 성경 역사와 문학에서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 포함된다(시 72:8-10). 이미 발람의 예언에서(민 24:7 이하),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통치 계획 속에 포함된다(민 24:23--24).
3) 함의 후손(10:6-20)
함의 후손은 모두 아들 4명(6절)과 손자 24명과 증손 2명(7-18절)으로 구성하며 4대에 걸쳐 모두 30 족속을 이루게 되며 방계 족보의 형식으로 소개된다. 이리하여 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가장 많은 나라들을 이루게 된다. 저자는 먼저 함의 네 아들들인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소개하고(6절), 이어서 야벳의 명단처럼 구스의 아들들을 소개한다(7절 상).
구스의 다섯 아들이 소개된 후에, 자연스럽게 함의 둘째 아들인 미스라임(애굽)의 후손들로 넘어가지 않고(13절), 갑자기 구스의 네째 아들인 라아마의 두 아들(7절 하)로 넘어간다. 이리하여 구스 가문에만 모두 "일곱 명의 아들들" 혹은 "씨족들"이 만들어진다. 아마 이것도 저자가 완전수인 "7곱 씨족"을 만들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구스의 첫 아들은 "스바"(Seba)나 "쓰바"(강사문)로 불려지며, 라아마의 첫 아들 "스바"(<개역>)는 "쉬바"(Sheba)나 "세바"(<공동>)로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구스의 후손 "일곱 족속들"을 소개한 후, 저자는 또 미스라임으로 넘어가지 않고 구스가 낳은 새로운 아들인 "니므롯"과 그의 도시들을 소개하고 있다(8-12절). 이리하여 갑자기 족보의 형식이 깨어지고 서술체로 넘어가며 니므롯의 인물됨(8-9절)과 그의 왕국이 소개된다(10-12절). 이리하여 10장에 나타난 열국의 목록에서 "니므롯"은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니므롯은 여기에서 (1)"세상의 첫 영걸"(gibbor) 즉, 위대한 군인으로 나타난다(삼상 9:1; 사 9:6; "장사" <공동, 표준>, "용사" <개역 개정>).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자로서 아마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자로 여겨지는 것 같다. 또한 그는(2)"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군"으로 소개된다(10:9). 여기에서 "여호와 앞에"란 최상급을 가리키므로 "당대 최고의 사냥군"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왕들은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냥에서 이룬 업적들을 자랑한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궁궐 양각세공에 자신의 용맹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니므롯의 활동을 인정했다거나 거부했다는 점을 명백히 시사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는 반역하리라"(marad, "to rebel")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어두운 그림자를 깔고 있는 느낌을 준다.
니므롯의 정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1)니므롯은 사냥과 전쟁의 신이며, 바벨론의 수호신인 니누르타(Ninurta)로 여겨진다. 그는 "화살, 강한 영웅"(the Arrow, the mighty hero)으로 불려졌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주전 2000년대에 널리 숭배되었다.(2) 니므롯을 역사적인 왕이나 신화적인 인물로 연결시키기를 원하는 학자들은 그를 앗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주전1246-1206년)와 동일시한다. 혹은 그는 "아카드의 왕 사르곤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Youngblood 130).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기를 원치 않는 학자들은 니므롯을 메소포타미아의 이상적 왕의 원형으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들에 따르면, "니므롯"은 적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세운 주역으로 그려진다.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은 천부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대담한 자로서 사람들로 하나님에 대해 오만하게 모욕하도록 자극하였다…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로 덮으려고 하기 전에…그는 홍수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탑을 세워 그들 조상들의 파멸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13-14).
"그는 주 앞에서 중대한 범죄를 하는 자였으므로, '니므롯처럼,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탈굼 네오피티 창 10:9).
"그는 사냥에 있어서 강하고 힘센 자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자였다. 그는 '셈의 [종교적] 법규를 버리고 니므롯의 법을 따르라"는 말로서 사람들을 속이곤 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용사 니므롯과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데 용사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용사였다"(탈굼 단편 창 10:9).
니므롯에 대한 이런 해석은 후대의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지만 창세기의 본문 속에 그와 "바벨탑"의 관계가 암시되는 것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창세기 저자는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Babel)과 에렉(Erech)과 악갓(Accad)과 갈레(Calneh)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0:10). 여기에는 "시날"(즉 바벨론)이 처음 나타나며, 또한 니므롯의 왕국이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 지명은 다음 장에 나타나는 "바벨탑"에 대한 복선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성경의 저자들은 바벨론을 실물보다 더 큰 상징적 가치를 가진 도시로 묘사하며 "하나님을 도전하는 세계의 제국"(사 13-14장)과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발전시킨다(계 17).
저자는 비로소 (자손의 족보로 돌아가 미스라임의 자손들을 제시하며, 다시 일곱 이름을 소개한다(10:13-14). 이리하여 7수의 패턴을 가진 마지막 이름들이 나오며, 뒤에 소개되는 이름들은 특정한 숫자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있다. 함의 후손들 중 중심을 이루는 자는 "미스라임"(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저자는 가나안의 후손을 모두 10족속으로 소개하며 그들의 영토를 상세하게 말한다(19절).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저자의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 땅은 장차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될 땅이기 때문이다(12:6).
4) 셈의 후손(10:21-31)
저자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21절)고 말함으로써 야벳(2절)과 함(6절)과는 다른 소개 형식을 취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족보 형식에서 서술체로 문체를 바꾸어 셈이 창세기 10장의 중심 인물이요, 그의 후손이 역사의 중심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셈의 후손들 명단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항을 주목하게 된다.
(1) 저자는 바로 이 절에서 "셈과 야벳의 관계"와 "셈과 그 후세대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뿐, 함을 배제해 버리는 것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때문인 것 같다(9:26-27). 그는 과거 이야기를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그의 중심 관심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방향에 있다. "에벨의 자손"이란 표현은 뒤에 나오는 족보를 바라본다(11:10-26; 민 24:24 참조). 따라서 노아 자손의 명단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는 앞서고 뒤따르는 설화의 맥락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2) 셈의 후손들 명단은 아주 선별적이지만, 6대에 걸친 방계 족보 속에 담겨 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아들 5명(5종족), 손자 5명(5종족), 증손자 10명(10종족)과 6대손 욕단에게서 나오는 13명(13종족)을 포함하여 26명(혹은 종족)으로 소개된다.
(3) 셈의 직계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지만(22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며 "에벨"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은 이후의 역사에서 "에벨"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에벨"(Eber)은 "히브리"(Hebrew)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최근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주전 2400년대로 추정되는 에블라 비문에서 "에브리움"(Ebrium)으로 나타난다. 그는 에블라에서 28년을 다스린 왕으로 소개된다(Youngblood 131).
(4) 에벨은 셈의 마지막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이지만,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계통이 된다. 그는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을 낳으며, "벨렉 때에 세상이 나누어진다"(25하). 여기에서부터 셈의 후손은 에벨의 두번째 아들 욕단(10:26-29)의 계통으로 이어진다. [욕단의 후손들 중에 "스바"(<개역>)가 다시 등장한다. 그 역시 "쉬바" 혹은 "세바"(<공동>)로 수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5) 따라서 저자는 셈의 족보를 에벨과 욕단을 거쳐 바벨론을 이루는 족속들(10:21-32)과 에벨과 벨렉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두 가문을 대조하고 있다(11:10-26). 이리하여 그는 셈의 한 계통이 바벨론 성을 짓고, 다른 계통은 아브라함의 가문이 됨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셈의 후손이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에 대해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으로 암시를 준다(10:25). "벨렉"(Peleg)은 히브리어로 "분열"이란 뜻이다. 여기에서의 "분열"이 지리적, 사회적, 영적인 분열 중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이리하여 장차 인류의 두 큰 주류가 셈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름(shem)을 내고자 애쓴 자들은 "혼돈의 성" 바벨론을 짓고 흩어지지만(1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셔서 그의 이름(shem)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2).
5) 노아의 후손(10:32)
"이들은 그 족보와 나라를 따라(나누어진) 노아의 후손들의 부족들이며,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나라들이 땅에 퍼져 나갔다"(사역; 10:32)는 서술체 문장은 10장의 후기로서, 열국이 나누어진 주제를 다시 부각시켜준다. 이리하여 저자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이야기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0장에서 인종과 언어와 지정학적인 범주를 따라 노아의 후손들을 묘사하다가, 11장에서는 갑자기 신학적으로 비약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열국을 분산시키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다시 열국을 자신 앞으로 모으시려고 하심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흩어짐(11:1-9)
바벨탑을 건축하는 기사는 족보를 다루는 창세기 10, 11장에서 셈의 두 계통 사이에 놓여 있다. 즉, 이 이야기는 (1)셈으로부터(10:22) 에벨(10:24)과 욕단(10:26-29)으로 이어지는 한 계통과 (2)셈으로부터(11:10) 에벨을 거쳐(11:14) 데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계통(11:25) 사이에 나타난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벨론 건설 기사는 욕단으로부터 14대 끝에 놓여있다(10:26-29). 그렇지만 벨렉의 계통에서는 10번째 끝에 아브람의 부름이 나온다(11:27-12:3). 따라서 셈의 후손들은 에벨의 두 아들에 의해 두 계통으로 나누어지며(10:25) 하나는 바벨론에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자리잡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핵심단어들을 반복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shem)이 중심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shamayim)에 이르는" 성과 탑을 쌓는다(11:4). 그러나 이름을 내려고 한 "거기서"(sham) 흩어진다(2, 8절).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바벨"(babel) 즉, "하나님의 대문"(Akk. bab'el)이라고 지었지만, 그 이름은 그들의 언어가 "혼돈"(balal)에 빠진 것과 이어진다(11:9). 인간들은 "벽돌을 만들"(nlb) "모여 살자"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혼잡케 하여"(nbl) "흩어버리자"고 하신다.
우리는 바벨탑 건축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1) 노아의 후손들은 이제 바벨론의 고대 명칭인 시날로 왔다(11:2).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에 있다. 건축가들은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웠다(11:2).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집을 세웠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 롯도 "동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간 사람들마다 모두 바벨론과 소돔을 세우는 것처럼 헛된 일을 하고 만다. 창세기 저자는 "생명"과 "번영"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복을 떠나고 있음을 말한다(Sailhammer).
(2) 인간들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성을 쌓는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도시와 망대를 쌓아 하나됨을 드러내고 싶었다. 만약 바벨탑의 배경이 가나안 땅이었다면 그들은 돌과 회반죽(mortar)으로 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11:3). 그들이 만든 "성"과 "대"는 전문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하며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다. 예배자들은 외부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그들을 잠깐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28:12)를 본 것은 "하늘에 닿는 탑"(11:4)과 유사하다. 고대의 사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종교적인 건물을 세운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높은 성을 짓고 그 안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세우시고자 하는 통일성과 다르다.
(3) 인간들은 "흩어짐"을 두려워한다(11:4).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흩으시는 사역을 거부하는 자율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성곽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한다(브루거만 100). 자기 자원으로서만 생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하늘을 찌르는 성을 세우는 자들"을 심판하신다(5절). 이 절은 마치 노아 홍수 기사에서 8:1처럼, 모든 이야기를 돌려주는 고리 기능을 한다. "이 절 앞에는 오직 인간의 행동 만 나타나며, 뒤에는 하나님의 행동만 나타난다. 항상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신다"(Youngblood 126).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탑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나빠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하시는가? 여기에서 실마리는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말에 있다. 즉 탑이 너무 높기 때문에, 뭔가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유대문헌에서는 이 점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자"(주빌리 10:19).
"그들[탑을 세우는 자들]은 송곳을 가지고 하늘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진흙이나, 놋쇠나 철 중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살펴보자.'"(바룩 3서 3:7-8).
"우리가 탑을 만들어 궁창에 올라가 그 물이 쏟아질 때까지 도끼로 찍어보자"(b. Sanhedrin 109a).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쟁으로 보았다.
"[천사가 바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려고 탑을 세운 자들이며, 주께서 그들을 제거하셨다"(바룩 3서 2:7).
현대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웅주의적 거인주의, 문화적 낙관주의, 과학적 낙관주의 이데올로기"를 찾는다(김이곤 81). 바벨탑은 "고대의 대성당"(cathedral of antiquity; Parrot)이라기 보다 인간 교만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제국이 추구하는 교만과 자족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신다.
(5) 이 도시는 "온 지면에 흩어짐"(parats)을 피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parats)"(11:8). 이 사실은 결론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11:8-9). 이것은 두 의지와 계획의 대립과 싸움을 보여준다. 바벨탑을 쌓기 전에 "온 땅"의 구음은 하나였고, 언어도 하나였다(11:1).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온 땅에" 흩어버렸다(11:8).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때, 결국 의사소통이 깨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6) 언어 혼잡의 모티프는 후에 스바냐 3:9-11에서, "주님께서 뭇 나라의 언어들을 정화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며, 그의 성산에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바벨탑으로 흩어진 인간의 언어와 사상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스바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다(행 2:8-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의 언어는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참으로 이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셈의 후예(11:10-26)
셈의 후예는 다른 "후예들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짧지만, 창세기의 고대사에서 여섯 번째 주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10명이 등장한다. 5장에서 유명한 인물들인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로 마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셈으로 시작하여 아브람으로 마친다.
10장에서 인류는 "번성하여" 70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졌다(11:1-9). 이제 셈의 후손들이 길게 소개되며(11:10-29),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넘어간다(12:1-3). 즉 전자는 "모든 나라들을 돌보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후자는 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해 준다(브루거만 94).
창세기 5장과 11장의 두 족보를 비교해 보라(표 1)
대수 창세기 5장 창세기 11장
1대 아담 셈
2대 셋 아르박사(가이난)
3대 에노스 셀라
4대 게난 에벨
5대 마할랄렐 벨렉
6대 야렛 르우
7대 에녹 스룩
8대 므두셀라 나홀
9대 라멕 데라
10대 노아 아브람, 나홀, 하란
이런 구조에서 보면, 저자는 10대에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말해준다. 열국은 흩어졌지만,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셈의 족보는 아브람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 족보를 통하여 저자는 태고사(창 3-11:26)와 족장사(11:27-50:26)를 완벽하게 이어준다.
창세기의 여섯 번째의 "세계"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이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이다. 즉, 저자는 신화의 배경 속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조상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야곱의 이야기에서이며 세속 역사에서는 이집트 왕 메르넵타의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조상은 세계사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실로 하나님은 이 복잡한 세속 세계사의 뒤얽힌 실타래로부터 '아르박삿'이라는 한 오라기의 줄을 이끌어내어(10:22) 마침내 아브라함으로 연결되는 구원사와 연결시켰던 것이다(11:10-26)"라는 김이곤의 관찰은 탁월하다(김이곤 78).
"셈의 후예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 데 이제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 이스라엘의 창조는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여기에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기 위하여 무엇을 미리 준비한 것이 없다(암 9:7; 겔 16:3을 보라).
노아 아들들의 세계와 셈의 후손들(창10:1-11:26)
이제 노아 홍수는 끝났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대청소하시는 일이 끝났다. 온 세상을 폭력과 불신으로 가득 채우며 "혼돈이 질서인 세상"을 만들던 소위 그 잘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매력 덩어리로 보였던 "사람의 딸들"과 그들 사이에 태어났던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인 네피림들도 역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악을 대량생산하던 "악인들"이 사라졌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와야하지 않을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유전인자들"로서 홍수 후의 세상을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어가지 않을까? 그들은 온 세상을 뒤엎는 홍수, 모든 문명의 전설 속에 기억되고 있는 파국적인 대홍수를 몸소 경험한 자들로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살지 않을까? 이런 신천신지의 꿈에 대해 창세기의 저자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하지만 낙관적이기 보다는 더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상에는 다시 니므롯 같은 무서운 "사냥꾼"이 등장하며, 그는 결국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며, 이번에는 "물의 혼돈" 대신 "언어의 혼돈"이 찾아와 온 세상이 분열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제도의 개선이나 새로운 "철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가느다란 희망이 된다. 홍수 전의 세상에서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던 "노아"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의 불씨"였다(창 5:29). 이번에는 셈의 10대 후손이 새로운 약속의 씨앗과 모종이 된다. 그가 누구일까?
이제 창세기에서 다섯 번째의 "개벽"이 시작된다. 노아는 "950년을 살고 죽었다"(9:29). 족장 노아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계'(toledot)가 시작된다"(10:1 상). 그리고 창세기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이루는 "셈의 세계"가 11:10에서 시작되며 아브람의 출생으로 태고사는 끝을 맺는다(1:1-11:26). 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세계들" 사이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타난다. 즉 바벨탑을 중심으로(11:1-10)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번성하였는지 먼저 말하며(10:1-32), 이어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후예를 소개한다(11:10-26).
그러나 이 흐름은 역사적인 순서라기 보다 문학적인 배열을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노아 아들들의 세상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는 "홍수 후에 그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는 말로 마치며(10:32), 이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더라"와 완벽한 짝을 이루고 있다(11:9). 이리하여 창세기 10장에서 여러 나라들이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벨탑 이야기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연대적으로 볼 때 10장의 중심적인 이야기 보다 앞에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것을 중앙에 둠으로써 족보를 연달아 제시하는 단조로움을 문학적으로 피하며, 모든 나라들이 "언어의 혼란"으로 흩어지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모으고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준다.
노아 아들들의 후예(10:1-32)
이 장은 자주 "열국의 목록"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지도"(Youngblood 128)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인종과 언어와 지역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는 족보를 우리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족보는 마치 영국 왕실처럼 "계대"를 따라 모든 일가친척들을 소개하여 "지속적인 연속성"을 만들어가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아시아의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A가 B를 낳다"는 형식은 직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후손", "후계자", 혹은 "나라들"을 뜻하며, "아버지"는 "조상," 혹은 "창건자"를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족보에서 "아들"은 "자손"으로도 번역된다(창 46:18,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벨사살과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관계는 후임자와 전임자의 관계이며(단 5:11), "에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 즉 "후계자"이다(마 9:27).
(2) 계보는 4수, 7수, 10수의 패턴을 따라 형성되어 가고 있다.
① 창세기 15:16에서 "네 자손이 4대(dor, daru)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할 때 "한 대"는 약 80년으로 여겨지는 "한 기간, 혹은 한 세대의 싸이클"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6:16-20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4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 4대의 패턴을 따른 족보이므로 완전한 족보가 아니다. 아므람은 "레위 지파(tribe)의 고핫 족(clan)의 가족(family)"으로 소개되지만 민수기 3:27, 28에서는 아므람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 6:20에서 "요게벳은 아므람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는 표현은 직계를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46:16-18에서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아들 중에는 증손자와 고손자도 포함되어 있다.
② 창세기 10장에서 야벳의 후손과 함의 아들 구스의 후손과 미스라임의 자손들이 7수 패턴을 따라 소개된다. 신약에서는 마태가 7대 손의 형식을 따라 메시야의 계통을 소개해 간다(1:1-17). 그는 1:8에서도 "요람" 다음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시야"를 넘어 바로 "웃시야"로 넘어간다(왕하 8:25; 11:2; 14:1, 21). 즉, 마태의 족보도 대단히 선별적이며 각 계대는 엄밀한 연속성을 따라 소개되고 있지 않다.
③ 창세기 5장과 10장에서 족보는 홍수를 전후로 10대 단위로 주어지며 10장에서는 7수와 10수를 사용하여 완전수 70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70개의 나라가 소개된 것은 그 당시 나라들이 70개 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70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열국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나라들"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역설하면서 홍수 후 인류의 통일성이 강조된다. 창세기 10장의 70나라는 역대상 1:5-23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수로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족보와 역사 계산에 있어서 어림수가 사용된다. 창세기 15:13에서 "400년 동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사는 기간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애굽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즉, 400년은 미래를 내다보며, 어림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12:40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정확히 계산한 햇수이다.
(4) 만약 성경의 족보를 연속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등장을 주전 2000년 경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노아 홍수는 그로부터 290년 전인 주전 2300년이 되고 아담은 약 주전 4000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기록인 우룩의 길가메쉬에 따르면 비록 60진법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홍수를 멀고 먼 과거의 일로 말한다.
성경의 족보에서 지속적인 연속성은 아담에서 에노스, 라멕에서 셈, 데라에서 아브람 정도로 연결되고 나머지는 확실치 않다. 출애굽의 세대들로서 브사렐은 야곱으로부터 7세대, 엘리샤마는 9세대, 여호수아는 11세대로 소개된다(대상 7:22-27).
(5) 족보는 문화와 민족에 따라 기능을 달리한다. 애굽 왕실의 족보는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며, 히타이트(Hittite)의 족보는 의식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역사성과 연대성은 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의 족보는 무엇 보다도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다(마1, 눅3). 창세기의 문맥에서 보면, 10장에 제시된 70나라의 배경 속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며, "그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12:3). 아브라함의 "씨"도 창세기 끝에서 "70명"으로 소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46:27; 출1:5 참조). 즉 이 70나라는 이후 애굽으로 간 야곱의 식구도 모두 70명을 예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둘째 아담으로서 "열국의 아비"가 된다(창 17:5). 이 선택된 "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원래의 축복(창1:26-28)이 회복된다.
창세기의 저자는 열국의 목록과 고대의 지도를 제시하면서, 몇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말해준다. 여기의 사건과 인물과 나라과 지명은 앞에 나올 창세기와 오경의 이야기와 특별한 연관성을 가지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야벳(10:1)
앞장에서 홍수가 끝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9:1). 이것은 원래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1:22). 즉, 노아는 새로운 아담으로 세움을 받으며,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과 "홍수 후"라는 두 단어는 첫절과 끝절(30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며 수미일치를 이룬다. 이리하여 저자는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홍수 기사(6:9-9:29)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노아"는 죽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이 각각 족장으로서 대표성을 가지며, 그들의 후손들이 이루는 나라들이 소개된다.
이 당시의 세계는 노아의 세 아들을 따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야벳(2-5절), 함(6-20절), 그리고 셈(21-31절)의 후손들이 나타나며, 각각 아들에 이어 후손들이 제시된다. 32절은 마지막 결론으로서 저자가 열국의 목록에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는 목적을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다"로 제시한다(32절). 저자는 독자들에게 열국들을 파노라마처럼 소개하며,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의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2) 야벳의 아들(10:2-5)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영블라드는 야벳이 장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0:21). 흥미롭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셈이 야벳의 "맏형"(<공동>), 혹은 "형"(<표준>, <개역>)으로 소개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야벳이 셈의 "형"으로 나타난다(NIV, RSV, NKJ // LXX). 마소라 사본에는 셈이 "큰 자 야벳의 형제" 즉 "맏형 야벳의 형제"('achi yepet haggadol)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셈을 야벳의 형으로 고집한 것은 아마 성경에서 이 세 사람은 항상 "셈, 함, 야벳"으로 소개되기 때문인 것 같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강사문은 "히브리인들의 방향 감각"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북남동서의 순서를 따르므로, 북쪽의 야벳인들과 남쪽의 함의 후손들과 동쪽의 셈족들 순서로 나타나며, 서쪽에 있는 야완 족속은 야벳의 줄기에 속해 있으므로 야벳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1998:124-25).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0장은 "셈, 함, 야벳"(1절)으로 시작하고, 이어 "야벳"(2절), "함"(6절), "셈"(21절)로 이루어지므로 완벽한 동심구조로 이들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세 형제들은 10장에서 "셈"으로 마쳤기 때문에, 바벨탑 이후에 바로 "셈의 후예"로 시작하여(11:10) 아브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먼 나라에 사는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민족으로 넘어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할 때, 지리적인 용어인 "지역"('지방' <공동>, '지역' <표준>;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생략됨), 언어적인 용어인 "방언"(<개역>; '언어' <공동>, <표준>, <개역개정>), 인종적인 용어인 "종족"(<개역>, <표준>; '씨족' <공동>), 그리고 정치적인 용어인 "나라"('부족' <공동>, <표준>)를 따라 열국들을 분석하고 있다(10:5). 바로 이런 기준 때문에 "가나안"은 언어학적으로 훨씬 가까운 셈족이 아니라, 함족 아래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스바"와 하빌라(10:7, 29)는 함족(10:7)과 셈족(10:28)에 두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사문은 야벳의 후손들이 길이는 짧지만 폭이 넓은 "방계족보"의 형식 속에 담겨 있음을 잘 지적한다(125쪽). 야벳은 7수 패턴을 따라 일곱 아들(10:2)과 일곱 손자를 가지며(3-4절), 모두 14명으로서 각각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저자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다섯(마곡, 마대, 두발, 메섹, 디라스)명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고멜과 야완의 자손들 7명만을 기록한다(3-4절). 즉, 이들의 후손이 여기에서 총체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으며 대표 14명만 소개된다. 이 후의 성경 역사와 문학에서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 포함된다(시 72:8-10). 이미 발람의 예언에서(민 24:7 이하),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통치 계획 속에 포함된다(민 24:23--24).
3) 함의 후손(10:6-20)
함의 후손은 모두 아들 4명(6절)과 손자 24명과 증손 2명(7-18절)으로 구성하며 4대에 걸쳐 모두 30 족속을 이루게 되며 방계 족보의 형식으로 소개된다. 이리하여 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가장 많은 나라들을 이루게 된다. 저자는 먼저 함의 네 아들들인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소개하고(6절), 이어서 야벳의 명단처럼 구스의 아들들을 소개한다(7절 상).
구스의 다섯 아들이 소개된 후에, 자연스럽게 함의 둘째 아들인 미스라임(애굽)의 후손들로 넘어가지 않고(13절), 갑자기 구스의 네째 아들인 라아마의 두 아들(7절 하)로 넘어간다. 이리하여 구스 가문에만 모두 "일곱 명의 아들들" 혹은 "씨족들"이 만들어진다. 아마 이것도 저자가 완전수인 "7곱 씨족"을 만들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구스의 첫 아들은 "스바"(Seba)나 "쓰바"(강사문)로 불려지며, 라아마의 첫 아들 "스바"(<개역>)는 "쉬바"(Sheba)나 "세바"(<공동>)로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구스의 후손 "일곱 족속들"을 소개한 후, 저자는 또 미스라임으로 넘어가지 않고 구스가 낳은 새로운 아들인 "니므롯"과 그의 도시들을 소개하고 있다(8-12절). 이리하여 갑자기 족보의 형식이 깨어지고 서술체로 넘어가며 니므롯의 인물됨(8-9절)과 그의 왕국이 소개된다(10-12절). 이리하여 10장에 나타난 열국의 목록에서 "니므롯"은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니므롯은 여기에서 (1)"세상의 첫 영걸"(gibbor) 즉, 위대한 군인으로 나타난다(삼상 9:1; 사 9:6; "장사" <공동, 표준>, "용사" <개역 개정>).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자로서 아마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자로 여겨지는 것 같다. 또한 그는(2)"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군"으로 소개된다(10:9). 여기에서 "여호와 앞에"란 최상급을 가리키므로 "당대 최고의 사냥군"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왕들은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냥에서 이룬 업적들을 자랑한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궁궐 양각세공에 자신의 용맹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니므롯의 활동을 인정했다거나 거부했다는 점을 명백히 시사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는 반역하리라"(marad, "to rebel")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어두운 그림자를 깔고 있는 느낌을 준다.
니므롯의 정체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1)니므롯은 사냥과 전쟁의 신이며, 바벨론의 수호신인 니누르타(Ninurta)로 여겨진다. 그는 "화살, 강한 영웅"(the Arrow, the mighty hero)으로 불려졌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주전 2000년대에 널리 숭배되었다.(2) 니므롯을 역사적인 왕이나 신화적인 인물로 연결시키기를 원하는 학자들은 그를 앗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주전1246-1206년)와 동일시한다. 혹은 그는 "아카드의 왕 사르곤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Youngblood 130).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기를 원치 않는 학자들은 니므롯을 메소포타미아의 이상적 왕의 원형으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들에 따르면, "니므롯"은 적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세운 주역으로 그려진다.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은 천부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대담한 자로서 사람들로 하나님에 대해 오만하게 모욕하도록 자극하였다…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로 덮으려고 하기 전에…그는 홍수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탑을 세워 그들 조상들의 파멸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13-14).
"그는 주 앞에서 중대한 범죄를 하는 자였으므로, '니므롯처럼,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탈굼 네오피티 창 10:9).
"그는 사냥에 있어서 강하고 힘센 자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자였다. 그는 '셈의 [종교적] 법규를 버리고 니므롯의 법을 따르라"는 말로서 사람들을 속이곤 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용사 니므롯과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데 용사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용사였다"(탈굼 단편 창 10:9).
니므롯에 대한 이런 해석은 후대의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지만 창세기의 본문 속에 그와 "바벨탑"의 관계가 암시되는 것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창세기 저자는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Babel)과 에렉(Erech)과 악갓(Accad)과 갈레(Calneh)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0:10). 여기에는 "시날"(즉 바벨론)이 처음 나타나며, 또한 니므롯의 왕국이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 지명은 다음 장에 나타나는 "바벨탑"에 대한 복선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성경의 저자들은 바벨론을 실물보다 더 큰 상징적 가치를 가진 도시로 묘사하며 "하나님을 도전하는 세계의 제국"(사 13-14장)과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발전시킨다(계 17).
저자는 비로소 (자손의 족보로 돌아가 미스라임의 자손들을 제시하며, 다시 일곱 이름을 소개한다(10:13-14). 이리하여 7수의 패턴을 가진 마지막 이름들이 나오며, 뒤에 소개되는 이름들은 특정한 숫자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있다. 함의 후손들 중 중심을 이루는 자는 "미스라임"(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저자는 가나안의 후손을 모두 10족속으로 소개하며 그들의 영토를 상세하게 말한다(19절).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저자의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 땅은 장차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될 땅이기 때문이다(12:6).
4) 셈의 후손(10:21-31)
저자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21절)고 말함으로써 야벳(2절)과 함(6절)과는 다른 소개 형식을 취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족보 형식에서 서술체로 문체를 바꾸어 셈이 창세기 10장의 중심 인물이요, 그의 후손이 역사의 중심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셈의 후손들 명단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항을 주목하게 된다.
(1) 저자는 바로 이 절에서 "셈과 야벳의 관계"와 "셈과 그 후세대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뿐, 함을 배제해 버리는 것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때문인 것 같다(9:26-27). 그는 과거 이야기를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그의 중심 관심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방향에 있다. "에벨의 자손"이란 표현은 뒤에 나오는 족보를 바라본다(11:10-26; 민 24:24 참조). 따라서 노아 자손의 명단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는 앞서고 뒤따르는 설화의 맥락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2) 셈의 후손들 명단은 아주 선별적이지만, 6대에 걸친 방계 족보 속에 담겨 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아들 5명(5종족), 손자 5명(5종족), 증손자 10명(10종족)과 6대손 욕단에게서 나오는 13명(13종족)을 포함하여 26명(혹은 종족)으로 소개된다.
(3) 셈의 직계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지만(22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며 "에벨"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은 이후의 역사에서 "에벨"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에벨"(Eber)은 "히브리"(Hebrew)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최근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주전 2400년대로 추정되는 에블라 비문에서 "에브리움"(Ebrium)으로 나타난다. 그는 에블라에서 28년을 다스린 왕으로 소개된다(Youngblood 131).
(4) 에벨은 셈의 마지막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이지만,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계통이 된다. 그는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을 낳으며, "벨렉 때에 세상이 나누어진다"(25하). 여기에서부터 셈의 후손은 에벨의 두번째 아들 욕단(10:26-29)의 계통으로 이어진다. [욕단의 후손들 중에 "스바"(<개역>)가 다시 등장한다. 그 역시 "쉬바" 혹은 "세바"(<공동>)로 수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5) 따라서 저자는 셈의 족보를 에벨과 욕단을 거쳐 바벨론을 이루는 족속들(10:21-32)과 에벨과 벨렉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두 가문을 대조하고 있다(11:10-26). 이리하여 그는 셈의 한 계통이 바벨론 성을 짓고, 다른 계통은 아브라함의 가문이 됨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셈의 후손이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에 대해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으로 암시를 준다(10:25). "벨렉"(Peleg)은 히브리어로 "분열"이란 뜻이다. 여기에서의 "분열"이 지리적, 사회적, 영적인 분열 중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이리하여 장차 인류의 두 큰 주류가 셈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름(shem)을 내고자 애쓴 자들은 "혼돈의 성" 바벨론을 짓고 흩어지지만(1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셔서 그의 이름(shem)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2).
5) 노아의 후손(10:32)
"이들은 그 족보와 나라를 따라(나누어진) 노아의 후손들의 부족들이며,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나라들이 땅에 퍼져 나갔다"(사역; 10:32)는 서술체 문장은 10장의 후기로서, 열국이 나누어진 주제를 다시 부각시켜준다. 이리하여 저자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이야기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0장에서 인종과 언어와 지정학적인 범주를 따라 노아의 후손들을 묘사하다가, 11장에서는 갑자기 신학적으로 비약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열국을 분산시키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다시 열국을 자신 앞으로 모으시려고 하심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흩어짐(11:1-9)
바벨탑을 건축하는 기사는 족보를 다루는 창세기 10, 11장에서 셈의 두 계통 사이에 놓여 있다. 즉, 이 이야기는 (1)셈으로부터(10:22) 에벨(10:24)과 욕단(10:26-29)으로 이어지는 한 계통과 (2)셈으로부터(11:10) 에벨을 거쳐(11:14) 데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계통(11:25) 사이에 나타난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벨론 건설 기사는 욕단으로부터 14대 끝에 놓여있다(10:26-29). 그렇지만 벨렉의 계통에서는 10번째 끝에 아브람의 부름이 나온다(11:27-12:3). 따라서 셈의 후손들은 에벨의 두 아들에 의해 두 계통으로 나누어지며(10:25) 하나는 바벨론에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자리잡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핵심단어들을 반복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shem)이 중심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shamayim)에 이르는" 성과 탑을 쌓는다(11:4). 그러나 이름을 내려고 한 "거기서"(sham) 흩어진다(2, 8절).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바벨"(babel) 즉, "하나님의 대문"(Akk. bab'el)이라고 지었지만, 그 이름은 그들의 언어가 "혼돈"(balal)에 빠진 것과 이어진다(11:9). 인간들은 "벽돌을 만들"(nlb) "모여 살자"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혼잡케 하여"(nbl) "흩어버리자"고 하신다.
우리는 바벨탑 건축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1) 노아의 후손들은 이제 바벨론의 고대 명칭인 시날로 왔다(11:2).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에 있다. 건축가들은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웠다(11:2).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집을 세웠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 롯도 "동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간 사람들마다 모두 바벨론과 소돔을 세우는 것처럼 헛된 일을 하고 만다. 창세기 저자는 "생명"과 "번영"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복을 떠나고 있음을 말한다(Sailhammer).
(2) 인간들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성을 쌓는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도시와 망대를 쌓아 하나됨을 드러내고 싶었다. 만약 바벨탑의 배경이 가나안 땅이었다면 그들은 돌과 회반죽(mortar)으로 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11:3). 그들이 만든 "성"과 "대"는 전문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하며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다. 예배자들은 외부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그들을 잠깐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28:12)를 본 것은 "하늘에 닿는 탑"(11:4)과 유사하다. 고대의 사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종교적인 건물을 세운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높은 성을 짓고 그 안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세우시고자 하는 통일성과 다르다.
(3) 인간들은 "흩어짐"을 두려워한다(11:4).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흩으시는 사역을 거부하는 자율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성곽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한다(브루거만 100). 자기 자원으로서만 생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하늘을 찌르는 성을 세우는 자들"을 심판하신다(5절). 이 절은 마치 노아 홍수 기사에서 8:1처럼, 모든 이야기를 돌려주는 고리 기능을 한다. "이 절 앞에는 오직 인간의 행동 만 나타나며, 뒤에는 하나님의 행동만 나타난다. 항상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신다"(Youngblood 126).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탑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나빠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하시는가? 여기에서 실마리는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말에 있다. 즉 탑이 너무 높기 때문에, 뭔가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유대문헌에서는 이 점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자"(주빌리 10:19).
"그들[탑을 세우는 자들]은 송곳을 가지고 하늘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진흙이나, 놋쇠나 철 중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살펴보자.'"(바룩 3서 3:7-8).
"우리가 탑을 만들어 궁창에 올라가 그 물이 쏟아질 때까지 도끼로 찍어보자"(b. Sanhedrin 109a).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쟁으로 보았다.
"[천사가 바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려고 탑을 세운 자들이며, 주께서 그들을 제거하셨다"(바룩 3서 2:7).
현대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웅주의적 거인주의, 문화적 낙관주의, 과학적 낙관주의 이데올로기"를 찾는다(김이곤 81). 바벨탑은 "고대의 대성당"(cathedral of antiquity; Parrot)이라기 보다 인간 교만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제국이 추구하는 교만과 자족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신다.
(5) 이 도시는 "온 지면에 흩어짐"(parats)을 피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parats)"(11:8). 이 사실은 결론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11:8-9). 이것은 두 의지와 계획의 대립과 싸움을 보여준다. 바벨탑을 쌓기 전에 "온 땅"의 구음은 하나였고, 언어도 하나였다(11:1).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온 땅에" 흩어버렸다(11:8).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때, 결국 의사소통이 깨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6) 언어 혼잡의 모티프는 후에 스바냐 3:9-11에서, "주님께서 뭇 나라의 언어들을 정화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며, 그의 성산에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바벨탑으로 흩어진 인간의 언어와 사상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스바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다(행 2:8-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의 언어는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참으로 이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셈의 후예(11:10-26)
셈의 후예는 다른 "후예들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짧지만, 창세기의 고대사에서 여섯 번째 주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10명이 등장한다. 5장에서 유명한 인물들인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로 마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셈으로 시작하여 아브람으로 마친다.
10장에서 인류는 "번성하여" 70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졌다(11:1-9). 이제 셈의 후손들이 길게 소개되며(11:10-29),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넘어간다(12:1-3). 즉 전자는 "모든 나라들을 돌보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후자는 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해 준다(브루거만 94).
창세기 5장과 11장의 두 족보를 비교해 보라(표 1)
대수 창세기 5장 창세기 11장
1대 아담 셈
2대 셋 아르박사(가이난)
3대 에노스 셀라
4대 게난 에벨
5대 마할랄렐 벨렉
6대 야렛 르우
7대 에녹 스룩
8대 므두셀라 나홀
9대 라멕 데라
10대 노아 아브람, 나홀, 하란
이런 구조에서 보면, 저자는 10대에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말해준다. 열국은 흩어졌지만,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셈의 족보는 아브람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 족보를 통하여 저자는 태고사(창 3-11:26)와 족장사(11:27-50:26)를 완벽하게 이어준다.
창세기의 여섯 번째의 "세계"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이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이다. 즉, 저자는 신화의 배경 속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조상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야곱의 이야기에서이며 세속 역사에서는 이집트 왕 메르넵타의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조상은 세계사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실로 하나님은 이 복잡한 세속 세계사의 뒤얽힌 실타래로부터 '아르박삿'이라는 한 오라기의 줄을 이끌어내어(10:22) 마침내 아브라함으로 연결되는 구원사와 연결시켰던 것이다(11:10-26)"라는 김이곤의 관찰은 탁월하다(김이곤 78).
"셈의 후예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 데 이제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 이스라엘의 창조는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여기에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기 위하여 무엇을 미리 준비한 것이 없다(암 9:7; 겔 16:3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