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복음말씀의 향기♣ No4105
1월16일[연중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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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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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MEJzkLoi2_0
[서울대교구 이철규 아우구스티노(주교좌 명동대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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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첫 번째 독서 히브리서를 봉독하고 묵상하던 중 오늘따라 ‘오늘’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은혜롭고 눈물겹게 다가옵니다.
오늘이 그저 그런 하루,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영양가 없는 하루가 될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마음먹는가에 따라서 오늘이 일생일대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수많은 ‘오늘’을 그냥 허송세월하며 살아왔습니다. 얼마나 금쪽같은 오늘인데, 그 소중한 오늘을 즐기지도 만끽하지도 못하고 소모시켜 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베트남 공산화 이후 공산당 정권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간 구엔 반 투안 대주교님은 구속 영장도, 그 어떤 절차도 없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그리고 장장 13년 세월 동안 옥고를 치룹니다.
첫해가 지나가면서 대주교님은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고, 무슨 방법이 있겠지. 마냥 이 음습한 독방에 갇혀있지는 않겠지. 누군가가 반드시 도와주겠지. 조만간 풀려나겠지. 무슨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2년,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그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 중에 대주교님은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
그러나 어떻게? 그 뒤로 대주교님은 독방을 주교좌 성당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담당한 교도관을 예수님으로 섬겼습니다. 사이공 대교구 주교로서 자신이 담 밖의 교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거룩한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물론 독방에서 혼자서, 양손 바닥 위에 작은 빵조각 하나, 포도주 한 방울을 올려놓고 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 말씀처럼 오늘이 구원의 날이니, 오늘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하루로 엮어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내 입에 나오는 말 한마디, 손짓 한번, 전화 한 통화, 결정 하나 하나가 나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일 매 순간이 기적입니다. 살아온 날이 기적이고, 살아갈 날이 기적이며,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너무나 큰 죄인이고 큰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어제의 나를 거두어가시고, 어제의 내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다는 가장 뚜렷한 표징인 새로운 하루 앞에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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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충남 태안 살레시오 피정 센터 프로그램 안내]
<주말 영성 피정>
2/28-3/2, 3/14-16, 3/21-23, 4/11-13, 4/18-20, 5/2-4, 5/23—25, 5/30-6/1, 7/11-13, 8/29-31, 9/19-21, 9/26-28, 10/3-5, 10/10-12, 11/7-9, 11/14-16, 11/21-23, 11/28-30, 12/5-7, 12/12-14, 12/23-25, 12/30-1/1
<휴가와 기도, 친교와 놀이가 어우러진 가족 캠프>
7/18-20, 7/23-25, 7/28-30, 8/5-7, 8/9-11
<복사단 피정>
3/8-9, 4/26-27
<주일학교 교리교사 피정>
3/29-30
<자모회 피정>
5/10-11
<청년 피정>
5/28-29
<참가비>
1박 2일 3끼 식사(2인 1실) 일인당 12만원
2박 3일 6끼 식사(2인 1실) 일인당 17만원
*대중교통 이용객들을 위한 태안 버스 터미널 픽업 가능
*각 피정에는 개인 및 소그룹, 단체 신청 가능
*가족 캠프에는 초중고대학생 자녀들을 동반한 부모 및 조부모가 함께 신청
피정 센터 부설 마르가리타집, 마르티나 집
위 프로그램 일정과 상관없이 피정 센터 부설 마르가리타집, 마르티나집에 머무시면서 개인 및 가족, 단체 피정 및 휴가가 가능합니다. 수도원 미사, 고백성사, 상담 등 가능합니다. 숙소에는 취사도구와 쌀, 기본 반찬이 준비되어 있으니, 직접 해 드시면 됩니다.
*문의: 041-675-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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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LE6Hlxcb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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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도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의 만남이 어떻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기도의 목적과 방법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가 잘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묵상하면 우리는 나의 기도가 잘 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는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곧 창조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만큼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본래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진 죽은 모습입니다. 이 원형이 본래의 창조 모형인 그리스도처럼 회복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이 지식과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원형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결과를 낳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분심이 안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기도는 힘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이 기도의 원형입니다. 변화는 힘이 듭니다.
영화 ‘리얼 스틸’(2011)은 공상과학 영화지만, 쓸모없어서 버려진 주인공 로봇이 어떻게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기도를 통해 우리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톰은 버려지고 잊혀진 로봇으로, 쓰레기장에서 묻혀 있던 한때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맥스가 아톰을 발견하면서, 아톰의 회복과 더불어 원래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는 오늘 복음(마르코 1,40-45)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병환자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영성의 단계로 말하자면, 이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첫 단계인 ‘구송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톰은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단지 외부 명령에 반응할 뿐입니다. 이는 구송 기도에서 우리가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말을 내뱉으며 시작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맥스는 아톰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톰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듯, 끊임없이 주목을 요구합니다. 맥스는 마지못해 아톰을 경기장에 데려가고, 아톰은 경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합니다. 이는 소개의 단계입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첫 목소리입니다.
아톰이 수리되고 훈련되면서, 그 성장 과정은 다음 단계인 ‘듣기’로 전환됩니다. 이제 아톰은 단순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넘어, 맥스와 찰리의 의도를 해석하며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아톰의 행동은 점점 더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주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는 영성에서 묵상 기도에 해당하는 단계로, 영혼이 말을 한 후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해가 깊어지고, 아톰이 조종자의 지시를 듣고 동작을 세밀히 조정하듯, 영혼도 신적 인도를 들으며 자신을 정제해 갑니다.
아톰의 변모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은 바로 챔피언 ‘제우스’와의 대결에서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톰은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만 의존하지 않고, 맥스와 찰리의 움직임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아톰은 마치 찰리의 복싱 기술을 거울처럼 따라하며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톰은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하며, 이는 영혼이 관상 기도를 통해 단어와 행동을 초월하여 하느님과 일치되는 단계와 유사합니다. ‘보기’ 혹은 관상의 단계는 침묵 속에서 주님의 본질을 흡수하고 이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아톰의 성장은 단지 더 나은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목적과 가치를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뒤 깨끗하게 되어 회복된 나병환자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구송, 묵상, 관상의 각 단계는 이러한 회복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봉헌하고 그 자리에 주님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먼저 구송기도, 혹은 소리기도를 통해 나를 드러냅니다. 숨어있어도 되지만,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나에게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냥 혼자 있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그만큼 문둥병에서 나아질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그다음은 묵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야 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들어야 합니다. 내 정신까지도 그분께 드리는 시간입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만큼 더 문둥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지막은 관상 기도인데,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이제 나를 완전히 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완벽히 봉헌하는 이 기도는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이자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완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내가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기도를 하고 싶어도 다 순서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잘 알아서 힘들다고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되고, 힘들지 않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더 힘든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모습으로 변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효과는 기도가 끝난 이후에 확실히 나타납니다.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힘이 활동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멈출 수 없게 됩니다. 또 고통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조금 더 나병에서 치유되며 온전한 창조된 원형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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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재(現在)’라는 말은 영어로 ‘Present’라고 합니다. Present는 ‘선물(膳物)’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선물’입니다. 제가 매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는 겁니다. 하루하루 쌓여서 어느덧 3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30년을 하려고 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루는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여서 30년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걷는 겁니다. 맑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걸었습니다. 요즘에는 스마트 폰과 갤럭시 워치에 걷는 발걸음이 표시됩니다. 1달이면 9십만 보가 됩니다. 9십만 보를 작정하고 걸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루하루가 쌓여서 90만 보가 되었습니다. 쇼팽의 ‘왈츠’를 연습했습니다. 처음에는 연결이 안 되었고, 많이 틀렸습니다. 매일 연습하니 어느덧 6개월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연결이 되고, 틀리는 부분도 적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려 했으면 포기했을 겁니다. 매일 꾸준히 하니 부족하지만, 결실을 보았습니다.
오늘이 과거가 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미래가 되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믿음은 질곡과 같았던 과거를 깨끗한 오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은 ‘믿음’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하혈하던 여인은 믿음으로 치유되었습니다. 죽었던 회당장의 딸은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건 가을이면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박해와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이 세상의 삶이 마쳐지면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여명의 눈동자와 같습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을 잊어버렸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넜던 놀라운 기적을 잊어버렸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렸습니다. 광야라는 현상에 머물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잊어버렸습니다. 광야는 거칠고 황량한 땅입니다. 마실 물도 귀하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나쁜 관습을 버리는 정화의 땅입니다. 광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거룩한 땅입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듯이, 광야를 거쳐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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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합니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겨 사제가 부정한 이로 선언하면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스스로 ‘부정한 이’라 외친 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인간계에서 배제되었던 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경계를 넘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이것이 바로 그를 가엾이 여기시어 어루만지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고쳐 주신 뒤 단단히 이르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1,44)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 환자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서 정결한 이로 선언받고 정결례와 속죄 예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진영 안, 곧 자신의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처지가 워낙 좋지 못하여 당장은 율법을 어기고 넘어온 그를 받아 주셨지만 치유된 다음에는 율법을 통한 회복의 절차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일을 퍼뜨립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구세주를 만난 이, 구원받은 이의 환호성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성가』에 있는 성가곡의 노랫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당신이 누구신지 / 세상에 외치고 싶어 주의 크신 사랑.” 아직까지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까지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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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40-45: 깨끗하게 되어라
한센병 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셨다. 그러자 한센병의 증세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았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금하는 데도 한센병 환자를 만지셨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는 만져서는 안 되는 한센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나 허물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예수께서 만지시려고 손을 내미실 때, 이미 한센병은 치유되었다. 주님의 손은 한센병 환자를 만지신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만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나쁜 병으로 감염이 되었거나, 죄로 오염이 되어있다면 지금 즉시 하느님께로 돌아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하느님께서는 즉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손은 한센병으로 더러워지지 않았고, 환자는 그 거룩한 손으로 깨끗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침묵을 요구하셨지만 오래 감추어지지는 못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예수님의 계명과 모범을 따르면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뜻과는 반대로 그 활동이 알려지기도 한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44절)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사제에게 보내 예물을 바치게 하셨다. 우리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나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죄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다는 것을 믿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께 갈 수 있는 용기와 은혜를 청하면서 항구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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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1) 여기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단단히 이르셨다.’라는 말은, 지금 이 명령은 ‘반드시’ 지켜야 할 매우 중요한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몸의 치유’만을 바라고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몸의 치유’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그 병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병이 치유된 일은 그 병자 자신에게도, 가족과 친지들과 친구들에게도 분명히 좋은 일이었고 기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자기 생각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무시했거나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엄하게 명령하셨는지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해가 안 되어도, 납득이 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만을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3) 그 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셔야만 했습니다.
그 병자가 무슨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예수님의 일을 크게 방해한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십자가의 길을 말렸던 베드로 사도의 행동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베드로 사도를 아주 엄하게 꾸짖으셨는데(마태 16,23), 만일에 그 병자를 다시 만나셨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그 병자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 기뻐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 일은 ‘사람의 일’이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마라.”라고 ‘단단히’ 이르신 일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신앙인은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만 따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뒤에, 제자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고,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 굳게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심정으로는 그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기들이 듣고 본 일들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납득하지도 못했지만, 그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5) 예수님께서는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어떤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 경우는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인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방인 지역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충실하게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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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사제로부터 부정한 이로 선언되었고, 다시 건강해져 사제로부터 건강한 이로 판명된 뒤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치유되었음을 인정받을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사람임을 표시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환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여겨졌기에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인 소외가 그들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의 처지가 무척이나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적 고통보다 사람들에게 눈총받고 소외당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몸과 닫힌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들 가운데 상처로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던 아픈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 내보이며,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정성을 다하여 오늘 예물 기도처럼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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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원의를 강조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믿었고 그분을 만납니다.
복음은 그의 행동을 ‘오다’, ‘청하다’, ‘무릎을 꿇다’로 표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이미 그의 행동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기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유 이야기이지만 나병 환자의 모습은 기도하는 이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수난 전에 겟세마니에서 홀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예수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본보기입니다.
나병 환자도 이를 충실하게 따릅니다.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기도는 모두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먼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합니다. 무작정 청하기보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들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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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합니다. 레위기 13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이 생겨 사제가 부정한 이로 선언하면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콧수염을 가리고 스스로 ‘부정한 이’라 외친 뒤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따라 인간계에서 배제되었던 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경계를 넘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이것이 바로 그를 가엾이 여기시어 어루만지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고쳐 주신 뒤 단단히 이르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1,44) 레위기 14장에 따르면, 악성 피부병 환자가 병이 나으면 사제에게서 정결한 이로 선언받고 정결례와 속죄 예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진영 안, 곧 자신의 공동체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처지가 워낙 좋지 못하여 당장은 율법을 어기고 넘어온 그를 받아 주셨지만 치유된 다음에는 율법을 통한 회복의 절차를 밟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이르셨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일을 퍼뜨립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 구세주를 만난 이, 구원받은 이의 환호성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성가』에 있는 성가곡의 노랫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당신이 누구신지 / 세상에 외치고 싶어 주의 크신 사랑.” 아직까지 주님을 전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까지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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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합니다. 남녀 간의 만남을 다루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 역사는 199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결혼이 목적인 청춘남녀들이 맞선을 하는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사랑의 스튜디오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 숫자도 늘어났고, 특히 비연예인 출연진으로 현실감을 높인 연애 프로그램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런 연애 프로그램이 왜 끊임없이 인기를 끌까요? 어차피 여기에 나오는 연애란 결국 나의 연애가 아니라, 남의 연애가 아닙니까?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요? 하긴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교생 선생님이 오시면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이를 심리학자들은 ‘감정전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출연자가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느끼는 설렘이 말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되니, 이에 시청자도 자연스럽게 설렘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성당에 나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엄숙해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좋게 말해서 엄숙한 것이지, 어쩌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기쁨도 없고, 그저 마지못해 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의 모습에 처음 온 사람들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감정전이가 되지 않아, 전혀 설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자기 자리에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거리에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기의 표정 하나도 전교의 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표정만으로도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치유된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단단히 이르십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후 행동에 대해 이렇게 복음은 전합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나병의 치유를 널리 알려야 주님을 더 믿고 따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널리 알리고 퍼뜨린 것은 오히려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알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건강을 알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 아니었을까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자체가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 하나에서도 주님을 충분히 전할 수 있으며, 주님과 진심으로 함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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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마르코 1,40-45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참사람>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사람들 밖에서
사람일 수 없으니
사람이기 위해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참사람에게
무릎 꿇고 빌고 빈다네
참사람이시여
하고자 하시면
나를 다시 사람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 밖에서
사람일 수 없지만
다시 사람이고 싶기에
간청하는 사람에게
참사람이 손을 대시며
따뜻하게 말씀하신다네
그대 사람아
내가 하고자 하니
다시 사람이 되게나
하지만 사람아
굳이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게나
다만 사람아
사람에게 가서
사람임을 보여주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게나
허나 다시 사람이 된 사람이
어찌 아무 말 없이 살며시
사람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랴
사람들아
나를 보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나도 이렇게 다시 사람입니다
나도 그대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참사람께서 나를 사람이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참을 수 없는
기쁨의 외침이 터지고 터질밖에
사람들 밖에서
사람들 안으로
감격에 겨워 힘차게 달려가
사람이 사람들과 어울린 뒤에
사람들 안에서
사람들 밖으로
편안한 제 자리에
머뭇거리지 않고
기꺼이 나와서
사람이 다시 사람이 되게
온 몸과 온 마음 건넨
참사람께서
더 이상 드러나게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 사람들 밖에서 머무신다네
나 이렇게
사람들 밖에 있어도
나로 말미암아 사람이
사람들 안에 있을 수 있으니
이것이 사람 사는 보람이리라
넉넉한 웃음 지으시며
그러니 참으로 사람이시지
나 또한 그리 되고픈
바로 참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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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몸과 마음을 모두 치유해 주십니다>
저는 한때 허리 디스크로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해 주는 약을 먹기도 하고.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픔을 겪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계속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 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병은 죄의 결과로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였고, 그래서 병자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 13,45-46) 사회적으로도 소외시키고 외면했습니다.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무엇이든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음을 말해줍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불결함을 피하지만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육체적 고통에서뿐 아니라 종교적 단죄, 그리고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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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께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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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였다.”(마르코.1,40)
우리 모두는 내적으로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보기 싫어하는 모습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내적인 나병 환자입니다.
드러난 상처는 잘 보여서 고치기도 쉽지만 안에서 곪은 상처는 잘 보이지 않아서 고치기도 어렵습니다.
내면의 상처 때문에 힘들지만 우리는 왜 힘든지 모르고 삽니다. 마음에 있는 내적인 원인보다 겉만 치유하기에 바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내적 상처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우리는 자주 외적인 것에 둡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혹은 돈이나 힘이 없어서 불행하게 여깁니다. 때로는 배운 것이 모자라거나 인정을 받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사람이나 돈, 그리고 힘이나 학벌이나 명예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입니다. 그 자체가 행복이나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보지 못할수록 현실적 조건을 자신처럼 착각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내면의 상처입니다. 어떤 상처가 우리 안에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을 성취하는데 지나치게 바쁜 우리는 내면의 상처가 곪아 겉과 속이 모두가 나병으로 번질 때가지 덮어 둡니다.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내면이 나병처럼 곪아 있으면 우리는 불행을 느낍니다. 가진 것이 조금은 부족해도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참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겸허하게 자주 무릎을 꿇고 덮어둔 자신의 한계와 상처를 주님께 열어 보일 때 우리는 온전한 모습으로 행복하게 됩니다.
오늘 나병 환자는 주님께 무릎을 꿇어 도움을 청하였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어 자신을 볼 줄 모르면, 우리는 많은 성취를 해도 공허하기만 합니다.
나병환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덮어둔 내면의 상처를 바라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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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줄 사람은 생각치도 않는데 바라는 쪽에서 일이 다 된 것처럼 미리부터 기대하는 모습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지요.
이런 상황이 가장 자주 벌어지는 때가 아마 ‘기도’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주님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청하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질 때, 장소, 조건까지 미리 다 정해놓고 주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이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꼭 그렇게 해주셔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엄포를 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주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주님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니 내 바람을 들어주시는건 전혀 어렵지 않을테고, 그러니 ‘당연히’ 들어주셔야만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술 방망이’도 아니고, ‘램프의 요정’도 아니며, ‘자판기’도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과 의지로 세상과 사람들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그분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에는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을게 아니라 먼저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그분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전능하심’이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당신이 뜻하시는대로 이루시는 능력, 당신의 ‘의지’를 곧 ‘현실’로 만드시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지하여 기도를 하려면 그분의 ‘뜻’과 ‘의지’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예수님께 청하기 전에, 먼저 그분께서 ‘하고자 하시는지’, 즉 자신이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뜻과 의지가 있는지를 물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의 ‘바람’은 주님의 ‘뜻’에 맞닿아 있었고, 그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나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달라서 그런건지,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자 자기도 모르는 새 ‘영적 교만’에 빠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립니다. 물론 나쁜 의도로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그게 예수님께도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결과 그분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나병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내가 바라는 것을 청하기 전에, 나의 바람이 그분의 ‘의지’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 딴에는 그게 옳다고,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청하는 것이라도 그것을 주님의 뜻보다 앞세우면 오히려 나를 위해 준비하신 그분의 계획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겸손과 순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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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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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죄인이기에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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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의 동료로 삽시다>
-우정의 일치-
작금의 시대에 온전한 정신, 온전한 상식으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똑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도저히 화합이나, 융합이 불가능한 양극단의 견해들입니다. 올바른 역사의식, 올바른 시대정신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봅니다. 다시 치열한 공부가, 올바른 공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뜨거운 가슴과 더불어 냉철한 머리도 필수입니다. 요즘 계속 떠나지 않는 말마디는 “애덕의 최고 형태는 정치이다”라는 교황님 말씀입니다. 정말 정치가들이 마음 깊이 담아둬야할 말마디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우리보다 제3자의 객관적 견해를 들어봄이 유익하겠습니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어제 1월14일 윤석열 대통령이 공수처가 법원으로부터 받은 적법한 체포영장에 의해 체포된 것이 대해, “우리는 법치주의에 대한 공동의 약속을 재확인하며, 대한민국과 국민이 헌법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에 감사드린다.”고 밝혔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은 전합니다.
몸과 맘은 함께 갑니다. 몸을 잘 보살피는 것이, 몸과 맘을 따뜻이, 부드러이 함이 영적삶의 기초에 속합니다. 요즘 독감 감기가 심각합니다. “과로하지 마라, 체온조절을 잘하라, 찬음식이나 음료를 먹지마라, 코가 아닌 입으로 숨쉬라”는 한의사가 권하는 구체적 처방도 마음에 담습니다. 오늘도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나만의 질문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세상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어른이 된다.”<다산>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꾸준하게 지속해 나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면 세상 또한 인(仁)을 회복한다.”<논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연상됩니다. 나로부터 시작함이 기본이며 미사와 더불어 시작되는 참회의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 옵니다.”라는 자책(自責)이, 상식의 회복이 절실한 시대(時代)요 시점(時點)입니다. 중요한 말마디에는 한자나 영어를 병기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을 묵상하던중 제1독서 히브리서중 다음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고 강론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칭호가 그리스도의 동료입니다. 동료란 말마디를 바꾸어 그리스도의 연인, 그리스도의 협조자, 그리스도의 도반, 그리스도의 벗, 그리스도의 길동무 등 다양한 말마디로 바꿔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니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온전한 삶의 예수님파로 살기 위해, 평생동료이자 평생 도반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로 평생 주님이자 도반이신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히브리서 저자는 고맙게도 그리스도의 동료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마라. 그러나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했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형제 여러분,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날마다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사는, 때로 양극단의 완고한 굳은 마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처방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우리의 처음 결심을 끝까지 한결같이 굳건히 지키는 일이 필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세 특징을 이어받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화력, 연민, 부드러움”이라는 덕목을 배우는 일이 절실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여기서 나병은 온갖 불치의 피부병은 물론 온갖 병을 통칭합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병마와의 싸움은 필수요 대부분 사람들은 종합병원이 되어 갑니다. 삶의 신비는 죄악의 신비요, 질병들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에 좌절이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는 것입니다.
바로 질병들과 죄악의 신비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만남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치유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변한 나병환자의 기도와 겸손한 믿음의 결정체같은 고백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따뜻한 스킵쉽, 권능의 말씀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은 가시고 온전히 치유회복되니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완고한 마음의 치유도 뒤따랐음이 분명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완고함이란 무지의 병입니다. 완고한 마음에 뒤따르는 육신의 병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게 되며 이래서 매일미사 은총이 그리도 고마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법치주의자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초법적인 분이 아닙니다. 사제를 만나 율법에 따른 회복의 절차를 밟은 후, 공동체로의 복귀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감격하여 주님을 자랑하는 복음 선포자로 돌변하니 이는 치유받은 자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자 응답입니다.
겸손하고 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즉시 자신의 안식처이자 피신처인 외딴곳에 머물러 자신을 추스립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드니 그리스도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생명이자 빛이심을 입증합니다. 사람이 문제라면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자 동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만남이 치유의 구원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우정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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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완고함을 생각하면 꿈쩍도 하지 않음이 즉시 연상됩니다. 물론 아무리 모욕을 주고 공격해도 꿈쩍하지 않음처럼 좋은 뜻의 말이 아닙니다.
나쁜 고집이며 새로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그것이 오늘 서간 말씀과 연결하면 ‘오늘’을 받아들이지 않음입니다. 오늘이 오늘이 아닌 사람에게는 오늘도 어제입니다. 우리는 오늘이 되면 오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되면 오늘을 열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이 됐는데도 오늘에 무관심하고 민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를 고집하는 셈이 되고 화석처럼 과거의 나로 굳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난 연말연시를 저는 동해 바닷가에서 피정하며 보냈습니다. 저는 매일 일출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보러 나가지 않고 길 가거나 일하는 사람들 아무도 해 뜨는 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때 깨달은 것 몇 가지. 해는 뜨는 것을 보지 이미 떠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해는 보려는 사람이 보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보지 않는다. 일출을 못 보던 사람이 보려고 하지 늘 보는 사람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튼 정월 초하루 무안 공항 참사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황인데도 그래도 일출을 봐야겠다고 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실 해는, 새해 첫날의 해나 다른 날의 해나 똑같은 해입니다. 하지만 새해 첫날엔 해맞이를 특별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해가 되고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해의 첫날만 그렇게 특별히 맞이하지 않고, 매일 특별하게 맞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늘 보는 사람을 처음 본 듯이 보고 새해 첫날 해맞이하듯 보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와 하느님 말씀도 오늘 듣게 되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 안 듣고 내일 듣겠다거나 옛날 들은 것을 재탕으로 듣지 않고, 오늘 들으면 그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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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나병 환자의 믿음!>
오늘 복음(마르1,40-45)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이 청원 안에 담겨있는 그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을 두고, '하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나병 환자의 이 고백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들려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됩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기적사화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께로 더 잘 다가가고 향해 있었던 '약한 이들의 마음과 그들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또한 당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과 같은 힘 있는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배척'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믿는 이들의 마음도, 믿음'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마음과 믿음이 참된 것인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서, 예수님의 뜻과 마음을 세상에 전하려고 애쓰고 있는 사제들을 신자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 3,12)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믿음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시험하거나 따지는 믿음이 아니라, 복음에 드러난 '약한 이들의 단순한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히브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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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 42)
고통을
풀어주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참모습에
눈 뜨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선입견을
두지
않으시는
진정한
존중입니다.
참된 존중은
아픔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합니다.
진정한 삶의
길잡이가
되시어
잃었던 생활의
기쁨을 되찾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주는 분과
받는 분
모두가
하나되는
하느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족은 주님께
우리의 아픔을
내려놓습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구원의 모습은
이렇듯이
구체적입니다.
치유를 말하는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치유를 위해
가슴으로
자신을 비우고
진정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로
기도로
함께하시는
생활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못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십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치유의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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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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