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시는 읊는 것이었다. 그만큼 시에 있어서 청각적 기능은 중요하다.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악기 하나를 들고 각 지방을 떠돌며 반주에 맞춰 시를 낭송하거나, 우리 선조들이 정자에 모여 시조를 읊었던 것은 그 청각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청중들에게 감흥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고 종이에 인쇄된 시가 대량 복제되면서 시의 시각적 기능이 더 강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랩을 듣다 보면 잊혀진 시의 청각적 기능이 훌륭히 복원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리 시는 영시처럼 두운이나 각운을 맞추기가 힘들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한 힙합 문화 속에서 우리 언어의 청각적 기능을 극대화 한 노랫말들이 쓰여 지고 있고 그것을 강조한 리듬이 생성되면서 한국적 랩 음악이 관심을 끌고 있다.
랩의 대중화에 공헌한 서태지 이후 한국어로도 훌륭한 리듬을 가진 랩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조PD에 오면, 랩을 통해 현실비판의식이 강화된다. 조피디는 특히 우리말을 교묘하게 충돌시키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끌고 간다. 음운의 유사가 어느덧 의미의 유사로 넘어가고 반대로 의미의 유사가 음운의 유사로 건너뛰기도 한다. 반복과 리듬의 강약을 통해 주술적으로 그것들이 가진 효과를 서로 부딪치게 하며,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한 갈래로 모이기도 하고 모였다 생각되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영시에는 두운 각운 등 다양한 리듬과 소네트같은 형식이 존재한다. 우리 시에도 일정한 리듬이 정해진 시조가 있고 내재율이 존재하지만 형식적 리듬은 비교적 단순하다. 대부분의 문장은 -다 아니면 명사형으로 끝난다. 그런데 조PD, 주석, 드렁큰 타이거 등의 랩 뮤직은 가볍게 언어의 뜀뜰을 타고 종횡무진 우리말을 가지고 논다. 그것은 난삽하지 않고 나름대로 언어적 법칙을 따르고 있다. 상징의 힘이나 대상과의 탄력적 거리두기 같은 미학적 성취는 부족하지만, 삶의 문제점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지적한다. 상업적 시스템 아래서 미디어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예술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절묘한 음운(주로 각운이지만)을 맞추면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파상적으로 주제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그 방법은 공격적이며 그 의도는 위선적 체제의 드러냄에 있다
랩은 힙합문화의 중요한 요소다. 보통 힙합의 4대 구성 요소로 랩, 디제잉, 그래피티, 브레이크 댄스를 든다. 테크노 레이브 파티와 함께 디제잉이, 신세대 문화의 등장과 함께 상징적인 이미지로 그래피티가 소개되었고, 브레이크 댄스는 최근 세계적인 랩 배틀에서 우승하는 한국의 B-BOY 그룹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붐을 일으키고 있다. 버림받은 흑인들의 저항정신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랩 음악은, 흑인들의 랩을 흉내내는 무늬만 랩이 아니라 한국적 사회상황에 맞는 비판과 저항정신을 담은 노랫말도 등장하면서 [거리의 시인들][MC 스나이퍼][주석][드렁큰 타이거] 등 많은 고수를 생산해냈다.
[L.A 컨피던셜]로 전미비평가협회, 아카데미 감독상 등을 받은 커티스 핸슨 감독의 [8마일]은 랩이 단순히 말장난만 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뿌리 깊은 현실 부정의식을 바탕으로 생성된 것인지, 그 바탕에는 언어의 황홀한 시정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흑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랩을 백인 래퍼 에니멈이 주인공을 맡아 열연하면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빈민들의 애환을 솔직하게 노래하며 랩 향수층을 인종을 초월하여 세대를 초월하여 확산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도시인 공업도시 디트로이트를 무대로 촬영된 [8마일]은 경기침체 그리고 미국산 자동차의 인기하락과 함께 노숙자와 실업자들의 도시로 변모해간다. 하층민들은 트레일러에서 살고, 8마일 로드 저쪽에는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다. 영화는 빈민들집단 거주 지역에 살고 있는 백인 청년 조지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지는 애인과 헤어지고 어머니 스테파니(킴 베이싱어 분) 집에 얹혀살고 있다. 낮에는 자동차 철판을 생산하는 청강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래퍼들이 모여 랩 베틀을 하는 힙합 클럽에 나간다.
그러나 주변 친구들에게는 뛰어난 래퍼로 인정받고 있지만 랩 베틀에 나가서는 자신을 쏘아보는 수많은 흑인들의 눈동자를 바라바도가 아무 말도 못하고 무대를 내려온다. 백인들이 주류인 미국 사회지만 랩 베틀에서는 백인인 조지가 언더그라운드이며 비주류이고 소수자이다. 이것은 실제 주인공을 맡은 에미넴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백인인 마크 레빈 감독의 [슬램]이라는 영화에도 래퍼들의 삶과 노래가 치열하게 등장했었다. 98년 선댄스 영화제 대상, 칸느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을 받은 이 작품은 워싱턴 DC 뒷골목에서 마약을 팔고 있는 흑인 래퍼 레이몬드 조슈아(사울 윌리암스 분)가 감옥에 갔다가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로렌을 만나 사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폭발하듯 분출하는 조슈아의 분노는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되어 랩 리듬을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시정신의 예술적 표현에서는 [슬램]보다 뒤지지만 스타 래퍼 에미넴의 등장으로 대중성을 강화한 [8마일]의 조지는 실제로 디트로이트 하층민 출신인 에미넴의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그는 새로 사귄 애인 알렉스(브리트니 머피 분)도 상층부로 도약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와 섹스하는 것을 목격한다.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은 더럽게 재수 없는 인생이고 막간 인생이다. 그는 자신의 비참함, 삶의 근원적 소외를 힘찬 분노와 함께 랩 음악에 담아 표현한다. 주제곡인 [Loose yourself]의 감동은 거기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