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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덤 앤 더머’는 자신들의 폭탄을 되돌려받게 되었는가?”
작년에 어색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지젝의『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를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이 책의 제 3장,「9.11이후의 행복」이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었다.
1994년 쿠바로부터 미국으로 새로운 이민물결이 있음직할 때, 피델 카스트로는 만일 미국이 쿠바인들의 이주에 대한 선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쿠바가 더 이상 그들의 그 일을 막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이틀 뒤에 쿠바 당국은 그렇게 해서 원치 않는 수천 명의 신래자들로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고...(119쪽)
위 구절의 앞 뒤로 이어지는 지젝의 삼단논법적 요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척) 하는 위선이 있다. 만일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외관으로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획득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보통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부터 위선적이다.
지젝은 이 구절을 통상적인 좌파들이 가진 '급진적인' 논리의 이면의 욕망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즉 그러한 좌파의 떠들썩한 급진성은 실제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한 은밀한 믿음 아래에서 진행된다.1)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제국』(이 책의 전반에 흐르는 문학적이면서도 낭만적 탈주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어서 '미국인' 저자, 듀크 대학의 '영문과' 교수인 마이클 하트의 공헌은 매우 지대하다)의 좌파적 주장의 핵심, 즉 '탈영토화된' '매끄러운 공간'이라는 글로벌한 세계에서 전 세계의 이주민들에게 동등한 이민과 고용, 국경을 개방시킬 것에 대한 좌파적 요구는, 지젝에 따르면, 실제로는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 따르는 엄청난 부산물(잔여, remainder), 가령 인종차별주의의 횡횡과 같은 이주민들에 대한 자국인들의 폭동 같은 사태에 대한 두려움 또한 담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좌파들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일이 '진정으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한편 위 인용문의 핵심은 미국이 겉으로만 원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실재로는) 원하지 않은 바는 쿠바의 이주민들이 자국에 들어와서 실제로(실재로!) 섞여 살게 되는 것이다(똑같은 논리로 말하면, 미국은 현재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약속하면서 약 3천명의 탈북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쿠바의 카스트로와 같은 지혜가 있어서 카스트로 식으로 행동한다면 미국은 어찌될 것인가? 그것은 남한의 극우적 정치 논리가 보여주는 교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옛 김대중 정권이나 현재의 정권에서 대북 지원은 북한의 군부를 돕는 것이지 인민을 돕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북한의 인민들이 직접 받을 수 있도록 커다란 풍선이나 기구로 구호물자를 보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저질 코메디를 보라. 결국 그 제안은 풍선이나 기구로 구호물자를 지금과 같은 수준에서 보낸다고 한다면,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부대비용이 들 것이라는 또 다른 국회위원의 '진지한(?)' 문제제기로 무산되었다. 한나라당이 줄기차게 제기하는 북한 인민들의 인권은 또 어떠한가? 만일 그 말을 액면그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받아들여 수 천명의 인민들을 갑자기 남한에 보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그러한 계략이 있는지 어떤지는 별도로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위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젝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일종의 라깡적 지혜로, 그것은 행복이라는 정념의 쾌락원칙을 넘어선 충동, 욕망의 모순적 성격을 위태롭게 만드는 충동의 저 구조일 것이다. 이에 대해 라깡은 인간에게는 알려고 하지 않는 열정, '무지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욕망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한편으로 위 인용문은 또 다른 라깡적 지혜의 모토인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논리를 궁극적으로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이 말을 하기 위해 멀리 돌아온 감이 없지 않다)? 미국은 바로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편지(쿠바 이민자들에 대한 선동의 메시지를 담은)의 수신자가 쿠바가 아니라 바로 미국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내가 여기서 예로 들고 싶은 것은 올해 2004년부터 미국이 몇 개의 부유한 서방국가와 일본을 제외하고서는 아랍,동아시아(남한을 포함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국민들이 미국에 입국하는 경우 지문을 날인하고 얼굴 사진을 찍도록 하는 제도에 대해서다. 물론 그 제도는 일차적인 수준에서 테러에 대한 미국의 편집증적 공포가 만들어낸 인종차별주의적 발상이 구체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렇게 말하면서 그것에 반대하기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즉, 이 정도의 반대 수준에서는 미국의 행보를 막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별도의 정치적 행위는 마련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기억이 확실히 나지 않지만, 어떤 미국의 코메디물(<덤 앤 더머(dum&dumer)>가 연상이 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에서 두 순진한 미국의 멍청이들(말 그대로 '덤 앤 더머dum&dumer'다)이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배달될 시한폭탄이 든 소포를 부친다. 그 소포는 정확히 배달되기만 한다면 예정대로 카스트로가 있는 집무실 안에서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소포가 쿠바에 도착하자마자 쿠바의 한 우체국 직원이 그 소포의 우표가 절반밖에 붙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반송한다. 이후의 사태는 명백하다. 카스트로가 폭발로 죽을 것이라는 예상에 잔뜩 흥분이 되어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미국의 멍청이들은 카스트로에게 폭탄이 든 소포가 배달될 바로 그 시간에 정확히 자신들이 보낸 소포를 점잖게 되돌려 받은 것이다.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지젝은「이중의 블랙메일에 대항하여」라는 논문에서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과 세르비아 밀로셰비치의 인종청소라는 딜레마를 다루면서 위 영화를 언급했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는 미국의 지문 날인과 얼굴 사진 촬영에 대해 브라질의 외교부가 동일한 수준에서 미국 입국자들에게만 똑같이 지문 날인과 얼굴 사진을 촬영을 시행하도록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둘러싼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미국 입국시 지문 날인과 얼굴 사진 촬영을 해야 하는 (가령 남한과 같은) 나라들의 국민의 비난 어린 반응이며, 또 다른 것은 브라질에 입국한 미국인 여행객들의 반응(궁극적으로는 미 외교부 당국의 반응)이다. 전자의 반응은 그 자체로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반응처럼, 우리나라 역시 브라질처럼 미국인들의 입국시에 동일한 절차를 통해 미국인들의 지문을 찍고 얼굴 사진을 촬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지난 해 불법체류자로 있다가 쫓겨나간 동남아시아인들과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한국정부는 무자비하게 굴면서 미국이나 캐나다,호주의 불법체류자들에게는 왜 그리도 관대한가라는 질문을 남겼고, 또 다른 네티즌은 미국인들(특히 주한미군)의 범죄율과 오만불손함을 들어서 미국과 똑같은 조치를 우리나라 외교부도 미국인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미국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다수 정치하는 나으리들이나 국민들, 일부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의 반응은 언급하지 않겠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것은 미국인들의 반응이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브라질에 입국해서 지문날인을 마치고 인터뷰를 하는 세 명의 미국인들의 반응을 보았는데, 그 세 개의 반응은 하나의 트라이어드(triad)를 형성할 정도로 매우 전형적이었다. 그 반응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다:
1. 이런 조치는 불편 부당한 것으로 브라질은 당장 지문 날인과 사진 촬영을 그만 두어야 한다(미 행정부와 외교부, 그리고 대다수의 미국인 관광객들).
2. 이런 조치는 당연한 것이다. 미국과 브라질 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도 전부 그렇게 해야 한다.
3. 난 부시 정권에 동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브라질의 이런 조치는 이해할 만한 것이다.
언뜻 보면, 1과 2가 거의 같은 입장으로 묶이고, 3의 입장은 미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예외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시 3의 입장은 미국의 행동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가령 우리나라의 네티즌의) 입장과 거의 동일해 보인다. 하지만 바로 3의 입장에서 가령 한국도 미국인들에게 동일하게 지문 날인과 얼굴 촬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실제로'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떻게 보면 현재 브라질 정부가 그런 입장을 미국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어떤 네티즌들(좌파적 성향을 가진)의 예상처럼 브라질의 '좌파'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룰라가 미국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볼지 어떨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브라질의 행위에 대해 남아메리카의 일인자라고 자부하는 브라질의 위상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브라질 내부에서도 부유한 미국인 관광객들이 브라질에 들어올 경우 얻을 수 있는 상당한 경제적 고려를 생각해서 브라질 당국의 조치에 반발하는 브라질인들도 있다(브라질은 원래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제도와 함께 입국 시에 신분확인 절차가 있는 나라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사건만 말해보면 이렇다. 미국 외교부의 어느 관리가 브라질의 조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특정 외국인들의 입국 심사 절차는 단 2분이면 해결이 된다. 하지만, 브라질은 무려 몇 십 분(기억하기로는 대략 2-30분)이 소요된다. 이러한 낙후된 기술로 입국심사를 하다니! 미국의 간편한 입국심사 절차를 보라! 운운. 여기서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 만일 이러한 낙후된 지문 날인과 사진 촬영의 기술이야말로 브라질이 궁극적으로 미국인들에게 불편함을 되돌려주기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면 어찌할 것인가? 여기서 그 미국인 관리, 불평하는 미국인들을 대표하는 미국(인 관리)은 바로 위에서 예로 든 영화의 두 미국인 바보들('덤 앤 더머dum&dumer')과 정확히 동일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가? 이것이 브라질 '좌파' 대통령 룰라가 의도했던 바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떤지는 모른다. 지젝식 농담으로 말하면, 룰라가 라깡의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라는 테제를 심사숙고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요는 이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둘러싸고 방금 말한 라깡적 테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브라질 당국의 조치에서 칭찬할 만한 것은, 여러 가지 임박한 정치적(미국과의 오래된 정치적 거래 관계), 경제적 손익계산(국가적 파산과 대량실업에 처한 상황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제적 처지)과 어느 정도 상관없이 미국의 부당한 행위를 바로 그 외양의 형식 그 자체로 되돌려주는 행위이다(현재 전통적인 친미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인들에 대한 지문 날인을 거부하여 미국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지문 날인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미국은 자신이 보낸 블랙메일(blackmail, 공갈협박)을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되돌려 받는 처지가 되었다. 미국이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궁극적으로 철회하도록 계속 그렇게 되길!
'덤 앤 더머'식 미국의 지문 날인 조치의 또 다른 어리석음은 분명하다. 미국은 그것을 테러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조치가 미국이 지문 날인과 사진 촬영에 예외를 둔 미국인들과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 일본의 국민들은 아랍인들이나 동남아시아인들, 남아메리카의 국민들보다 덜 위협적이어서 그런 것인가? 가령 탄저균 가스를 살포해서 미국을 공포에 빠뜨린 정체 모를 미국인 테러리스트의 경우는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이 바로 서유럽이나 일본(적군파)과 같은 선진국가에서 나왔던 역사적 선례는 어떻게 할 것인가(오사마 빈 라덴도 부유하고도 가장 서방적이면서 친미적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 아닌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앞에서 미국인들의 전형적인 반응 셋에 대한 평가를 좀더 한 후에 글을 끝내도록 하자. 내 생각으로는 1, 2, 3의 경우에 대해 그 어느 것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1의 경우는 명백하며, 2의 경우, 그 말을 한 미국인은 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미국이 이렇게 하므로 세계도 그래야 한다, 미국에 좋은 것은 세계에도 좋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면, 미국의 지문 날인과 사진 촬영에 반대하는 논리는 2의 '전도된' 형식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만일 당신들이 미국이 궁극적으로 그 조치를 철회하도록 종용하기 위해 일종의 외양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에 따른 상당한 정치적, 경제적 손실을 무릅쓸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미국의 조치에 굴종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될 것이다(세계 전체가 입국 시에 공항에서 지문 날인과 얼굴 촬영을 해야하는 날이 온다고 상상해 보라!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미국의 이번 조치가 어떤 나라에 대해서는 매우 본보기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국민들만 제외하는 방식으로 지문 날인 등을 한다면 말이다. 실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남한은 저 백인들에게만 관대한 인종차별주의적인 나라가 아닌가? 남한은 이미 '잠재적인' 수준에서 미국과 거의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미국과 다르다면 자국인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바로 그 무능력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가장 인정할 만하다고 할 수 있는 3의 입장은 애매하다. 하지만 그것이 브라질의 조치(타자)를 이해할 만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저 다문화주의적 반응으로 나왔다면, 그리 수용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인터뷰를 볼 때도 느꼈지만, 그 젊은 미국인 여행객에게는 일종의 솔직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 이해할 만하다고 하는 반응에는 자신이 입국시에 느꼈던 솔직한 불편함에 대한 표명과 그에 대한 원인의 탐색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 물론 짧은 인터뷰라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편함에 대한 탐색(부시와 미국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대신에 즉각적으로 '여행객' 식의 타자에 대한 이해심을 표명함으로써 사태가 이렇게 된 원인을 결국은 감춰버렸다. 조지 부시와 이에 대항하는 오사마 빈 라덴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위 미국인들의 입장과 그에 대한 여타 세계의 반작용 또한 우리의 선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인들과 조선족을 추방한 바로 그런 방식으로 미국인들과 유럽의 불법체류자를 추방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적'으로는 통쾌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라깡 식으로 말하면, 강도에게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돈과 함께 목숨을 빼앗기는 최악의 결과로 귀착될 것이다.
결국, 해답의 곤궁함 속에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상투적인) 대답은 미국이 현재 취하고 있는 지문 날인이나 얼굴 촬영 조치의 예상하지 않은 '부산물'인 브라질식의 대응을 감당하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지금까지 해 온 조치에 대해 철회해야 한다는 것이며, 세계 각국이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파병 준비하느라고 미국보다 더 분주한 남한의 정부가 브라질 정권과 같은 용기를 배울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1, 2(그 전도된 반항의 형식까지 포함하여), 3의 입장을 모두 거부해야 할 처지에 이르도록 작금의 세계정치적 상황은 강요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만일 브라질식의 대응에서 배울 수 있는 라깡주의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사태의 부산물을 일으키고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주체 당사자에게 바로 그 부산물을 되돌려주고 책임을 인정하게 하는 “행위”의 방식일 것이다. 라깡이 말한 것처럼, 최악의 선택은 강요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자체를 거부하는 비선택이다. 확실히 미국은 현재 자신들이 저지른 저 인종차별적인 조치를 브라질을 통해서 정확히 되돌려 받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미국이 그리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의 부산물, 잉여이다. 정황을 판단컨대, 미국은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점점 더 비선택쪽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신의 행위의 부산물(잔여)에 대해 책임을 질 능력이 있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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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 추가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어제 쿤데라님과의 현해탄 통신 중에 쿤데라님이 들려준 유럽 특히 영미권 지식인들의 저작권에 대한 지나친 옹호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쿤데라님이 들려준, 맑스,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의 새로운 서문에서 지젝이 한 말에 따르면, 유럽이나 미국의 급진 좌파학자들은 급진적인 문화비판을 하면서도 자신의 책에 대한 저작권만큼은 반드시 받아 챙기는 방식을 지나치게 고수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저자와 계약한 영미권의 출판사의 자본주의적 관행이라는 문제가 더 결정적으로 걸려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지적 생산물에 대가를 받는 것에 그리 큰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지젝은 그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철저하게 동화된 부유한 좌파 지식인들의 행태를 꼬집고자 한 것이다. 자본을 비판하면서도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하게 충실하고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저 기만적인 좌파 지식인들을 겨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떤 “행위”를 보여준 사례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로카드님이 기획하고 경영하는 b출판사와 지젝이 자신의 원고출판을 “계약(사실은 계약 아닌 계약)”한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하고 싶다. 내가 로카드님보다 먼저 말하는 것이 정말 양해가 된다면, 여기서 잠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다음달에 출간될『암흑지점』의 저자이자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 철학사가인 미란 보조비치(Miran Božovič)와 로카드님과의 지속적인 메일교환(이 메일 교환의 일부 내용은 b출판사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www.b-book.co.kr)을 통해 로카드님은 원고형태로 된 지젝의 THE IRAQI BORROWED KETTLE를 영미권 출판사와도 계약하기 전에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이 책은 올해 4월 파병시점에 맞춰져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지만, 어제 뉴스를 보니 파병은 6월로 미뤄질 것이라고 들었다). 그 계약에는 보조비치가 기여한 바가 많은데, 특이한 것은 원고를 보내준 다음의 지젝의 (무)반응이었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영미 출판사와의 계약 이전에 한국의 한 출판사와 계약했기 때문에 영미출판사에게 책의 저작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자에게만큼은 원고에 상응하는 대가(저자 인세)를 지불해야 하고 거기에 따른 문제를 상의하는 절차이리라. 로카드님은 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다시 보냈지만, 지젝의 응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 한 마디, “Everything OK!”였다고 한다. 저자에게 줄 인세도 필요없다는 것이다(실제로 지젝은『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의 판권을, 편저인데도 불구하고, 러시아 출판사에 그냥 줘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결국, 지젝의 올해의 신간 THE IRAQI BORROWED KETTLE은 영미권쪽보다 빨리, 더군다나 저자 인세를 지불해야 할 부담없이 b 출판사에서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저작권과 인세에 대한 저 영미 출판사의 관행을 돌파한 지젝의 “행위”라고 볼 수 없을까. 옆에서 지켜본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지젝의 이 “행위”를 수용할 만한 어떠한 상징적 준비도 갖추지 못했다. 여전히, 얼얼하기만 하다.
*출판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 그리고 지젝의 짧은 편지의 일부 내용을 옮겨 적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로카드님께 감사드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