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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고찰 - 설국열차
사회민주주의센터 정치기획 간사 김연호(자유아빠)
한국을 대표하는 세 감독 -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가 올해 모두 해외자본과 결합하여 동시에 작품을 낸다. 박찬욱은 스릴러물인 <스토커>로, 김지운은 놈.놈.놈 스타일의 퓨전 서부영화 <라스트 스탠드>로, 봉준호는 SF 대작인 <설국열차>로 글로벌 영화 시장에 도전장을 낸다. 이중 유독 필자의 관심을 끈 작품이 바로 설국열차다. 봉준호라는 최고의 디테일 스타일러와 다시금 지구에 닥친 빙하기 속을 달리는 설국열차라는 설정은 한국 영화계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당분간 깨지지 않은 열차 영화가 하나 나오겠구나 하는 기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제작비가 450억원이나 투입이 됐다고 한다. 아직 개봉도 안한 영화에 대해 원고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설국열차가 가진 메타포만으로 영화의 스토리와 장면이 눈에 그려질 정도로 설정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중요성과 관람 포인트를 꼭 알려 주고 싶었다. 실제 봉준호 감독도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설정을 제외한 인물이나 스토리 모두를 새롭게 썼다고 한다.
자, 일단 이 영화는 장 마르크 로셰트의 프랑스 만화가 원작으로 인터넷에서 찾아본 책 소개가 이러하다. “동서 양 진영의 갈등 끝에 기후 무기가 개발되고, 이로 인해 지구는 눈으로 뒤덮인 설국으로 변해버린다. 빙하시대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열차에 타는 것. 이리하여 지구 위엔 두 개의 설국열차가 충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달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들 사이에 만연한 거짓을 온몸으로 거부하지만, 이로 인해 애인도 잃고 처참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멸망의 배에 오르고서도 공동의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자기 앞만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에 대한 작가의 통렬한 비판의식이 빛나는 프랑스 만화”
이런 불성실한 요약만으로는 도저히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아예 원작을 구해 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2004년에 현실문화사에서 나온 책인데 절판이 됐다고 나온다. 마니아들이 스캔하여 올려놓은 해적판을 어둠의 경로를 통해 찾아보니 오! 있다 있어! 기쁜 마음에 다운을 받아 압축을 풀어보니 도저히 글자를 알아보니 못할 정도로 해상도가 낮다.
<원작 만화의 스캔 해적판, 해상도가 너무 낮아 도저히 읽을 수 없다>
가독성이 없으면 해독을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상상력과 유추를 해가며 파악해 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20세기 후반, 아직 끝나지 않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7월의 어느 날 동서 양측의 기후 무기 개발이 발표 되던 날 전 세계는 예고없이 찾아온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온통 얼음과 눈보라에 휩싸인다. 마침 역을 출발하려는 호화유람 열차에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영하 87도에 살아남기 위해 열차는 끝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열차는 일종의 영구기관을 통해 움직인다. 이 성스러운 에너지를 통해 사람들은 1001량이나 되는 열차 속에서 야채와 토끼 등의 식량을 키우지만 풍족한 양식과 물자는 ‘황금 칸’이라 불리는 앞쪽 칸 권력자들의 몫이며, 어느 정도의 식량이 배급되는 중간칸에는 보통의 시민들이 타고 있고, ‘꼬리칸’이라 불리는 곳은 식량도 배급되지 않아 시체를 뜯어 먹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꼬리칸과 황금칸의 비교그림, 제작사의 프리프로덕션 컨셉 스케치 중에서>
꼬리칸에서 유리창을 깨고 중간칸으로 탈출한 주인공 ‘프롤로프’는 경비병에게 붙잡혀 취조를 당하던중 꼬리칸 사람들의 실상을 중간칸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아돌린’이라는 제3열차 원조기구(시민운동) 여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아돌린의 계획을 알게 된 경비병들은 황금칸으로 두 사람을 압송하게 된다. 열차는 영구기관에 의해 움직이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속력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황금칸 사람들은 열차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꼬리칸을 떼어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열차의 지배자인 황금칸 사람들은 프롤로프에게 꼬리칸 사람들을 꼬리칸 앞쪽 몇 개의 차량에 이주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프롤로프는 그 계획이 꼬리칸 사람들과 이의 실상을 알리려는 아돌린 같은 제3열차 원조기구 활동가들을 이주시켜 한꺼번에 열차에서 떼어내려는 음모임을 한 양심적인 지식인에 의해 알게 된다. 프롤로프와 아돌린은 무기를 구해 황금칸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을 따돌리며 계속 앞쪽 칸으로 나아가다 결국 추격해오는 경비병들이 못 쫒아 오도록 열차의 유리창을 깨뜨려 방어하지만 영하 87도의 추위가 엄습하자 아돌린은 죽고 만다. 죽어가던 프로로프를 구해 낸 것은 열차의 기관인 맨 앞 칸에 혼자 살고 있는 한 노인이다. 그는 원래 꼬리칸 사람이었으나 열차의 기관전문가가 혼자인지라 정기적으로 맨 앞 칸에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기관을 살펴보러 왔다가 경비들을 따돌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살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열차의 기관이 사람의 온정으로 돌봐야한다며 자기 대신 열차 기관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어간다. 노인이 죽은 후 프롤로프는 기관을 점검해보지만 점점 기계는 문제가 생겨가고 절망하는 가운데 열차와 함께 죽음으로 향해간다.
이것이 총 3권으로 된 설국열차의 1권의 줄거리이다. 2,3권은 묶여 나왔는데 제 1 설국열차보다 더 호화로운 제 2설국열차에 탄 황금칸의 지배자들이 동일 궤도상의 제 1설국열차와 부딛힌다는 가정하에 사람들을 호도하면서 꼬리칸과 중간칸 사람들을 돌아오기 힘든 선발대로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끝내 살아온 ‘뮈이그’가 영웅이 되어 기존의 권력체계를 뿌리 뽑고 의원이 되어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가 된 후 북쪽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새로운 문명의 증거임을 역설하며 사람들을 설득하여 온갖 어려움을 뚫고 그곳에 당도하지만 그곳에는 기계에 의해 반복재생 되는 카세트만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다 알려주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보냐고 하시겠지만 걱정 안하셔도 된다. 앞서 말했지만 봉준호는 이러한 줄거리에서 빙하기로 변해버린 설국을 달리는 열차란 점과 황금칸과 꼬리칸의 대립구조 외에는 인물이나 스토리 라인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자 그럼 이제 이 영화의 관람 포인트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포인트는 봉준호의 스토리 구성 능력이다. 내가 봉준호를 한국 최고로 꼽는 이유는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주듯 화성 연쇄살인이라는 모티브에서 뽑아 엮어낸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과 ‘저런 것 자질구레한 것 하나 놓치지 않았네’라며 감탄할 수 밖에 없는 디테일한 상황묘사 능력 때문이다. 소설가든, 희곡작가든, 영화감독이든 우선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봐야 한다. 봉준호는 한국영화 감독군에서 가장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한강에 혹시 돌연변이 괴물이 있지 않을까라는 어릴적 상상력은 기어코 100억 원을 들여 한강에 괴물을 출현시켜 천만 관객을 돌파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초기작인 플란더스의 개는 시나리오 지망생들에게 고전으로 꼽힌다. 그가 이번에 건드린 설정은 폐쇄공간이다. 폐쇄공간은 영화의 설정상 백미에 꼽힌다. 불난 빌딩에 갇힌 사람들을 다룬 ‘타워링’이라든가, 절도의 유배지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범죄자의 탈출을 그린 ‘빠삐용’, 비행기 추락으로 극한지역에 고립된 사람들의 생존기 ‘얼라이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인질들을 빌딩 안에서 구출해야 하는 ‘다이하드’, 높으신 양반들과 범죄자들이 무인도에 고립된 계급역설을 다룬 ‘30일간의 야유회’, 곧 가라앉을 호화유람선 안에서의 인간군상을 그린 ‘타이타닉’ 등 수 많은 명작들이 바로 이러한 고립된 폐쇄공간을 다룬 영화에서 나왔다. 나는 봉준호의 이야기 능력이 폐쇄공간이라는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설정을 만나 가장 화려하게 빛날거라고 확신한다.
둘째 포인트는 박찬욱 감독과의 연출력 비교이다. 박찬욱 역시 올드보이를 통해 만화를 원작으로한 뛰어난 스토리 재구성 능력과 연출력을 보여 주었지만 나는 봉준호를 1등, 박찬욱을 2등으로 친다(비교하자니 그렇지 둘 다 엄청나게 좋아하는 감독들이다) 연출에 있어 박찬욱은 만화같은 장면설정을 좋아한다. 올드보이에서 입을 떡벌린 오대수의 얼굴 다음에 조폭들에 의해 발가 벗긴채 묶여 있는 미도를 정지화면(스틸컷)처럼 보여준다든가, 친절한 금자씨에서 미국에 딸 찾으러간 금자가 놀란 얼굴 다음에 목에 칼을 대고 자살을 하려는 딸과 놀란 양부모의 장면이 정지화면으로 나온다든지 하는 설정을 좋아한다. 물론 올드보이에서 장도리 액션은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롱테이크(화면의 끊김이나 편집없이 계속 이어지는 씬) 장면 중에 하나다. 그는 이러한 만화적인 설정과 영화적인 편집기법을 하나의 영화에서 마음대로 농락할 정도로 영화적 문법 구사능력이 탁월하다. 이에 비해 봉준호는 연극적인 장면설정의 디테일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백강호를 지하실에서 취조하는 장면이나 백강호의 아버지가 하는 술집에서 부하 형사와의 대화씬, 술집에서의 싸움씬은 앞 뒤 장면없이 그 하나의 씬만으로도 완벽하다. 이는 봉준호가 ‘봉테일’로 불리우는 가장 큰 이유다. 씬을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씬 하나가 독립된 작품이며 이 독립된 블록 120개가 모여 작품을 이루지만 이음매 하나 없이 매끈하다.
셋째 포인트는 ‘때깔’이다. 소위 영화판에서 ‘때깔’은 전체적인 완성도나 스타일을 두고 이야기하는 때도 있지만 그야말로 화면의 리얼리티를 얼마나 사실감 있게 구현하느냐하는 거다. 이는 현장 미술팀이 처리하는 수도 있고 요즘엔 후속작업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하는 수도 있지만 정말 좋은 때깔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결합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둘 중에 현장 미술팀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현장의 미술팀이 내는 때깔이란 결국 세트와 분장을 비롯한 특수효과와 의상으로 내는 효과인데 이게 다 엄청난 돈이다. 이미 공개된 스틸컷을 보아하니 정말 제대로 때깔이 나왔다는 느낌이 팍팍든다. 다음 사진을 보시라.
거지를 거지답게, 오래된 공간을 오래된 공간답게, 쭈그렁 노인을 쭈그렁 노인답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는데 얼마나 중요하던가? 봉준호 감독은 4000만 달러를 쓰고도 1000만 달러만 더 있었으면 정말 제대로 때깔을 만들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번에 공개된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을 보면 얼마나 봉준호가 욕심덩어리 인간인가 알 수 있다. 그마하면 됐다 고마해라.
마지막 포인트는 연기력 대결이다. 위 사진속에서 검정빵모자 쓴 핸섬한 찬구가 바로 ‘크리스 에반스’라고 영화 ‘어벤저스’에서 ‘캡틴 아메리카’역을 맡은 친구다. 어벤저스는 아이언맨, 헐크, 토르 등 슈퍼히어로가 잔뜩 나오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SF영화다. 유치하다고? 속는 셈치고 미국의 슈퍼히어로들이 잔뜩 나오는 영화들인 ‘왓치맨’이나 ‘어벤저스’를 봐라. 절대로 유치하지 않다. 스토리의 탄탄함과 표현의 사실성과 철학적 깊이에 놀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들의 고객은 10대, 20대도 있겠지만 애초에 주타겟을 이런 슈퍼히어로들을 만화로 보고 자란 40~50대 심지어 60대까지 타겟고객으로 기획한 영화라서 수준이 매우 높다. 근육이 워낙에 좋은 친구라서 SF영화의 슈퍼히어로로 불려 다니지만 ‘셀룰러’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여주인공 킴베신저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던 젊은 친구하면 머리가 번쩍 깰거다. 옥타비아 스펜서의 연기도 주목할만 하다. '타임 투 킬', '헬프' 등으로 국내에서도 친숙한 옥타비아 스펜서는 데뷔 이래 TV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를 두루 소화했다. 그 결과 2009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선정 ‘할리우드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배우 25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엘리펀트 맨’,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등에 출연한 영국배우 존 허트, ‘어댑테이션’, ‘나니아 연대기’의 틸다 스윈튼 등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한다. 한국 배우로서는 송강호와 조아성(영화 ‘괴물’에서 중학생 딸네미 역했던 애)이 출연하는데 송강호의 배역 비중은 크리스 에반스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설국열차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고 봉준호라는 최고의 감독, 탄탄한 원작, 450억의 제작비, 초호화 캐스팅으로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기대치를 가진 작품이다. 능력있는 선거참모는 후보군만보고도 당락을 점칠 수 있고, 능력있는 의사는 환자의 얼굴만보고도 병세를 진단할 수 있다. 능력있는 영화 매니아는 감독과 원작과 배우의 조합만 보면 영화의 작품성과 흥행의 진단이 가능한 법이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 피카데리 극장에서 중 1때 007 옥터퍼시를 본 것을 시작으로 영화 마니아가 된지 어언 30년. 제작단계부터 기대를 하면 실망인 영화가 대부분이었으나 영화잡지의 제작노트를 통해 본 기대를 반드시 저버리지 않았던 영화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태백산맥, 장군의 아들 1편, 인디아나 존스, 지옥의 묵시록, 에이리언2, 터미네이터2, 퐁네프의 연인들, 타이타닉,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즈의 복수, 글라디에이터, 올드보이, 추격자, 배트맨 다크나이트 - 등이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가 그 다음을 이을 것이다. 게다가 감독 스스로도 이번에 세운 기록을 다시 뛰어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한국 영화계 역시 10여 년간은 넘기 쉽지 않은 대기록이 이번에 세워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설국열차 보고와서......
1. 감독은 열차와 그 안의 계급사회를 통해 노골적으로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제스쳐를 보인다. 2. 열차의 밖은 죽음의 세계이고 열차는 사람들을 살게해주는 수단이자 구속하는 감옥이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주변의 사회, 조직, 국가등의 체제를 보여준다. 3. 열차안의 다양한 사람들은 그 열차라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윌포드 - 조직의 가장 우두머리에서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것을 숫자와 통계로 판단하며 꼬리칸의 사람들이나 아이들의 고통은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메이슨 - 최고 지도자 아래의 아첨꾼. 기회에 따라서 자신을 위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 바이올린 연주자 - 가장 아래서 위로 수직 상승해 올라간 사람으로 과거를 잊고 자신과 단절시킨다. 단백질바 만드는 사람 -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조직 속에서 그것을 정당화 하고 살아가는 사람. 커티스 - 커티스는 주관적 해석일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자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과거에 인육을 먹기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끝내 자신의 팔은 자르지 못하는, 하지만 살기위해 어쩔 수 없었던 날들을 딛고 언젠가는 끝까지 올라가보는... 4.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티스, 길버트, 남궁민수의 관점이다. 모두 조직혹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다. 커티스는 그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한다. 하지만 길버드는 그 다음을 생각한다. 길버트가 꼭 끝까지 가야겠냐고 한것도, 나중에 윌포드를 만나면 그의 이야기를 듣지 말고 죽이라고 한것도 결국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고 죽일 기회를 잡는다고 해도 윌포드를 만나고 그의 관점에 동조를 하게되는 순간 커티스는 또다른 윌포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것이 길버트의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 민수의 생각은 열차의 바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좀더 지난 사회를 돌아보고 알기쉽게 생각하면 조선시대 왕정에서 커티스는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면 된다는 것이고 길버트는 그렇게 왕을 죽이고 커티스가 왕이 되면 역시 그 왕정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고 왕만 바뀌었을 뿐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수는 왕정이 아닌 다른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폐쇄적인 생태계(국가, 회사, 사회)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열차(자본주의)를 형성하고 아직도 세계적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은 형성되어 있으며 아래는 착취당하고 위는 그것을 통해 호의호식한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불만을 갖고 커티스처럼 나도 언젠가 한번 위에 있는 착취하는 자들을 소탕하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위에 올라간다면 거기서 보이는 자본의 매커니즘(엔진)에 수긍하게 되고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이 사회가 지속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또 다른 윌포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길버트는 이렇게 우두머리만 바뀌는 사회가 얼마나 달라지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 사회의 아주 일부분만이 민수처럼 그 넘어의 세상을 관찰하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열심히 보고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이판이 아닌 다른판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두 아이가 살아나가는 것은 허무한 결말도 아니고 새로 시작된 고난도 아니고 바로 우리가 보지못한 바깥세계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많은 것은 필요없다. 무언가가 살 수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곰), 그리고 인류가 지속가능한 남녀한쌍 그 외의 담론들 조직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아이들 사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법을 배운다. 사회의 시스템은 자신을 자연스럽게 정당화시키고 그 사회에 반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역적이나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렇게 학습된 아이는 자발적으로 조직에 복종하며 꼬리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아이들이 답답해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 역시 그 아이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각자 자리는 정해져있다. 과거 사회는 확실한 계급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급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본에 따라 분명이 계급이 나뉘지만 단지 과거보다 조금 더 자유가 주어졌다는 이유로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는 가난한 사람의 자식은 부모가 무능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계급적 마인드가 깔려있다. 잘 생각해보자. 왜 재벌집 아들은 우리가 평생 노예처럼 일해도 벌 수 없는 경제력을 가지고 살아도 당연한 것인가? 그 돈 때문에 우리는 어렸을 때는 공부로, 중장년까지는 돈버는 기계로 살면서 말이다. 과거 유교에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는 논리정치는 정치인들이 할테니 연예인은 연예인답게 정치에 대해 말하지 말고 딴따라나 하라는 것 노동자는 돈 받은만큼 일하며 다른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 조직의 잔혹성 윌포드의 완벽한 기계구조안에는 놀랍게도 기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부품의 일부로 사용된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이 저렴한 아동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자본의 논리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슬프지만 그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에만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다.
설국열차, 그 안에 담겨있는 상징과 의미들봉준호의 새 영화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켜 온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에 대한 기대감은 사실 <설국열차>가 일종의 글로벌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생기는 것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 영화가 '봉준호'감독의 것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설국열차>를 보고 나오면서, 간만에 지적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안에 새겨진 수많은 비유와 은유와 상징들이 '봉준호'감독의 훌륭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다. 어째서 배우들이 그를 극찬할 수 밖에 없는지, 왜 해외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훌륭한지가 모두 이해 됐다. 그리고 결국 영화를 한번 더 보러 다녀왔다. 한번으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는 영화였고,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다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부족하긴 하다. 앞으로 몇번 더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빨리 나누고 싶어 급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봉준호 감독이 밝힌 것처럼 단순하다. '열차 안에서 살 것인가? 아님 나갈 것인가?'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는 그가 녹여낸 다양한 비유와 상징들로 인하여 정말 세밀한 이야기로 거듭나게 된다. 그 세세한 것들을 보자면 마치 방망이 깍는 노인이 생각날 정도이다. 과연 그가 <설국열차>안에서 녹여낸 이야기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 기차칸의 의미 기차칸은 이미 많은 분들이 말한 것처럼 인류의 발전사를 담고 있다. 식인이 이뤄졌던 꼬리칸은 원시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 이후 그들이 집어 먹게 되는 '단백질바'는 채집을 나타낸다. 이 채집의 공간에서 나아가 이들은 '수렵'을 시작한다. 이 '수렵', 쉽게 말해서 사냥이 이뤄지는 칸은 바로 얼굴을 가리고 도끼를 든 진압군과의 결투로서 표현된다. 여기에서 진압군은 '포식자'를 의미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끼에 물고기의 피를 묻히는 데, 그것은 물고기를 잡아 먹는 포식자를 그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 또한 인간의 모습을 최대한 감춘 봉준호의 연출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다리를 건너고 어둠이 찾아오자 진압군은 적외선 안경을 써서 인간을 진압하는데 이 또한 야간에 시야를 식별할 수 있는 동물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이 전투 장면을 보면 싸움의 방식이 굉장히 원시적임을 알 수 있다. 멋있게 표현하기 보다는 야만적인 표현들(도끼로 계속 내려 찍는)이 계속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싸움에서 '불'을 통해 승리를 거둔다. 식인에서 채집, 그리고 수렵까지 발전한 인간은 물을 획득하고 농경사회까지 진보하게 된다. 농경사회가 지나고 나면 이제 교육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문명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교육이 지나고 나면 의식주의 발전 혹은 개량이 그려진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치과 치료, 옷을 맞추는 모습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이 지나고 나면 이제 카페칸이다. 이들은 여유를 즐기기 시작하고, 여유는 곧 '패션'의 발전을 이룬다. 유흥과 향략의 기초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칸에 있는 이들을 살펴보면 독특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과 멋진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미용실'을 배치하는 것으로 더욱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그 이후에는 '사우나'와 '스파'가 보이고 끝에는 클럽을 통해 완전한 '향락'이 그려진다. 즉, 기차칸은 인간의 역사를 함축해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식주의 확보에서 의식주의 발달, 그리고 유흥과 레저의 발전을 지나 유흥과 향락까지 이어진다. 이 인간사에 대한 통찰을 통해 감독은 <설국열차>를 정확하게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일체화 시킨다. 기차는 곧 인류이다.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이 기차가 곧 '인류'라고 말한다. 기차칸은 '인류'의 모습을 그 역사와 발달사를 통해 표현해 낸 매개체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각 기차칸들은 인류의 발달사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기차로 묶여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칸들이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도 함께 갖게 된다. 즉, 인간의 발달사는 지금 이 시대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여전히 꼬리칸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뉴욕에 가면 여전히 유흥칸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기차칸의 순서대로 걸어왔지만 동시에 기차칸들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 준다. - 기차의 의미 그래서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차칸의 의미보다는 기차의 의미이다. 기차칸은 한 부분이라면 그 기차칸들이 모여서 이룬 세계가 바로 기차이며, 봉준호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기차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단순하다. '순환'이다.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것이 <설국열차>가 지니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 '순환'의 이미지 역시 영화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 된다. 기차는 1년마다 세계를 한바퀴씩 돈다. 그래서 매번 똑같은 지점에서 1년이 지나간다. 인간과 포식자의 싸움 중간에 갑자기 '카운팅'이 들어가고 '해피 뉴이어'를 외치는 장면은 어떤 이질적인 재미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기차가 철저하게 순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화없이 1년에 한바퀴를 도는 열차가 바로 <설국열차>이며, 이 열차가 가진 순환의 이미지는 영화 안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순환의 이미지는 다시 '대칭'을 통해 더욱 부각되기 시작한다. 꼬리칸의 길리엄과 엔진칸의 윌포드가 대비되고, 그들의 심복도 대비된다. 길리엄은 '그레이'라는 인물을 윌포드는 노란색복장의 여자를 보유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물'과 '향락'을 위한 물도 대비된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물로 몸을 씻고 자신의 부상정도를 파악하지만, 앞칸의 사람들은 물로 사우나를 즐기고 스파를 즐긴다. 또한 꼬리칸의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단백질바'를 먹고, 맨 앞칸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산업폐기물'인 '크로놀'을 즐긴다. 둘다 쓰레기를 먹는 것은 똑같다. 이런 대비는 결국 '꼬리칸'이나 '앞칸'이나 다를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즉, 순환되는 세상 속에서는 뒤가 곧 앞이고, 앞이 곧 뒤인 세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꼬리칸에서 단백질바를 먹기 싫어했던 사람들은 혁명을 성공시키고 나서는 그들이 그렇게 하찮게 여기는 환각제이자 산업폐기물인 크로놀을 즐길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윌포드가 엔진을 커티스에게 넘기려 하자, 즉, 앞칸의 향락이 혁명에 의해 깨질 것으로 보이자, 앞칸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한다. 이는 꼬리칸이 봉기한 것과 또 다시 대조를 이룬다. 이를 통해 '순환'의 그림은 더욱 공고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라고 윌포드는 커티스에게 말한다. 특히 이를 더욱 확실하게 명시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스시'를 먹는 장면이다. '커티스'는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꿈꾼다. 하지만 스시를 먹는 곳에서 그는 메이슨에게 '단백질바'를 던져준다. 이 장면은 이미 '혁명이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혁명이 성공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커티스의 혁명이 성공해도 꼬리칸과 앞칸의 사람들만 바뀔 뿐이지 열차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장면 이후에도 순환을 보여주는 장면은 계속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기차가 곡선 레일을 따라 회전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기차가 회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순환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 장면에서 커티스와 형 프랑코가 서로 총을 겨눈다. 원래 앞칸에 있던 프랑코는 뒤칸에, 뒤칸에 있었던 커티스는 앞칸에 위치하고 있다. 혁명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위치가 바뀐 것이고 이는 또 다른 혁명을 예고한다. 이때 총알이 박히는 위치까지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것을 발견했다면 이 영화의 세밀한 연출에 입을 다물기 힘들 것이다. 월포드는 자신과 동급인 길리엄을 죽여서 커티스를 자신과 동급으로 만들고, 커티스는 길리엄과 동급이 된 메이슨을 죽인다. 심지어는 엔진마저도 원형으로 돌고 있다. 영화는 정말 노골적으로 끊임없이 이 세계는 '순환'과 '반복'된다고 거의 세뇌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거다. '나가자' <설국열차>안의 순환과 반복과 대칭은 결국, 기차라는 시스템 안에서 혁명은 위치의 전환만 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위치의 전환은 곧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외친다. 결국 기차 안에서 진정한 혁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계속 순환하고 반복될 뿐이니 결론적으로 이 기차를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국열차>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 윌포드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윌포드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당연히 '포드'가 떠올랐다. 경영학적으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자동차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생산성의 극대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일만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설국열차>가 지니고 있는 시스템의 근본으로 치환된다.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일만 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성증가는 <설국열차>에서 너무나 중요한 테마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단백질바'를 만드는 '폴'은 앞으로 간다는 커티스의 말에 이곳이 자신의 공간이라고 말을 하며, 자신이 맡은 일만을 하려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산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의 상징 또한 영화 곳곳에서 계속 나타난다. 메이슨이 사용하는 요크셔지방 억양은 요크셔가 과거 공업지대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나타내는 요소이고, 메이슨과 함께 다니는 인물이 '일본인'이라는 점도 백인과 일본이라는 경제 대국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메이슨, 윌포드, 타미가 하는 기계적인 손동작은 이들이 모두 이 열차 안에서 하나의 구성품화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 모두 자신의 역할만을 하는 '부품'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는 이 체제를 이끌어 가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설국열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총리도 신도 아이도 혁명가도 모두가 하나의 부품으로 존재하는 세상 그것이 설국열차이며, 이 영화가 보는 현재 세상의 모습인 것이다. 또한 윌포드는 '미국주도하의 세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포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그 미국이 맨 앞에 있으면서 다른 칸을 앞으로 끌고 나가고 있다. 과연 이것은 옳은 방식일까? 영화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안에서 처음으로 '미디어'가 등장하는 것은 교육칸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윌포드의 영상을 보게 되고, 윌포드를 신격화하게 되는 데 이는 미디어가 행하는 일종의 '세뇌'작용을 암시하고 있다. 세계에서 '프로퍼간다'를 가장 잘하는 나라인 미국, '미디어'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미국'임을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묘사는 결국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동시에 '포드'는 자본주의 안에서 정치보다 우월한 자본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치'적 상징인 메이슨 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윌포드'이며 윌포드는 곧 자본이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자본가임에 분명하다. 정치 권력이 나라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면 자본권력은 전세계에 통용된다. 심지어는 한 나라 안에서도 정치보다는 자본의 권력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윌포드의 존재는 그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차칸은 인류를, 그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인 설국열차는 자본주의를, 그리고 기차를 통해 세상이 계속 순환되고 있다는 것을 영화 <설국열차>는 그리고 있다. - 요나 커티스가 요나에게 투시력이 있는지를 묻는다. 그때 사용하는 단어는 'clairvoyant'이다.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투시력이 있다'는 뜻도 있다. 영화안에서 요나는 앞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요나가 어째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그 능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영화안에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면 영화 안에서 커티스가 이것을 대놓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즉, 요나가 앞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기차의 앞칸은 일종의 미래이다. 따라서 요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요나=미래'라는 이야기와 같다.<설국열차>안에서 '요나'는 미래이며, 감독이 그녀를 어디로 보낼 것이냐는 곧, 감독이 생각하는 미래를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난 소리가 보인다'는 요나의 대사가 있었지만 편집됐다. 이를 통해 미래는 곧 '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요나'는 영화 안에서 독립적 개체이다. 영화안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임무를 수행한다. 커티스의 혁명도 결국 윌포드에 의해 이루어진 일종의 임무였고, 남궁민수도 혁명이 어느정도 이뤄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줘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계획대로라면 물칸에서 제압 당해야 했지만, 모든 기계, 부품은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임무 이상의 것을 했다 손 치더라도 그들은 결국 기차 안에서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다르다. 그녀는 기차 안에서 유일하게 독립적 개체이다. 그래서 그녀는 제멋대로다. 카페칸에서는 화려한 머리를 한 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향락칸에서는 술을 마시며, 윌포드의 칸 앞에서 뻗어버리기도 한다.사우나 칸에서는 형 프랑코를 칼로 찔러 죽이려다 제지를 당하기도 하지만, 엔진칸 앞에서는 쏘지 말라는 남궁민수의 말에 싫다고 말하며 '형 프랑코'에게 총을 난사한다. 이처럼 요나는 기차 안에서 뚜렷한 임무가 부여되지 않은 인물이며 동시에 시스템 안에 위치하고 있는 아버지의 말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인 존재이다. 영화는 그 독립체에 '미래'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시스템에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독립적으로 살것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미래는 독립적으로 사는 것에 있다고 자답하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을 깨고 나가라! <설국열차>는 그렇게 외치고 있다. - 백곰 결국 영화는 기차를 폭발시키고 요나와 타미를 밖으로 나가게 한다. 백인이 사라지고 흑인과 황인만 남은 것은 곧, 백인 위주의 기존 체제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고, 남자와 여자만 남은 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 즉 아담과 이브를 의미한다. 열차가 다 부서져 버린 것은 결국 이 같은 혁명에 필요한 희생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온 요나는 모자를 벗는다. 이는 바깥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됐음을 의미한다. 견딜 수 없는 온도라면 그녀는 모자를 벗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곰이 나타난다. 백곰의 의미는 단순하다. 희망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으며 동시에 생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먹이 사슬의 가장 위에 위치한 동물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백곰은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 백곰은 생태계의 존재를 의미하고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말한다. 백곰의 의미가 희망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중요한 영화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백곰이 화면을 응시하는 장면 때문이다. 이 장면을 통해 <설국열차>가 봉준호의 작품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에게 '빛'을 쏘아 보냄으로서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어 들였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송강호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역시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 들인다. 그 역할을 <설국열차>에서는 백곰이 한 것이다. 백곰은 화면을 응시하고 그 장면으로 감독은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인다. 그 안에서 묻고 싶은 것은 뻔할 것이다. '너는 기차 안에서 계속 살거니?' 결국 <설국열차>는 순환, 반복되는 이 곳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말이다.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돌직구 같은 영화이다. 이 수많은 상징들을 정말 드러내놓고 있다. 이글에는 언급하지 않은 다양한 상징들이 아직도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노인이 공들여 깎은 방망이'같다. 그냥 방망이지만 그 안에는 대단하고 세밀한 무언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엄청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있다. 위에 있는 상징들을 '한국'에 맞게 해석하면 바로 또 한국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은 그가 지금 현재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니고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한번만 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재미의 딱 50%만 느끼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모든 내용을 다 알고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화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정말 그냥 나온게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째서 많은 이들이 '봉테일, 봉테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그렇다. <설국열차>는 우리에게 꽤나 진지하게 묻고 있다. '넌 어디 칸에 살고 있니?', 그리고 '나갈래? 여기 계속 있을래?'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를 본 개개인들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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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럭저럭 재미있네요..심야에 보았더니 졸리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