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도 양화진처럼 외국인 선교사 묘역이 있다. 이름하여 치앙마이 외국인 묘지(Foreign Cemetery)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곳은 양화진처럼 선교사 묘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묘역에 있는 많은 분들이 선교사들이어서 대부분은 선교사 묘역이라 부른다. 게다가 개신교 최초로 치앙마이에 와서 사역하다가 돌아가신 멕길버리(1858-1911) 선교사 부부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이곳에 계셔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묘역의 조성 경위에 대하여는 이미 실은 바가 있어서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다.
최근에 조한나 선교사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너무도 어이없게... 팀을 보내고 돌아오다가 왕복 4차선의 큰 길 가운데서 있는데 술취한 운전사가 다른 차와 경쟁을 하다가 그만 가운데 서있는 선교사님을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낸 것이었다. 가보니 차 선의 넓은 길인데 차들이 너무 쌩쌩 달려서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문제는 시신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지를 물으니 한국에서 아드님이 와서 한국으로 가져가기를 원한다고 하여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소식은 매장지를 알아봐야 했다. 외국인 묘지에 문의를 하니 허락을 받는데 시간이 걸려서 우리가 원하는 날짜에는 매장을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화장을 하고 절반은 한국으로 절반은 이곳 교회의 큰 나무 밑에 뿌리겠디고 하였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데 '교회의 나무 밑에 뿌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어 오새우 선교사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는 나무 밑에 뿌리는 것보다 선교사 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역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먼저 화장을 하고 시간이 있으니 나중에 선교사 묘역에는 안장을 하자고 하였다. 다음날 선교사 묘역을 찾아 담당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와 의논하여 선교사 묘역에 안장하기로 하였다.
이 묘역은 태국 정부에서 기증한 관계로 비용은 저렴하였다. 매장할 경우에는 비용 2만 바트와 인부들의 작업 비용이 8천바트라고 하였다. 그런데 화장을 할 경우에는 1만 바트가 전부라고 하였다. 오세우 선교사님을 불러 같이 선교사 묘역으로 가서 상의를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묘비를 만드는 곳으로 가서 비석을 맞추는데 필요한 경비를 알아보니 1만 3천바트를 달라고 하여 1만2천바트에 하기로 하고 선교사 묘역 담당자와 만나기로 하였다.
선교사 묘역 담당자는 치앙라이를 여행하고 있었다. 3일 동안 오지 않아서 기다렸다가 그를 만났다. 이미 그에게 필요한 서류를 이메일로 보냈기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 그와 협의하여 어느 곳에 매장을 할 것인지와 소요되는 재정을 지불하고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와서 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에게서 받은 매장지는 CC10이었다. 그 옆에는 한인회장을 하였던 젊어서 운명을 달리하셨던 선생님의 부인이 묻혀 있었다.
1월 25일에 안장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선교사님에게 순복음 교단 목사 선교사들을 오라고 하여 같이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으나 모두가 바빠서 참석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그래 네가 해라. 안장 예배는 유가족과 고인을 위한 예배를 드려라."고 하였다. 나는 오세우 선교사에게 내가 예배를 주관하겠다고 하였고 기도할 사람과 참여할 사람을 나름대로 준비하였다.
25일 토요일 아침, 9시에 예배를 하기로 하였지만 일찍 가기로 하고 8시 15분쯤에 집을 나섰다. 사랑하는 아내가 동행하겠다고 하였다. 8시 35분쯤애 도착하였는데 오선교사가 아드님과 함께 미리 나와 있었다. 위치를 확인하고 묘비가 오는지를 확인하고 보니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넘기는 하였지만 묘지가 오고 사람들이 거의 다 온것 같아 예배를 시작하였다.
먼저 김정호 선교사에게 부탁을 하여 기도를 하고 유골함을 넣고 유가족부터 모래를 한줌씩 붙도록 하였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헌사를 한 후에 묘역을 정리하고 예배를 드렸다. 이성상 선교사의 기도로 시작하여 조복녀 선교사가 평소에 좋아하던 찬양인 "어저깨나 오늘이나 어느때든지"(135장)을 불렀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었다.
이사야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읽고 설교 시간이 되었다. 나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조한나 선교사를 가장 잘아는 남편부터 조안나 선교사하면 생각나는 일화나 기억할 것에 대하여 기억하여 말하도록 하였다. 남편인 오세우 선교사는 조 선교사는 좋은 아내였으며 이곳 환경이 어렵고 열악한데 자신을 따라 와주었다며 사후에 너무 과대한 대접을 받는 것 같다며 감사해했다. 아드님은 어머니는 입이 까다로와 태국음식을 잘 못먹었는데 저도 입이 짧아 어머니를 담은 것 같다고 하였다. 늘 열심히 밥해주셨던 어머님이 감사하고 지금의 아내도 열심히 밥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뒤를 이어 한국에서 온 자부도 한국에 오시면 열악한 태국의 시골로 가는 것을 많이 힘들어 하셨다. 어머니는 소명 때문에 어려운 이곳에서 사역하였다며 추억하였고 손녀인 아기는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셨던 할머니가 그립다고 하였다. 나는 선교사님들에게도 조한나 선교사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도록 하였다. 예배에 참여하였던 이성상, 서양숙, 김창식 선교사와 처녀 시절 단기 선교사로 나왔던 자매(지금은 결혼하여 남편과 같이 나왔음)가 자신이 어려울때 친언니처럼 자신을 가장 잘 챙겨주셨던 조한나 선교사를 추억하였다. 조한나 선교사를 아는 분들이 추억과 감사를 다 한 후에 나는 말씀을 정리하였다. 조한나 선교사는 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왜냐하면 음식이나 체질에 맞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소명을 따라 이곳에 와서 그것도 시골에서 사역하였다는 것은 힘든 일인데도 사역을 감당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이름을 바꿔가면서까지 선교사 사람이었다. 치앙센에서 선교할때 탈북자 문제로 문제가 되어 감옥에도 갇히고 결국은 추방되어 이름을 조복녀에서 조한나로 바꾸어 다시 태국에 들어와서 사역할 정도로 그녀는 태국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바처 선교한 선교사였다. 비록 교통 사고로 순직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녀의 생애를 태국 선교를 위해 바친 삶이었다.
설교를 마치고 우리의 헌신을 다짐하는 찬양인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288장을 불렀다. 광고를 하였다. 마침
옆에 계신 신현두 선교사님에게 축도를 부탁하였다. 축도가 마치고 난후에는 모두가 꽃을 바치는 헌화식을 하도록 하였다. 아드님이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서 단기팀이 와서 같이 예배에 참석하였고 헌화를 한 후에 외국인 묘역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온 팀을 인솔하고 이 치앙마이 외국인 묘역에 대한 안내를 하였다.
선교사 묘역의 조성 경위부터 시작하여 네델란드의 용병이었던 젠슨에서 부터 한국인 선교사의 자녀였던 김준기 형제 그리고 치앙마이 최초의 선교사였던 다니엘 멕길버리와 소피아 멕길버리 부부 그리고 태국이 영혼들을 위해 반백년을 바친 멕 다니엘의 일생과 36세에 순교를 당한 영국인 선교사에 대한 소개 그리고 하루만에 일생을 달리한 선교사 자녀들의 이야기를 팀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묘비명을 어떻게 쓸 것인지 한번 써보라고.... 나의 묘비명을 아마도 이렇게 쓰고 싶을 것이다. 태국인을 사랑한 선교사 권삼승...
<끝>
첫댓글 선교사님 오늘 우연히 카페에 들리게 되고 이 사연을 보게 되었고 다시한번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고 수고해 준 분들의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특별히 목사님이 이렇게 끝까지 수고 해주신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금할길 없네요 알리고 싶은곳에 알리기도 하고 기록을 이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