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밥상
문 남선
시골밥상’ 듣기만 하여도 정겨움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단어다. 요즘 서울 근교에서 시골밥상이라는 상호를 가끔씩 보게 된다. 이 상호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진 않지만 한 10여 년 정도는 되지 않았나 싶다.
처음 시골밥상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 행신지구에 사는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였다. 일 년 남짓한 기간에 친정 부모님 모두를 여윈 나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운 생각들로 자주 눈시울을 붉히곤 했었다. 그날도 내 허전함을 달래주려던 친구와 함께 문산의자운서원(율곡 선생을 기념하는 곳)을 들린 뒤 귀갓길에 시골밥상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도로 곁의 논밭 건너편에 차창을 통해 멀리 뵈던시골밥상이란 상호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했다.
화려하지 않아도 고향냄새 가득한 음식들.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즐겨 먹는 구수한 된장, 시골의 5일장을 연상케 하는 장떡, 된장독에서 막 퍼 담은 듯한 누런 막장이 풋고추 두세 개와 조화를 이루었다.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이라면 집 앞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금방 퍼 올린 물이 마치 얼음물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깊은 땅의 시원한 기운이 밴 우물물에 말은 밥과 텃밭에서 막 따온 고추를 막장에 쿡 찍어먹던 시절은 언제 생각해도 정겹고 그립기만하다.
우리의 가난했던 시절 보릿고개를 연상케 하는 꽁보리밥도 나왔다. 강산이 세월 따라 변하듯 먹을거리라고 예외일순 없을 것이다. 지금은 쌀보다 보리쌀이 더 비싸지만 그 시절의 꽁보리밥은 깊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먼 친척 중 한분은 쌀밥을 먹고 싶은 소망에 돈을 벌기 시작해서 이제는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을 정도의 거부가 되신 분도 있다.
일산의 호수공원을 산책하던 어느 날. 남편은 자주 가던민속촌이란 한식집을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는 중 시골밥상이란 상호를 보고 자동차의 핸들을 돌려 버렸다. 남편은 모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듯한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허나 함께한 세월이 25년인지라 잠시 후 남편 속내에 변화의 바람이 일거란 것까지 훤히 꿰뚫고 있던 나다.
짐작대로 고향집을 떠오르게 하는 나물로 가득한 음식 앞에서 남편의 표정은 금세 환해진다. 연이어 각종 나물이 조금씩 담긴 그릇들을 하나씩 비워가기 시작했다. 비벼진 내 밥의 반을 남편에게 덜어줬지만 그것도 금세 뚝딱이다. 남편은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마치 풀 향기 가득한 추억을 먹고 있는 듯했다.
남편은 호박잎을 무척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자주 해주지 못했다.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시절, 아마도 집 앞의 호박 넝쿨에서 뚝뚝 잘라온 호박잎을 쪄주시던 시어머니와의 추억을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 이후 남편은 외출 시 식사 때면 언제나 시골밥상만 찾았다.
가끔씩 외식 때면 식성과 기호가 다른 아이들과 남편과의 의견차로 피곤할 때가 많다. 피자나 샌드위치 햄버거 등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식성은 참 묘하다. 일부러 덜 익힌 듯, 피가 뚝뚝 흐를 듯한 스테이크도 곧잘 먹는다. 아이들이 그걸 먹고 한 번도 배탈 난적이 없었지만 남편은 늘 탈이라도 날까 봐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잔소리 반 걱정 반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둘이서 음식점을 찾을 때면 우린 거의 의견일치를 보니 남편이나 내 식성은 한식에 물든 완전 토종인 셈이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나이 50인 지천명(知天命)을 넘기면서 수 십 년의 세월이 주는 변화의 무게를 실감할 때가 많다. 소위 잘 나가던 기업도 십년이상 계속 성장하기가 어렵고, 개인의 부(富)와 권세(權勢) 또한 십년동안 지속되기 힘든 것을 많이 보아왔다. 변화의 흐름에 빠르게 편승하려는 기업이 업종전환을 하듯, 개인 역시 심신전환(心身轉換)을 게을리 하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우리와는 음식 기호가 다른 아들의 세대가 경제의 주축이 될 무렵 아마 시골 밥상도 추억의 음식점이 되지 않을까? 향수 짙은 이곳도 그때쯤이면 또 다른 향수로 다가올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일부러 전통 시장을 찾으며 남편이 좋아하는 호박잎 한 움큼을 사서 식탁에 올리며 오늘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들의 추억과 아들의 추억은 판이하다. 가난한 후진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들 세대에 비해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지금은 세계 무역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들세대의 추억이 어찌 비슷할 수가 있겠는가?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등에서 고속 주행으로 360도 회전하는 청룡열차의 쾌감을 즐기는 일이나 밧줄에 몸을 매단 채 허공에 내동댕이쳐지는 번지 점프의 아찔함이나 귀를 찢는 음악 속에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일등이 아들 세대의 추억 속에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허나 물질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인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 세대의 추억처럼 깊고 정겨운 맛이 있을지.
내일은 토요일이다. 잘 가꿔진 시민의 휴식처인 일산의 호수 공원을 산책하며 가을의 정취를 느껴 봐야겠다. 그리고 내일은 호수공원 근방의시골밥상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저녁을 해결해야겠다.
2002년 10월
첫댓글 흩어져서 뒹구는 글들을 짬날때면 정리를 해 봅니다. 오늘 아침엔 구석에 쿡 처박힌 글 한편을 정리해봤습니다. 어린 시절 깡촌에서 자란 경험이 얼마나 많은 나의 글 소재가 되는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골밥상, 잠시 동심으로 돌아 가봅니다.
요즘 참 마음이 어지러워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뭔 눔의 오해가 그리도 많고 그 오해가 또다른 오래를 부르고... 우리 어린 시절 친구들은 눈빛만 봐도 모든게 용서되고 이해됐는데... 그래서 시골이 좋아요. 사회 친구들은 왜들 그리 패싸움을 하고 편가르기를 하는지... 난 그게 슬퍼요. ㅎㅎㅎㅎ
시골밥상이라고 언뜻 생각나는게 시골에서 채취한 나물들이랑 들깨가 들어간 걸쭉한 온갖 야채 찜등 ㅎㅎ
토속적이 분위기로 식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예
선배님의 글 모아 쓴 글을 읽어면서 옛날에 먹었든 음식들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쉽게 식사를 해결하면서편하게 먹을수 있는 식당이 시골밥상, 손님밥상들이 약간의 변화를 넣어서 솜씨를 뽐내서
요즘세대에 맞게 잘 하시는 음식점이 많아져서 좋습니다
명숙후배 난 사월 초파일(엄마 제삿날)이 가까워지면 가슴앓이를 조금씩 해요. 엄마 아버지는 그래도 나한테 참 많은 기대를 한것 같은데.. 가난한 6남매의 장남 며느리 역할 하느라 지지리 궁상만 떨고 고생만 하는 모습(내 안정된 모습을 한번도 엄마 어버지는 보지 못했어요)만 보여줘서 너무 가슴이 아파요. 생활의 안정을 찾은 건 불과 6년 전쯤부터였지 결혼과 동시에 난 고난의 길만 걸어왔어요. 나 글 안썼으면 정신병자 됐을지도 몰러. ㅎㅎㅎㅎㅎㅎ한마음 축제때 언능 엄마 아부지 만나러 가고 싶네요.